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세상에서 가장 작은 숲에 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
392)늙어갈수록 아름다운 나무
놀랍게도 나는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 전시에서 불일암 오르는 길의 고목 나무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마치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그윽하게 서 계신, 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들 말이다.”
2024년 04월 25일(목) 13:49
신안 노거수 전시회,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이윤선 촬영 (1)
신안 노거수 전시회,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이윤선 촬영 (2)
신안 노거수 전시회,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이윤선 촬영 (3)
신안 노거수 전시회,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이윤선 촬영 (4)
신안 노거수 전시회,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이윤선 촬영 (5)
불일암 오르는 길/ 우두커니 서 있다/ 비자(榧子) 고목 한그루/ 겉껍질은 세월에 벗겨주고/ 속껍질은 가슴애피로 벗겨주었나/ 작은 바람에도 위태롭게/ 지팡이 짚으신/ 부르튼 피부 비집고 몇 개/ 위태롭게 난 잎들/ 백토 진토 비집고 나온/ 나의 배내옷/ 바람인가 오음(五音)의 노래인가/ 숭숭 뚫린 껍질 새/ 채 다 못 부르신/ 아, 그대로만 서 있어도 좋으실/ 어머니



『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여』(다할미디어 시선 08)에 실린 졸작 ‘불일암 오르는 길’이다. 이 시를 인용한 서평이 올라왔다는 것을 늦게야 알았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빼어난 감성을 지닌 이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시인이 주목한 나무는 하늘 향해 당당히 오르는 마당의 후박나무가 아니다. 불일암 오르는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비자나무 고목 한 그루다. 겉껍질을 세월에 벗겨주고 속 껍질조차 벗겨주어 헐벗은 나무, 작은 바람에도 넘어질 듯 위태롭게 지팡이 짚고 서 있다. 놀라워라, 부르튼 피부 비집고 잎 몇 개가 마치 나의 배내옷처럼 위태롭게 솟아나 있다. 내 존재를 있게 한 당신, 어머니의 몸 일부를 찢고 나온 나. 당신은 구멍 숭숭 뚫린 채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고목일지라도 그렇게, 그대로만 서 있어도 좋겠다, 나의 고목, 어머니!” 평을 읽다 보니 불현듯 내게 전화를 주셨던 원로 교수가 떠올랐다. 재작년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 시집을 현관에서 받아 선 채로 읽다가 너무 울컥하여 전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이 시집의 표사를 써주셨던 송기원 소설가가 “시에 나오는 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하늘에서 쫓겨 온 적선(謫仙)들이며 그이들이 만든 신화였다”라고 했던 감성이랄까. 놀랍게도 나는 최근 전시하고 있는 신안 자은도 작은 미술관 전시에서 불일암 오르는 길의 고목 나무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마치 어머니처럼 아버지처럼 더러는 육중하게 더러는 그윽하게 서 계신, 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들 말이다. 어깨 겯고 부둥켜안고 하늘 향해 치솟아 오른 풍경들을 보며 숨이 멈추는 듯했다. 울렁이는 횡격막의 진동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숲에 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



어깨 겯고 하늘 향해 팔 뻗어 올린 나무들 사이로 한 무리의 나비 떼들이 날아오른다. 호랑나비, 노랑나비, 애호랑나비, 배추흰나비, 산제비나비, 이름을 알 필요조차 없는 나비 떼들이 날아오르는 세상은 필경 선경(仙境)이리라. 지금 전시하고 있는 신안군 장산도 도창리 노거수 이야기다. 강제윤 시인은 이 그림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옛날 도창리에는 서남해 섬에서 거두어들인 곡식을 보관하던 세곡 창고가 있었다. 그래서 마을 이름에 곳간 창(倉)자가 들어있다. 도창리에는 노거수들이 마을이 우실숲을 이루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100호)이다. 팽나무 63그루, 곰솔 8그루, 주엽나무 12그루, 가죽나무 4그루, 예덕나무 2그루 등 101그루의 다양한 상록수들이 자리 잡고 있어 생태적 가치가 크다. 노거수림은 해적들에게 창고를 숨기기 위해 조성된 위장숲, 은폐림이기도 했다.” 설명도 그림도 이채롭다. 나무들 사이를 유영하는 갯바람이 흥건하다. 내 시선이 나무들 사이를 비집고 선경의 저 너머를 향한다. 나비들이 살아 날아오른다. 어쩌면 불일암의 고목을 뚫고 나온 내 배내옷처럼 오래된 나무들의 두꺼운 껍질을 뚫고 이 세상에 오신 선녀들일지도 모르겠다. 부르트고 갈라진 껍질들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구릿빛 피부를 닮았다. 소금기 많은 갱번의 바람과 잔돌 많은 뙈갱이 논밭의 흙빛을 닮았다. 이 피부를 뚫고 날아오르니 이들 나비야말로 이 섬에 숨 쉬고 살던 이들의 넋일지도 모르겠다. 장자가 호접몽(胡蝶夢)을 쓸 수 있었던 것도 틀림없이 이런 풍경을 사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홀연히 나비가 되었다. 내가 꿈을 꾸어 나비의 몸을 입은 것인지, 나비가 꿈을 꾸어 나라는 몸을 입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 또한 지긋이 생각하였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꿈을 꾸어 도창리의 노거수로 서계신 것인지, 나무들이 꿈을 꾸어 아버지와 어머니의 넋을 입은 나비로 날아오르는 것인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 노거수(老巨樹)들, 어쩌면 섬이 생겨나기도 전에, 사람들이 이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나무의 씨들이 자라고 가지를 내고 하늘 향해 서로 기대어 서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2017년 8월 4일 본지 칼럼 51회째를 통해 ‘우실’에 대해 설명해 두었다. 나는 늘 우실에 대한 카피를 뽑을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숲’이라 한다. 울타리와 우실의 기능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본래 말은 ‘울실’이다. 울타리의 ‘울’은 가축들을 가두는 ‘우리’에서부터 ‘울장’, ‘울타리’ 등과 통한다. 둘레를 에워싸 지킨다는 위(圍)의 뜻이 있다. 에우다, 사냥하다는 뜻이 여기서 나왔다. 더불어 숨기고 아끼며 의지한다는 ‘은(隱)’의 뜻도 있다. 울타리에 가두니 숨기거나 비밀로 한다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정주공간만 보호하거나 비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죽은 자들의 공간도 보호하거나 비보해준다. 가고 싶은 섬으로 지정되어 널리 알려진 안좌도 박지섬과 반월섬에서는 묘지를 보호하는 우실에 사람의 성씨를 붙여 부르는 우실들도 있다. 우실은 국가가 관여하는 관방림이나 물고기들의 서식처를 제공하는 어부림 등으로 확대 해석된다. 단지 태풍이나 겨울바람을 막고 해풍의 피해를 막는 정도의 기능에 그치지 않는다. 숲이 수많은 미생물과 보호생물들을 키우고 동물과 물고기들을 키우며 종국에는 사람의 삶에 이로운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쯤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신안군 자은도 둔장마을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신안의 노거수展>을 새삼 주목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남도인문학팁

자은도 둔장마을미술관의 <신안의 노거수展>

신안군 문화도시지원센터에서 주최하는 전시회다. 신은미 작가가 그리고 강제윤 시인이 글을 썼다. 각 섬의 우실숲과 나무들을 독특한 문법과 필체로 그렸으니 나무와 사람들의 터무늬를 그린 셈이다. 늙어갈수록 아름다워지는 나무라는 카피가 아름답다. 전국에 1만 4천여 그루의 보호수가 있는 데 이 중 신안군에만 161그루의 보호수가 있다. 이 전시는 ‘신안 섬문화다양성 아카이빙-노거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2022년부터 2년 동안 섬의 당산나무와 우실들을 발로 뛰어다니며 보고 듣고 취재하여 쓰고 그린 작품들이다. 자은도 구영리 팽나무, 자은도 분계리 여인송, 추포도 수곡리 느티나무, 매화도 대동리 은행나무, 흑산도 심리 후박나무, 암태도 익금리 우실 팽나무숲, 지도읍 태천리 팽나무, 증도 우전마을 팽나무, 자은도 면전리 팽나무, 지도읍 봉리 소금출마을 동백나무, 임자도 도찬리 소나무, 당사도 팽나무, 암태도 노만사 송악나무, 장산도 도찰리 노거수림, 사옥도 탄동리 주엽나무, 안좌도 대리 우실, 임자도 대기리 삼악마을 느티나무, 안좌도 여흘리 우실 음나무, 자은도 대을리 소나무, 고이도 칠동마을 팽나무 등 23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둔장마을미술관이 공공유휴공간 프로젝트의 하나인 ‘작은미술관’이라는 점이다. 생활권 내 미술공간이 없는 문화 소외 지역의 공동 유휴공간을 활용하여 조성한 국가 지원 소규모 미술관을 말한다. 신안문화원이 둔장마을 회관을 리모델링하고 작은미술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쓰고 그린 작가들의 세계관도 놀랍지만 이들의 손과 눈을 통해 드러난 나무의 마음들이 반갑고 새롭다. 섬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와 숲들, 아니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와 숲의 마음을 이토록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다니. 전시는 4월 2일부터 시작하여 5월 12일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