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도ㆍ윤두서… 조선시대 정치ㆍ예술 '역동적 스토리'
해남윤씨 어초은공파 본래 강진서 터 잡고 윤효정때 해남 정착
정치ㆍ경제ㆍ문화ㆍ미술 다방면서 뛰어난 업적
정치ㆍ경제ㆍ문화ㆍ미술 다방면서 뛰어난 업적
2017년 07월 14일(금) 00:00 |
![]() 윤선도는 효종의 세자 시절 사부였다. 임금이 된 효종은 윤선도에게 수원에 집을 하사했다. 그것을 윤선도가 82세 때에 현 위치로 이건하면서 '녹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때 심은 은행나무가 거목이 되어 담장 밖에 서 있다. |
해남윤씨는 본래 해남과 인접한 강진에 터를 잡았다. 그러다가 윤효정(尹孝貞ㆍ1476~1543) 때에 해남에 정착했다. 호가 어초은이기에 그의 후손들을 '어초은파'라고 하고, 연동에서 살았기에 '연동파'라고도 한다.
해남윤씨는 이주 1세대 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윤효정이 구, 행, 복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호남 3걸로 불린 윤구가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가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고, 윤행과 윤복도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두루 역임했기 때문이다. 문과에 급제한데다가 새정치를 표방하는 신진사림이어서 그러했던 것이다.
전성기를 맞았다가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희생을 당하다.
16세기에 해남윤씨는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렇게 급성장하게 된 데에는 약자를 배려했던 점도 한몫 했던 것 같다. 윤효정이 사재를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죄인을 방면하는 등의 선행을 베풀었고, 윤복은 부안현감 재임 때 구휼에 진력했다고 한다. 이를 이어받아 윤선도는 광양 유배 때에 향교 운영을 위해 자기 재산을 기부했고, 진도 바다를 막아 현지인에게 기증한 바도 있다.
윤구의 아들 홍중ㆍ의중 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했다. 윤의중은 문신의 인사권을 행사하는 이조정랑,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는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리하여 해남윤씨 가문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정점은 잠시였다. 1589년(선조 22)에 '정여립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윤의중이 정여립과 친하고 윤의중의 생질 이발이 동인의 영수로 활약함으로써 윤씨 가문도 정쟁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반대파 서인의 공세에 윤의중은 파직되어 낙향하는 도중에 죽음을 맞고 말았다.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될 때, 윤씨 집안은 동인의 핵심이었고 서인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사건을 확대시켰기 때문에 이런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정쟁의 인연은 유배와 예송논쟁으로 이어지다.
때는 광해군, 윤의중의 둘째 아들 윤유기는 문과 급제 후 관직에 있으면서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의 아들 윤선도(생부는 윤유심)는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이이첨 탄핵 상소를 올렸다. 이 한 장의 상소로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아버지는 파직당하고, 아들은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윤선도(尹善道, 1587~1671)는 호가 고산인데, 거침없는 상소와 굴곡진 유배로 역사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큰 이름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해남윤씨 집안에 있어서도 가장 비중 있는 인물이다. 그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권력의 물줄기를 예송으로 뒤흔들었기 때문에, 늘 당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임금의 병을 고칠 정도로 의학에 조예가 깊어 유의의 대명사로 꼽히고 있다. 어디 그뿐이랴! 병자호란으로 임금이 항복하자 보길도에 들어가 부용동을 건설하여 한국 정원사에도 족적을 남겼다.
여기에서 녹우당(綠雨堂) 말을 아니할 수 없다. 윤씨가의 안채는 1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온다. 하지만 사랑채는 효종 임금이 사부인 윤선도에게 하사하여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윤선도가 82세 되던 166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면서 '녹우당'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건물형태가 남방식이 아니라 북방식이다. 그때 심은 은행나무는 현재 거목이 되어 도도한 역사의 흐름을 증명해주고 있다.
당쟁의 여파는 계속 윤씨 집안에 미쳤다. 윤선도는 세 아들을 두었다. 맏아들 윤인미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도량이 넓고 박식하여 천문, 지리, 의약 등에까지 정통했으나, 문과 급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죄'에 연좌되어 벼슬에 나갈 수 없었다. 윤인미의 외아들 윤이석 또한 당쟁의 여파로 관직에 나가지 못하다 말년에야 겨우 빛을 보았다. 당시 정국은 인조반정 후 권력을 쥔 서인과 동인에서 분당된 남인이 그 반대편에서 다투는 형국이었는데, 윤씨가는 남인에 속했다.
정치적 한을 예술로 승화시켜 사실주의 풍속화를 개척하다.
윤이석의 아들이 윤두서이다.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가 되는데, 호가 공재이고, 한국 사실주의 풍속화의 개척자이다. 그가 남긴 '자화상'(국보 제240호)은 사실성을 토대로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을 표현했다. 목기 깎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 등의 풍속화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를 토대로 18세기에 정선에 의해 주도된 진경산수화, 김홍도ㆍ신윤복에 의해 보급된 풍속화가 전면에 등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술계의 변화는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과 맥을 같이 했다. 그래서 그는 이익 등의 실학자들과 교류했고, 외증손 다산 정약용이 실학의 집대성자가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우리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실학, 진경산수화, 풍속화 등이 모두 해남윤씨 집에서 그 토대가 형성되었다. 윤두서의 맏아들 윤덕희 역시 아버지의 재주를 물려받아 회화로 이름을 떨치는 등 손자 윤용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 문인화가 집안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서울에서 이 윤씨들 그림을 찾는 이가 많았다. 그리고 남종화의 계승자로 알려진 소치 허유도 윤씨 집에서 전통화풍을 익혔다고 한다.
이런 작품들은 현재 '고산윤선도 유물전시관'에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이 외에 각종 문헌자료들도 소장되어 있다. 모두 4600여점 된다고 한다. 단일 종가로는 전국 최대 규모가 아닐까 한다.
간척지를 개간하는 등 일찍부터 바다 경영에 눈을 뜨다.
해남윤씨가 이렇게 왕성한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경제력이 그만큼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6~17세기에 섬을 진취적으로 경영하기 시작했다. 가령, 윤의중은 대대적으로 해남 연해의 갯벌을 막아 농토로 만들었다. 그리고 윤선도를 비롯한 후손들은 보길도, 진도, 청산도, 소안도, 평인도 등지에 간척지를 개간하고 미역밭을 두는 등 여러 섬을 경영했다. 우리나라 해양 개척자 원조격에 해당된다.
하지만 해남윤씨가도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위태로운 성황에 처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농민항쟁이 일어났으며, 신분제의 동요로 그동안 유지해 온 지주경영 방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은 윤선도의 9세손 종부 광주이씨 부인이 쓴 '규한록'에 담겨 있다. 종부라면 제사가 떠오르는데, 윤씨가의 많은 제사는 수 백년 동안 종부를 통해 이어져 내려오고 있으며 어려웠던 6?25전쟁 때에도 중단되지 않았다고 한다.
근대화 바람과 가족계획 시대에 맞선 종가의 변화
17세손 윤정현(尹定鉉, 1882~1950)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격동의 변혁기를 잘 넘겼다고 평가받는다. 400년 동안 소유해온 진도 토지를 문중 채무상환을 위해 어업조합에 매도했고, 간척ㆍ금융ㆍ염전 등을 통해 재산증식에 힘썼다. 일본 육군 우시지마 장군이 공재 윤두서 그림을 팔라고 하자, "우리 혼을 팔 수 없다"며 단호히 거절한 일화는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귀감이 되었다. 그의 아들 윤영선은 이를 잘 이어받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는 데에 성공한다.
현재 종손인 윤형식은 객지 생활을 하다가 40세 무렵에 귀향하여 현재까지 녹우당 종택을 지켜 오고 있다. 80이 넘은 윤형식 옹은 종가 유지가 어려운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장의 자산과 규율을 법인화하여 운영하는 데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앞으로 우리 지역의 종가에 큰 시사점을 줄 것이다.
*이 글은 전남도와 전남문화관광재단이 지난 2016.8~2017.2에 진행된 조사를 토대로 2017년 4월에 발간된 '전남종가Ⅰ'를 토대로 작성된 것입니다.
김덕진 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