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광주 최고 인기 DJ는 '백일섭ㆍ임하룡'
23. TV 드라마ㆍ인기 DJ
'군웅할거시대' 도래
'군웅할거시대' 도래
2017년 06월 08일(목) 00:00 |
![]() 1971년부터 1989년까지 18년간 방영된 MBC 수사반장. 최불암, 김상순, 남성훈 등이 출연해 인기를 모았다.(위). 1970년대부터 40년 동안 광주에서 통기타 하나로 노래인생을 걸어온 故이장순씨(아래 오른쪽). 아래 왼쪽은 70년대 중반 광주 충장로에서 DJ로 활동한 탤런트 백일섭(위)와 개그맨 임하룡. 뉴시스 자료사진 |
1970년대의 대한민국, 그야말로 빈국이요 가난한 나라였다. 1975년까지 북한의 GNP(국민총생산)가 한국보다 우위였던 시대였다.
1970년대에 북한의 과잉생산, 악성재고, 중복투자 등으로 뒷걸음 치기시작하더니 80년대에 구소련이 무너지면서 지원이 끊기자 완전히 무너져 버린 북한. 1955년의 한국 GNP는 고작 65달러였다. 1960년대에 79달러, 1970년에 254달러, 1985년에 2309달러, 1990년 6147달러, 1995년부터 GNP가 GNI(국민총소득)로 발표되기 시작했다.
2000년 1만1865달러, 2010년 2만2170달러, 2015년 1만1865달러에서 현재는 성장이 정체돼 있지만 3만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다. 1960년 대비 무려 346배의 성장을 이뤘다.
1970년 초 국내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암울한 시대였다. 박정희 군사독재 체제가 1963년 12월 쿠데타로 인해 시작되면서 1979년 10월까지 18년간 통치됐다. 통치 9년째(통치기간 중간시기)인 1972년 10월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단행한 초 헌법적 비상조치인 서슬퍼렇던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서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시대적 빈곤의 돌파구를 어떻게든 갈망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문화적 풍요가 미미했던 그때에 TV 드라마가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하나의 돌파구였는지도 모른다.
●TV드라마ㆍ수사반장ㆍ여로는 국민드라마
1962년, KBS가 개국 TV드라마 '나는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희곡)'를 시작으로 '전설의 고향'이 15년간 방영 후 종영됐다 1990년대 재부활했다. 1965년 TBC, KBS 양사의 일일사극 천하시대가 판을 치더니 1969년 MBC의 개국으로 TBC, KBS, MBC 3파전의 시대가 열리면서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TV 일일극 시대가 열렸다.
1962년 TV 보급률이 1만5000대에서 1970년대 300만대(1962년 대비 200배 증가)에 이르렀다. 1970년대 당시 최고의 인기드라마는 MBC의 '수사반장'과 KBS의 '여로(way of woman)'였다. MBC 수사반장은 1971년 3월6일부터 1989년10월12일까지 무려 18년간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이다.
1977년4월에 300회, 1979년 4월에 400회(1984년 10월~1985년4월까지 잠정 중단)를 기록했다. 수사반장의 실제 모델이던 최중락 총경이 2017년3월24일 세상을 떠났다. 수사반장 역의 최불암을 비롯해 형사역이 김상순, 조경환, 남성훈, 김호정, 김화란과 여순경 역할의 김영애, 노경주, 이금복, 염복순, 윤경숙, 이휘향이 열연을 펼쳤다. 수사반장 역의 최불암을 비롯해 노경주 이휘향을 제외한 모든 출연 연기자들이 현재는 이 세상과 작별한 사람들이다.
KBS '여로(이남섭 극본ㆍ연출)'는 211부작으로 1972년4월3일~12월19일까지 방영됐던 일일 드라마다. 어려운 운명속에 태어난 '분이(태현실)'의 일대기를 그린 드라마다. 가난한 집안의 착하고 예쁜 딸 '분이'가 부잣집에 시집와 바보남편인 영구(장욱제)와 살아가는 일대기를 담았다. 장욱제, 태현실, 송승환, 박주아, 최정훈 등이 열연했다.
1971년 TBC드라마 '아씨'의 선풍적인 인기에 억눌렸던 KBS가 야심차게 제작한 드라마 여로의 시청률이 70% 이상이었다는 발표도 있었다. 드라마 여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에피소드도 많았다. 당시 극장가에서는 이 시간만 되면 영화관객들이 영화를 보다 말고 휴게실로 몰려나와 TV를 보는 바람에 아예 20~30분간 영화를 중단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저녁시장은 텅텅 비었고 상인들과 손님들이 모두 근처 다방이나 식당으로 모였다. 이 시간대에 도둑을 맞는 집과 밥태우는 집도 많았으며 심지어 만화가게에서는 입장료를 받고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택시와 버스마저 손님이 끊겨 울상을 짓는 등 저녁방송시간(오후 7시30분)대에는 거리가 텅텅 비었다고 한다.
1971년 TBC '아씨'이후 치열하게 펼쳐진 연속극 전쟁의 승자는 '여로'였다. '여로'는 그렇게 국민드라마로 승격됐다. 이미자가 부른 드라마 주제가는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 옛날 옥색댕기 바람에 나부낄 때/봄나비 나래위에 꿈을 실어 보았는데/날으는 낙엽따라 어디론가 가버렸나/무심한 강물위에 잔주름 여울지고/아쉬움에 돌아보는 여자의 길'
필자는 이 주제가를 통기타에 실어 수없이 불렀다. 주로 음악감상실 무대에서 신청음악으로 들려줬다. 국내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여로'가 11년 뒤 1983년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산가족찾기 공식 시청률은 78%가 넘었다고 한다.
당초 1시간30분간 방송할 예정이었지만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여의도방송국 앞에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138일(1983년 6월30~11월14일)동안 릴레이 생방송을 이어갔다.
총 453시간 45분으로 단일 프로그램으로 세계 최장기간 연속 생방송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방송기록물은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선정되는 성과를 거뒀다. 이 프로그램이 방송될 당시 국민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어디 한사람이라도 있었을까.
●DJ들의 천국시대 도래하다
1970년대 초 사람들이 가난의 때를 벗기라도 했던것일까. 유행의 물결이 사람의 본성마저 뒤짚어 놓기라도 하듯, 장발과 미니스커트에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라는 시대적인 상징들이 생활과 사람들 마음속에 자리했고 마침내 폭발적으로 사회에 퍼져 나갔다.
유행이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그 유행의 정체성을 매스미디어가 색을 칠하고 주도하게 되면 걷잡을 수없는 상황에 이른다. 외국의 음악, 흔히 팝(Pop)으로 불리는 음악이 그 좋은 예다. 1960년대 후반서부터 시작된 서구의 팝이 1970년에 접어들면서 날개를 활짝펴기 시작했다.
광주라는 조그만 도시도 예외일수는 없었다. 그것을 주도한 팝의 메신저 역할은 방송이 담당했고 그 주역은 '소수옥, 정무일, 이상옥'이었다. 광주인구가 1970년에 62만평, 1973년에 동구ㆍ서구로 분할됐으며 1975년에 73만명, 1986년에야 직할시로 승격돼으며 1995년에 광역시가 됐다.
1970년 당시는 상무ㆍ금호ㆍ일곡ㆍ용봉ㆍ첨단지구는 없었다. 광주 외곽이라고 해봐야 화순 방면으로는 학동이 끝이었고 송정 방면은 쌍촌동이 끝지점이었다. 담양은 풍양동, 장성은 양산동이 맨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광주의 중심은 충장로와 금남로였다. 광주의 명동이라 불리는 충장로에서부터 팝음악이 서서히 용트림을 시작했고 그 팝의 전도사라 할 수있는 '디스크자키(DJ)'의 군웅할거 시대가 활짝 열렸다.
1960년대 후반 소수옥, 정무일, 권혁상, 허건영을 비롯해 1970년대 초(70~72)박건수, 이장순, 이용완, 지병오, 장찬정, 김형주, 1970년대 중반(73~76) 이세용, 신이진, 정영남, 김민수, 길인태, 허인회, 김영희, 1970년대 말(77~79) 박주은, 나경일, 김석, 김민정 등 기라성 같은 DJ들이 충장로를 중심으로 주변외곽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DJ들의 저변확대가 그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중심타운가의 DJ들은 나름대로 인기를 얻게 됐고 각지에 자리잡은 많은 영웅들이 세력다툼을 하는 이른바 '군웅할거(Rivaly of Local Barans)' 시대를 맞이했다. DJ들의 천국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70년대 말까지 상상을 초월할 만큼 활동지역이 확대돼 갔다. 충장로, 금남로를 비롯해 남동, 전대병원 인근, 서방지역, 조선대, 전남대 인근 등으로 영역이 넓어졌다.
●백일섭 임하룡 광주서 DJ활동
1970년대 중반(73~76) 광주에서 인기 탤런트 백일섭이 DJ 음악감상실(충장로 1가 국제빌딩 지하)에서, 개그맨 임하룡은 '그랑나랑(충장로 2가)에서 DJ로 활약했다는 사실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특히 임하룡은 객석에 있는 여성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100% 부킹 성공률을 자랑했다. 유연한 말솜씨에 몸개그까지 동원했으며 그의 그림(캐리커쳐) 솜씨는 일품이어서 한장 그려주고 나면 '만사휴의'가 아닌 '일사천리'였다. 혀 놀림과 그림솜씨에 모두들 넋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아무튼 그 방면에서만큼은 '달인'이었다. 통기타 가수ㆍ문화공연 시민기자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