베트남서 만난 통기타 가수 이장순… 너는 내 운명
통기타 메고 전쟁터에 가다
2016년 08월 18일(목) 00:00
잭슨 파이브 시절 마이클 잭슨의 모습(왼쪽). 스티브 매닝 제공
통기타 가수 이장순이 군복무 중 월남 파병에 참가하게 된다. 31사단 문선대(군 부대 안에서 음악 등의 문예활동을 하는 문화선전대)에 복무 중 월남에 자원, 파병된 것이다. 헌데 더블백보다 먼저 챙겨간 것이 통기타였다. 그의 음악에 대한 열정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어쨌든 통기타를 매고 파병 수송전함에 오른 것이다. (국소남은 다음해인 1970년 5월에 파병됐다.)

●이장순과 운명적인 만남

1970년 월남의 초여름, 무지하게 밝은 달빛이 내리쬐던 밤, 이래서 운명이라고 하는 걸까. 국소남과 이장순은 맹호 기갑연대에서 첫 만남이 이뤄진다. 국소남은 주월한국군 군사령부 특수정보부대(AIU)에 근무 중에 맹호기갑연대에 파견 근무중이었고, 이장순은 맹호기갑연대 2대대(직할대대) 군수과에 소속을 두고 있었다. 어느날 저녁 국소남이 소속 정보장교와 순찰하는 도중 대대 벙커에서 노래소리가 들렸다. 국소남의 귀에 분명히 쟈니 케쉬의 'Detroit city'가 들린 것이다. 이장순이 벙커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팝송이라면 누구보다도 일가견이 있었던 국소남은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그날 밤 국소남과 이장순의 첫 만남은 그렇게 이뤄졌다. 더구나 같은 광주 출신으로 동향에다 음악성 또한 비슷해서 그날 이후 밤이면 밤마다 기타와 노래에 빠져들며 우정을 더해갔다. 그리고 그 우정의 끝을 같이 하고자 약속하게 된다.

얼마 후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2대대 군수창고 앞에 쌓아둔 탄약상자들을 방치, 비에 젖게한 일로 군수과 내 최고참인 이장순이 유치장 신세를 지게 된다. 하지만 군대에선 보직이 좋으면 당연히 끗발도 좋은 법, 국소남이 손을 써 배려했다. 날이 갈수록 둘의 우정은 깊어만 가는데, 그 해 12월 하순, 귀국을 이틀 앞둔 이장순에게 어두운 소식이 전해진다. 국소남이 퀴논에서 귀대 중에 베트콩 매복조에게 기습당해 부상을 입고 미군병원으로 급후송됐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다. 그리고 생사를 확인치도 못한채 이장순은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후일 두 사람은 각기 제대 후 1971년 봄, 광주 금남로 관광호텔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다. 제2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베트콩 매복조에게 기습

국소남은 1970년 12월19일, 그 전투로 퀴논 미군병원에서 비장적출, 80여 바늘 봉합 수술을 받게 된다. 필자인 국소남이 한국군인데 어떻게 미군병원에서 수술, 입원할 수 있었는지 의아해 할 수 있다. 여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고 당시 퀴논에서 맹호기갑연대(푸타이지역)로 가는 19번 공로(도로)에서 지프차로 미군을 싣고 귀대하던 중 베트콩 매복조의 타킷이 되어 급습을 당한 것이다. 물론 대응사격이 있었다. 당시 차량엔 한국군 운전병, 미국 백인병사 2명, 흑인상사 1명, 그리고 선임탑승자는 국소남 이렇게 5명이었다. 그 교전에서 한국군 운전병과 미국 백인병사 2명은 현장에서 목숨을 잃고, 국소남과 흑인상사는 치명적 중상을 당하게 된다. 비는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고, 도로에서 직격포를 맞은 지프차량이 하늘로 떠오르고 빗발치는 총소리에 혼비백산했다. 땅에 떨어져있는 무전기로 맹호기갑연대 수색중대에 구조요청을 하는 순간, 도로 한 가운데에서 중상을 당한 흑인상사가 꼼짝도 못하고 내게 움직이게 해달라고 외쳐댄다. 도로 옆 도랑에 몸을 숨긴 내가 흑인상사를 죽을 힘을 다해 안전지대라고 느껴진 도랑으로 옮겨왔다. 그나마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다. 흑인상사는 가슴과 복부에 심한 파편상을, 그리고 한쪽다리 대퇴부는 총상으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국소남도 복부에 총상과 머리, 이마, 무릎 등에 파편상, 오른쪽 겨드랑이 쪽에 심한 화상을 입었는데, 온 몸에선 피가 빗물에 씻겨 나가고 있었다. 잠시 후 미군 전투 헬기, 의무 헬기가 도착하고, 이미 죽은 병사의 시신과 부상자를 헬기에 옮겨 싣는 순간 흑인 상사가 국소남의 손을 꼭 잡았다. 생명의 은인인 국소남도 크게 부상을 당해 사경을 헤매고 있음을 직감했는지, 미군 병원으로 데려가 살려야 겠다고 마음 먹었던 것이다. 하여 국소남이 미군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서로간에 생명을 구해준 두사람의 인연, 결국 흑인상사는 오른쪽 다리를 절단해야하는 아픔을 겪게 됐다. 이름은 David Vinnel이었고 인디애나폴리스 주립대학을 졸업한 35살의 엘리트 군인이었다. 그 무렵 이장순은 한국군 사병 신분으로 면회를 올 수도 없었고 그 당시 19번 공로에서 매복기습이 빈번한 때인지라 더더욱 그랬다.

●12살 '마이클 잭슨'의 위문공연

'아, 내 어찌 그날을 잊으랴! 1970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12월19일 큰 수술을 마친 나는 다음날 새벽 6시쯤에 의식을 찾고 깨어났다. 여명의 시간이 지났음일까. 창문 밖 어둠이 서서히 걷히고 있는 걸 느끼고 있었다. 잠의 신이 나를 다시 꿈속으로 데리고 갔다. 1시간쯤이나 지났을까. 음악소리에 다시 잠을 깼다. 길다란 하얀 커튼 사이로 햇빛이 눈을 쪼갠다. 그 하얀 커튼 밑 창틀받이 위에 놓여진 오디오 기기에서 음악이 흘러 나왔다.

'I'll be there, I'll be there….' 잭슨 파이브의 노래가 내 귀를 후벼왔다. 정말 아름다운 노래, 잘 부르고 멋진 곡이었다. 본국에서 분명 빌보드를 석권했거나 큰 히트를 하고 있는 곡이라 느껴졌다. 내가 세상에 두번 태어났다고 느껴진 그때에 'I'll be there'를 듣게 됐던 것이다. 그 순간만은 내가 천국에 있었다. 점심식사 후 병원이 술렁거렸다. 3일 뒤 크리스마스 이브에 본국 연예인단의 위문공연이 있다는 것이다. 위문공연단에 잭슨 파이브와 'Turn around look at me', 'Time'을 부른 컨트리 가수 글렌 캠벨, 그리고 'Slowly'의 여가수 앤 마그렛과 더불어 MC는 그 전설적인 코미디언 밥 호프가 온다고 해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이것밖에 없었다. 세상에, 와우!

잭슨 파이브는 막내인 마이클 잭슨이 14살에 솔로로 독립하기 전, 그의 형들(4명)과 더불어 활동했던 그룹이다. 물론 마이클 잭슨이 그룹의 리드싱어였던건 아는사람은 다 알터이고. 그야말로 하늘이 준 행운이었다. 그날 밤 마이클 잭슨이 부른 'I'll be there'는 평생동안 잊지못할 노래로 기억에 남아있다. 마이클잭슨 그는 누구인가. 후일 금세계가 칭호하던 팝의 황제가 아니었던가. 공연은 시작이 되고…. 통기타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