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단상
2025년 06월 09일(월) 16:55
최도철 미디어국장
 초여름에 들어서니 새맑은 하늘 아래 여기저기 접시꽃이 많이 피었다. 출근길에 지나치는 봉산 작은 절집 담벼락에도, 수북학구당 길섶에도 자홍색, 흰색, 붉은색으로 치장한 접시꽃들이 소담하게 피어 고운 자태를 드러낸다.

 접시꽃은 초가의 사립문 옆에나 장독대, 국민학교 교정, 완행열차가 쉬어가던 간이역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여름꽃이다.

 키 크고 잘생긴 외형과 다르게 접시꽃은 여느 꽃들이 가진 황홀하고 진한 향기는 없다. 하지만 누가 보든 말든 철이 되면 늘 그 자리에서 피고 지며 집을 지키고 손님을 맞이한다. 그래서 더욱 소박하고 꾸밈없는 꽃으로 사랑을 받아 왔다.

 접시꽃은 옛 문헌에도 실려 있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당나라에 머물 때 쓴 ‘촉규화(蜀葵花)’라는 시다.

 “거칠은 밭 언덕 쓸쓸한 곳에 탐스런 꽃송이 가지 눌렸네 /첫 여름 비 갤 무렵 가벼운 향기 보리누름 바람결에 비낀 그림자/ 수레 탄 이 어느 누가 와서 보리오 벌 나비만 부질없이 서로 엿보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한 최치원은 벼슬길에 올랐으나 변방의 소국 출신 이방인 취급을 받았다. ‘수레에 탄 고관들은 접시꽃(최치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부질없는 벌, 나비만 관심을 갖는다’며 이국땅에서의 소외와 절망감을 탄식한 것이다. 촉규화는 접시꽃의 한자표기이다.

 벌교 꼬막의 게미진 맛을 세상에 각인시킨 소설이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라면, 접시꽃을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린 사람은 단연 시인 도종환이다.  그는 결혼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등진 아내에게 바치는 절절한 사부가를 모아 시집 ‘접시꽃 당신’을 펴냈다. 1986년 출간된 이 시집은 당시 1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가며 수많은 여심을 흔들어 놓았다.

 시 ‘접시꽃 당신’은 구절구절마다 애처롭다.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 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옥수수 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겠습니다.”

 먼 산에 뻐꾸기 울고 밀보리 누릇할 때 피어나는 접시꽃을 생각하다가 그 꽃말이 궁금해 찾아보니 색에 따라 ‘사랑, 평안, 풍요’ 등 다양하다. ‘순수함과 신선함’, 그리고 ‘새로운 시작’도 있다.

 지난 6월 3일 ‘장미대선’이 끝나고 정권이 바뀌었다.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다. 혼군(昏君)과 용군(庸君)이 설치던 무도한 시절이 지나갔으니, ‘북소리가 바뀌면 춤도 달라져야 한다’는 나이지리아 하우사 부족의 속담처럼 이제 국민들은 바뀐 북소리에 따라 새롭고 신명난 춤을 기대한다.
최도철 미디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