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나비 '김정호 모친, 영화 '서편제' 실제 모델
국소남 통기타-노스텔지어 7080 Ⅴ
광주북동 그의 탯자리
김정호의 거리 만들자
음계 중 F음 없어 독특
2017년 11월 08일(수) 00:00
지난 10월14일~15일 수창초교(김정호 모교)에서 열린 제3회 김정호 추모음악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필자.
● 촛불집회=촛불혁명

한국정치, 어둡고 긴 터널에서 언제쯤 밝은 빛을 만날 수 있을까. 2017년 10월 28일, 7만여 명이 운집, 광화문과 여의도에서 1주년 기념집회인 촛불 돌잔치가 열렸다. 지난해 10월 29일에 시작해 23차 평화적 촛불집회가 열려 1700만 명이 참여했다. 단 한건의 사고도 없었다. 독일 '에버트 인권상'을 수상한, 노벨 평화상 등이 운운됐던 촛불이었다.

문재인 정부에서부터 지금까지 정치적인 통합을 이뤄내지 못하고 적폐청산 또한 뜨거운 감자다.

문재인 정부출범 반년 째, 지지율이 76%로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터에 우리 사회가 나아졌다고 말하지만 '나의 삶은 그대로다'란 말에 더 공감이 간다. '2030의 잠금해제'란 문화연구자 오혜진의 최근 칼럼에서 '남한은 비정상적인 북한의 도발 가능성 앞에 무심한 듯 생존가방을 챙기며 오직 촛불이라는 조용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무고하고 잠재적인 피해자다 '선량하고 무고한 양민'에서 한강의 표현대로라면 순수하고 나약한 것이야말로 지난 시대에 지식인들이 만들고 극복하려 한 상상된 민중의 상 아닌가. 스스로를 역사의 피해자에 두는 무성찰은 욕망과 만난다. 오랜 식민 경험과 반공주의를 내면화한 결과다'

정치하는 사람들아! 민생과 국민을 바로 보고, 바른 정진으로 바른 정치를 하라. 못다한 개혁 이뤄내라. 지난 겨울 촛불집회를 촛불혁명이라 불러도 되겠다.



(13)신중현과 엽전들 1집 '미인'

필자가 7080의 국내 포크명반 20선에서 신중현과 엽전들의 '미인'을 명반으로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포크록 장르의 곡이 대중가요에 미쳤던 큰 인기에 기인했기 때문이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초판 1000장의 재녹음 후 재판이 나왔을 때 우리나라에 4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판매수치의 기록을 세웠고, 일반 대중들의 마음속에 포크록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각인 시켰던 곡. '미인'이야말로 국내 포크록의 명곡임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신중현은 60년대 초 '히키 신' '재키 신'이라는 예명으로 미 8군에서 활동하다 애드 훠(ADD 4)라는 밴드를 통해 리드 기타, 퍼스트 기타라는 포지션을 자리매김하며 기타리스트로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펄 시스터즈, 김추자, 박인수, 송만수, 김정미, 장현 등 그들의 노래를 작사ㆍ작곡ㆍ프로듀싱 해주는 등 이른바 신중현 사단이 만들어지면서 대중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기에 이른다.

1973년에 5인조 그룹(신중현ㆍ이남이ㆍ김호식ㆍ최이철ㆍ문영배) 신중현과 엽전들을 구성, 한 호텔방에서 6개월간 장기투숙하며 일류 그룹으로서 성장통을 겪는다. 최초에는 이남이, 김호식과 3인조 그룹이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3인조 보컬 그룹이었다. 1973년에 터진 석유파동으로 음반 산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유는 LP판을 제작하는 재료 중 석유에서 추출하는 재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구레코드사에서 기념앨범 1000장만 찍어낸 타이틀 곡 '저 여인'이 초반 발매 후 방송국 라디오 PD들에만 돌려진다. 헌데 타이틀곡보다 런닝 타임이 4분30초나 되는 '미인'이 빅히트를 하게 된다.

즈음 드럼의 김호식이 탈퇴, 권용남이 가세하고 1974년 재녹음된 음반은 역대급 최고의 판매기록을 갈아치우게 되고 다른 곡들은 '미인'에 묻혀 색이 바래버린다. 그 엘피에는 '긴긴 밤' '나는 몰라' '나는 너를 사랑해' '떠오르는 태양' 등이 수록됐다



(14) 1975년, 김정호 2집 '하얀 나비'

● 죽어서 하얀나비가 된 남자

1985년, 3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던 가수 김정호의 최대 히트곡 하나를 꼽자면 '하얀 나비'다. 노래에 깃든 비장함이 이토록 진하게 풍긴 가수가 있었을까. 김정호는 1973년 '이름 모를 소녀'로 데뷔, 1985년 11월29일 폐결핵으로 죽기까지 4장의 앨범과 수많은 곡을 남기고 우리 곁을 떠났다. 포크송 가수이자 작곡가로 잘 알려진 그는 가요계에 새로운 양식의 곡들을 선보였다. 특히 한(恨)을 가진 특유의 목소리로 노래한 천재 뮤지션이라 불렸다. 그렇게 불린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김광석은 죽어서 노래하는 가객으로 '김광석의 거리'에서 부활했고, 김정호는 죽어서 노래하는 '하얀나비'가 됐다. 32살과 33살의 나이에 요절한 두 가수는 우리들 가슴속에 깊은 음의 문신을 남기고 11월 낙엽처럼 떠나간 가수다.

그리스의 작곡가 미키스 테오도라키스의 '내 기억 속에 11월은 영원히 남으리'를 아그네스 발차가 '기차는 8시에 떠나네'라는 가사로 그렇게 슬프게도 노래하더니만….

'기차는 8시에 떠나네. 내 기억 속에 11월은 영원히 남으리' 이 노래는 독일 나치에 저항한 한 레지스탕스의 애처롭고 안타까움이 담겨진 사연이 있다. 연인과 함께 카테리나로 떠나기로 했던 한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와 플랫폼에서 만나지 못하고 8시에 떠나는 기차를 속절없이 바라보며 처절하고 가슴 아프게 부른 곡이다.

1985년 11월 29일 '꽃잎은 시들어도 슬퍼하지 말아요. 때가 되면 다시 필걸 서러워 말아요. 음…' 그도 그렇게 하얀 나비돼 11월 우리 곁을 떠나 버렸다.



● 김정호, 빛고을 광주출신 가수

1952년 4월 21일. 광주시 북동에서 부친인 조재영씨와 모친인 박숙자씨 사이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여수 경찰서장을 지내고 출판사를 경영했으며 모친은 국악인으로 영화 서편제의 실제 모델이다. 김정호의 음악적인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 받은 게 분명하다. 외가는 그야말로 국악인 집안이다. 김정호보다 오래 생존했던 모친, 그의 외조부는 판소리의 명창으로 일제시대 '열사가'로 유명했던 박동실이다. 박동실은 인간문화재 김소희, 한승호, 한애순 등을 길러낸 대가였고 명고수인 김동준이 그 밑에서 판소리를 배웠을 정도다.

후일 정정렬의 서편신제 계보와 정응민의 보성제 계보와 다른 서편고제 계보의 전승에서 빼놓을 수 없었던 인물이다.

외가 쪽 5촌 아저씨는 국립국악원 아쟁 수석단원을 역임한 박종선이다. 한일섭에게 아쟁을 배워 독자적인 유파를 이뤘는데 그의 유파는 현재 판소리의 명창 김일구가 주도하는 김일구류와 함께 아쟁연주의 양대 산맥으로 꼽힐 정도다. 이 정도의 국악계 성골 외가를 타고난 셈이다. 당시 음악을 한다는 것 자체를 곱게 봐주지 못한 시절이어서일까. 그의 어머니는 김정호가 6살 되던 해에 국악에 관심을 보이자 집안의 국악기를 내다 버렸을 정도다. 하비난 천성적인 타고남을 어쩌랴. 김정호는 학교도 때려치우고 서울 우이동에 틀어박혀 기타를 붙들고 살았다.



●'하얀나비'엔 F(파)음이 없다

'하얀 나비'란 노래는 A(가)장조 노래다. 유심히 보면 멜로디 속에 파(F)음이 하나도 없다. 우연이었을까. 국악 음계는 대부분 5음계로 돼 있다. 5음계 중 반음이 없이 단3도와 장2도로 구성된 게 대부분인데 반음이 있는 5음 음계도 남도지방(전라도 및 충남 일부, 넓게는 한강 남쪽 경기도 포함) 음악에서 쓰인다. 어린이들이 즐겨부르는 전래동요나 노동요 등에는 5음 음계 중 한ㆍ음이 생략돼 3음 음계나 4음 음계로 된 노래도 있다. 국악의 음계는 궁, 상, 각, 치, 우가 아니다.

장조 5음 음계 (평조 도레미솔라), 단조 5음 음계 (계면조 라도레미솔) 외에 메나리 선법, 남도 계면조 등 지역 노래에 따라 다양하다. 창부타령 음계 (솔라도레미), 난봉가 음계 (라도레미솔), 육자배기 음계 (미솔라도레) 등이 있다.

김정호는 어려서부터 외가 쪽 영향 탓인지 국악의 음계에서 F(파)음이 귀에서 멀어져 있던 게 아닌가 싶다. 즉 '파'음이 없는 국악 음계 스케일에 익숙해져 있었던 것으로 필자는 유추해 본다.



● 1975년 필자와 김정호의 첫 만남

필자가 1975년 여름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 오후. 우연히 김정호를 만난 적이 있다. 남동(도청에서 전대병원 사이)에서 내 아내가 양장점을 운영하고 있을 때다. 남동 뒷골목엔 당시 양장점 공장들이 많았다. 어느 날 그곳에 들렀을 때, 공장 담장 너머에서 기타 소리가 들렸다. 담 너머로 보니 마당 건너 마루에 앉아 웬 사내가 기타를 치고 있었다. 기타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아 반 호기심에 발길을 옮기고 "기타 잘 치시네요"라고 운을 뗀 뒤 마루에 같이 앉았다. 곧바로 MBC 방송 별밤 얘기와 서울 쉘부르 얘기가 오가고 10여분쯤 얘기가 섞여졌다.

청바지에 검정색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고 유난히 까만 눈동자에 장발, 야윈 몸매로 그다지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다. 뒤에 공장 직원들에게 들으니 그 집이 김정호의 친누나가 살던 집이었다. 그해 12월 MBC 방송 '별이 빛나는 밤에' 초대 가수로 초빙돼 왔을 때 소수옥 선배와 이장순과 함께 생방을 한 기억이 새롭다. 방송 후 커피를 마시며 담소한 후 헤어졌다. 악수를 청하던 그의 작고 여린 손의 느낌은 차가웠고 웬지 우수에 찬 검은 눈동자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 "선배님의 기타소리 좋은데요" 사실 국산 다이아몬드 기타로 73년에 구입한 5000원짜리였다.



● 광주 북동 탯 자리 김정호 거리를

대구에서 '김광석의 거리'가 만들어져 매년 전국 각지에서 150만명의 관광객이 몰려든다. 근처 시들어가는 재래시장까지 활기를 찾고 명실상부 대구의 관광명소로 떠오른 지 오래다.

빛고을 광주에서도 '김정호 거리 만들기' 일환으로 광주시와 북구, 중앙동, 대한 가수협회 광주지부가 발벗고 나섰다. 2015년첫 발을 내딛었다. 김정호 추모 음악제가 그것으로 올해 제3회 축제를 마쳤다. 2017년 10월 14일~10월 15일 수창초교(김정호 모교)에서 기념식, 하얀 나비 사진관, 추억의 음악 감상실, 열린 음악회(특집 MBC가요 베스트) 등 프로그램으로 김정호를 그렸다.

'김정호 거리 만들기'는 탯 자리인 북동 천주교 바로 뒷골목이다. 대한가수협회 광주지부가 깃발을 들었고 필자가 추진위원으로 추대돼 진행되고 있다. 김정호의 외가인 담양에서도 그의 노래비를 세웠다(10월 8일). 2원화된 작금의 현실이 안타깝다. 좀 더 크게 내다보고 미래를 보자. 좀 더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고 소통하자. 뜻을 모으고 가슴과 머리를 맞대보자. 대구 '김광석의 거리'보다 나은 '김정호 거리'를 만들어 보자.

김정호 2집(앨범) '하얀 나비' 외 '인생' '빗속을 둘이서' '밤바다' '정 때문에' '별리' '사랑의 이야기' ' 등 수록. 그 외 앨범엔 '작은 새' '외기러기' '푸른 하늘 아래로' 1983년 유작앨범 '님'은 정말 가슴 아픈 노래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국소남의 통기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