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뒤 인간 신념 총도 어쩔 수 없는…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영화 '브이 포 벤데타' - 차이코프스키 '1812년 서곡'
저항 상징 '가이 포크스 가면'
원작 만화 시리즈 영화로
"사람 아닌 신념을 기억하라"
저항 상징 '가이 포크스 가면'
원작 만화 시리즈 영화로
"사람 아닌 신념을 기억하라"
2018년 05월 10일(목) 21:00 |
![]() 촛불이 활활 타오른 2016년 12월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6차 범국민행동 촛불집회를 마친 집회 참가자가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나오는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
우리 가면극의 기원은 통일신라의 석학 최치원이 지은 한시 '향악잡영(鄕樂雜詠)'에서 문헌으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수록된 그의 한시 5수에는 신라시대 가면무(假面舞)가 최초로 기록돼 있다. 이후 민간으로 이어진 가면극의 전통은 조선영, 정조 시대에 정점에 이른다. 탈놀음(가면무)에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대사가 덧붙어진 한국가면극의 기조는 비판과 저항정신이다. 당시의 양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 남녀차별에 대한 자각,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에 대한 고발에 이르기까지 특권계층의 위선과 허구에 대한 각성과 도전은 우리 민중극의 오랜 기반이자 전통이 됐다.
지난 2016년 겨울, 거대한 촛불로 타올랐던 광화문광장의 한편에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은 '노비가 아닌, 개 돼지가 아닌, 사람이고 싶습니다' '우리의 신원을 색출하여 보복하려는 사측으로부터 구해주시고 보호해주세요'와 같은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쓰고 있던 가면이 낯설지 않았다. 북미와 서구유럽의 시위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었고, 특히 지난 2011년 '월가시위(Occupy Wall Street)'에서 많은 사람들이 쓰고 있던 가면이었다.
매년 11월5일이 되면 영국 전역에서는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1605년 11월5일, 가이 포크스는 의회 의사당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웠지만 실패한 후 교수형에 처해진다. 이듬해 1월, 영국 의회는 왕의 무사함을 축하하기 위해서 11월5일을 감사절로 정했지만, 영국인들은 이 날을 '가이 포크스 데이'라 부르며 하나의 축제일로 여긴다. 어떤 이는 왕이 죽음을 모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어떤 이는 가이 포크스의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그의 가면을 쓴다.
1982년부터 출간된 만화책 시리즈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에서는 자신을 브이(V)라고 칭하는 무정부주의자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정부에 맞서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 만화는 2006년 제임스 맥티그 감독에 의해서 영화화 됐고, 이후 가이 포크스는 '저항의 아이콘'으로 각인된다. 제3차 세계대전 후 가상의 영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에서 주인공 브이(V)는 전체주의 정부에 대항해 혁명을 꿈꾸는 인물이다. 그 역시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있다. 영화는 이런 말과 함께 시작된다.
"사람이 아닌 신념을 기억하라. 사람은 실패하고 체포되고 처형되지만 400년이 지난 지금도 신념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비(나탈리 포트만 분)는 전체주의 영국의 국영 방송사인 BTN의 말단직원이다. 온갖 허드렛일과 간부들의 '갑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통금시간을 넘긴 어느 날 밤, 위험에 빠진 이비 앞에 나타난 한 남자가 초인적인 전투력으로 그녀를 구해낸다.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망토를 두른 남자는 스스로를 '브이(V)'라 소개하며 이비를 어느 건물의 옥상으로 데려간다. 11월5일이 되었음을 알리는 시계의 종소리가 울리는 순간, 시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거리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장엄한 오케스트라 연주가 들린다. 음악은 절정을 향해 치닫고 '법과 정의의 여신상'이 세워진 형사재판소는 굉음과 함께 폭파된다. 런던의 밤하늘을 메우는 불꽃은 '가이 포크스 데이'를 축하하는 폭죽을 연상케 한다.
함께 연주된 음악은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의 '1812년 서곡'이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선포한 민중은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스스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제국주의 전쟁을 벌인다. 한 때 전 유럽을 제압하며 위세를 떨쳤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하기 시작했다. 훗날 차이코프스키는 당시 러시아의 승전을 기념하며 이 곡을 만든다. 곡에 삽입된 대포와 종소리는 민중의 염원을 짓밟은 나폴레옹 군대에 대한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
국민을 두려워하라
영화 속 영국 정부는 '1812년 서곡'을 금지곡으로 지정한다. 시민의 모든 통화내용을 감청하는 그들은 여론의 동향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폭파가 낙후된 건물의 의도적 철거였다고 발표한다. 감시카메라를 통해 이비의 신원을 파악한 경찰은 그녀의 검거에 수사력을 집중하고 '정권의 나팔수'에 불과한 언론은 사실의 왜곡을 통해 조작된 공포를 확산시킨다.
방송국을 점거한 'V'는 TV를 통해 자신이 형사재판소를 폭파했음을 밝힌다. 부정부패와 잔혹한 탄압이 만연하고 온갖 감시 속에 침묵을 강요당하는 현실의 책임이 독재정부 뿐만 아니라 방관하는 시민에게 있음을 말하는 그는 정의, 자유, 평등의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민중이 봉기할 것을 호소한다. 이비는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위기에 처한 'V'를 돕고 그들은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가지만 언론은 경찰의 오인사격에 희생된 시민을 테러범으로 왜곡 보도하며 끊임없이 사실을 은폐한다.
은신처에 몸을 숨긴 'V'는 결국은 두려움에 휩싸인 이비에게 말한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오.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지." 1년 후 11월 5일 '가이 포크스 데이'에 의사당 건물을 폭파하겠다고 공표한 그는, 이유를 묻는 이비에게 이렇게 덧붙인다."건물에 권위를 부여한 국민이 힘을 합치면, 그것을 파괴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희망이다."
영국의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1516년 발표된 그의 책 '최선의 국가 형태와 새로운 섬 유토피아에 관하여'에서 그가 생각하는 유토피아(이상향)를 평등한 분배가 이뤄지고 다수의 이익이 보장되는 정의사회라 묘사하고 있다. 의식주와 직결된 생산과 소유, 분배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적 향유의 평등, 교육과 학문 등의 정신적 영역까지 평등한 사회를 유토피아라고 생각했다. 반면, 프랜시스 베이컨은 17세기에 발표된 책 '신(新) 아틀란티스'에서 무제한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하며 막대한 부와 사치가 넘치는, 그 누구도 가난하지 않으며 인간의 욕구 또한 최대한으로 충족될 수 있는 사회를 이상향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영화 '브이 포 벤데타'가 묘사하고 있는 국가는 극단적 디스토피아, 반(反)이상향이다. 조지 오웰이 그의 대표작 '1984'에서 그려낸 가상의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가 떠오른다. 영화 속 'V'는 400여 년 전 가이 포크스가 계획했던 것처럼 권위가 부여된 건물의 폭파를 통해 민중의 각성을 도모한다.
21세기 들어 한국에서 일어난 '촛불혁명'은 인류문명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극단적인 유혈 충돌이나 물리적 폭력없이 평화적 방식으로 정권교체를 이뤄냈다는 점에서 '한국형 명예혁명'으로 평가될 것이다. 그 뒤에는 근대 프랑스 혁명사에 비견되는 수많은 민중의 희생이 있었다. 굴곡의 현대사 속에서 우리는 이미 영화 속 디스토피아를 경험했다. 4ㆍ19혁명과 5ㆍ18광주민주화운동과 6ㆍ10항쟁이 있었고 숱한 실패와 좌절을 딛고 기어이 혁명을 이뤄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정부는 국민을 두려워한다.
가면 뒤에는 한 인간의 신념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서틀러 의사회 의장은 측근을 비롯한 모든 국민을 직접 감시하고 통제한다. 그는 이들을 조정하기 위해 항상 "영국은 승리할 것이다"는 구호를 외친다. '하나된 국민, 하나된 조국'의 원칙 앞에서 소수자와 신념이 다른 자들은 모두 탄압과 제거의 대상이 된다. 공공의 질서와 사회 안정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개인의 자유과 권리를 짓밟는 전형적인 파시즘의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수용소의 생체실험을 통해 핵무기의 위력을 능가하는 치명적 바이러스를 손에 넣으려 했다. 실험대상이던 'V'는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생물학적 변이로 초인적인 신체기능을 얻게 되지만 갑작스런 폭발사고로 온 몸에 화상을 입는다. 그리고 그는 국가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널 쓰러뜨린 건 내 칼이 아닌 네 과거다." 그가 자주 인용하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대사다. 영화의 제목 속 '벤데타'는 '피의 복수'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치명적인 생체바이러스를 손에 넣은 정부는 몇몇 지역의 정수장을 통해 바이러스를 살포하고 10만 여명의 국민이 학살된다. 치료제를 독점하고 있던 그들은 막대한 부를 손에 넣게 되고 이를 기반으로 국민을 완전히 통제한다. 바이러스 감염으로 이비의 동생이 세상을 떠난 후 부모는 반정부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들 역시 국가가 행한 잔혹한 폭력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비는 두려움을 가슴에 안은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위기의 순간 끝내 굴복하지 않았고 신념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된 순간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11월5일, 공언대로 'V'는 폭탄을 채운 열차를 의사당을 향해 출발시킨다. 'V'는 이비에게 그 무엇보다도 큰 선물인 사랑을 받았다고 말하며 숨을 거둔다. 트라팔가 광장에는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그들 모두는 누군가를 사랑하기에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을 지키고 있었다
다음 주 금요일인 5월18일은 광주민주화운동 38주년 기념일이다. 강산이 네 번 가까이 변했음에도 가슴속 깊이 패인 상처와 슬픔은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 지난 9일에는 새롭게 발굴된 당시의 영상자료가 공개되었다. 승전 부대를 치하하는 듯 의기양양한 당시의 국방부장관 주영복의 모습과, 트럭위에 화물처럼 켜켜이 쌓인 희생자들의 관 앞에서 오열하는 어느 어머니의 모습에 또다시 피눈물이 흐른다. 권력욕에 눈이 먼 정치군인들은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속 독재세력처럼 어느 한 지역의 국민을 학살함으로써 국가 전체를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지역감정의 프레임에 가둔 채 서로를 분열시키는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망국적 정치기술을 충실히 따름으로써 한 줌의 권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신념을 가진 인간보다 강한 존재는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승리했다. 학살의 수괴는 여전히 사실을 왜곡한 채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만, 결국 다시 법정에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권력자도 정치인도 정부도 국민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여전히 예외인 집단이 있다. 일부 재벌과 그들과 결탁한 극우보수언론은 여전히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재용 구하기에 나선 일부 언론은 삼성 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에 대한 금감원의 심의에 자본주의 원칙을 거론하며 색깔론을 덮어씌운다. 폭언과 폭행, 밀수와 탈세 등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도 대한항공 조양호씨 일가는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그들의 퇴진 및 법적처벌을 요구한 대한항공의 직원과 시민들은 이번 주말 2차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속 'V'는 말했다. "이 마스크 뒤에는 총으로도 죽일 수 없는 한 인간의 신념이 있다."
그 신념이 지금도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V for Vendetta), 2005년
감독 제임스 맥티그
주연 나탈리 포트만ㆍ휴고 위빙
영화 '브이 포 벤데타'는 제임스 맥테이그가 감독하고 조엘 실버와 워쇼스키 형제가 제작ㆍ각본해 2005년 제작, 2006년 개봉한 SF 영화다. 이 영화는 앨런 무어와 데이비드 로이드가 만든 그래픽 노블 '브이 포 벤데타'를 각색한 작품이다. 가까운 미래에 디스토피아 사회가 된 영국의 런던을 배경으로, 영화는 정치적 전복과 동시에 개인적 복수를 꾀하는 정체불명의 반체제 운동가 브이를 따라 진행된다. 주연으로는 브이 역은 휴고 위빙, 이비 해몬드 역은 내털리 포트먼, 서틀러 대법관 역은 존 허트, 핀치 경감 역은 스티븐 레아가 연기했다.
워너 브라더스는 원래 이 영화를 제400회 가이 포크스의 밤 전날인 2005년 11월 4일 개봉하려 했으나 연기돼 2006년 3월 17일 개봉했다. 전 세계적 흥행 수익은 1억 3200만 달러로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평론들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원작자 무어는 자신의 만화를 영화화한 다른 두 영화 '프럼 헬'과 '젠틀맨 리그'에 실망한 뒤, 영화를 보는 것을 거부하고 영화에서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실제로 영화 크레딧에는 데이비드 로이드의 이름만 올라가 있다. 영화 제작자들은 원작에 나오는 무정부주의적 테마들과 마약 관련 내용들을 삭제했고, 자기들 생각에 2006년의 관객들에게 더 와닿을 것 같은 것으로 정치적 메시지도 변경했다.
문화평론가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