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으론 동포인데 복지는 제외’…제도 밖 고려인들
코로나·소비쿠폰 등 지원 배제
비자 취득 불구 주민등록 없어
건강보험·현금성 지원 못 받아
국내 거주 동포 위한 법령 미비
“‘국적’보다 ‘실질 주민성’ 기준”
2025년 07월 14일(월) 18:22
광주 광산구 홍범도공원(다모아어린이공원)에서 지난 2023년 열린 ‘제11회 고려인의 날’ 행사에 주민들이 전통 춤을 추며 즐기고 있다. 정성현 기자
지난 2019년 재외동포법 시행령 개정으로 고려인 4세대까지 ‘재외동포’로 인정받게 됐다. 제도적 진전이었지만 고려인들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체류 자격을 갖췄어도 주민등록이 없다는 이유로 주요 복지 정책에서 반복적으로 배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광주 광산구 월곡동 고려인마을에는 약 4800명의 고려인이 공동체를 이뤄 지내고 있다. 제조·농장·건설 현장 등에서 일하며 세금을 납부하고 자녀를 학교에 보내는 등 지역사회 일원으로 살고 있다. 그러나 2021년 재난지원금에 이어 올해 민생회복 소비쿠폰 등 주요 복지 정책에서는 또다시 제외됐다. 지급 기준이 ‘주민등록상 내국인’으로 설정됐던 탓이다.

정부는 소비쿠폰 지급 대상자에 일부 외국인(결혼이민자·영주권자·난민 인정자 등)은 예외를 뒀지만, F-4(재외동포) 비자를 소지한 고려인 대부분은 포함되지 않았다. 실제 광주 고려인마을 체류자 중 약 3700명이 재외동포 비자를 가지고 있어 지원에서 제외됐다.

현행 재외동포법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거나 가졌던 자 또는 그 직계비속 중 대통령령이 정한 사람을 ‘재외동포’로 규정한다. 시행령은 직계존속이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던 자의 3세대까지를 동포로 인정하고, 2019년 일부 4세대까지로 확대했다. 그러나 이후 세대는 여전히 제도권 밖에 머물러 있다.

여기에 가족관계증명서가 없거나 국적을 상실한 상태에서 입국한 고려인의 경우, 동포 자격을 인정받기도 어렵다. 어렵게 동포 비자를 취득해도, 주민등록이 없으면 건강보험·현금성 복지, 투표권 등 정치적 권리 등에서는 여전히 배제된다.

광주시는 지난 2013년 전국 최초로 ‘고려인 주민 지원 조례’를 제정하고 교육·의료·주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질적인 지원책을 마련해 왔다. 하지만 중앙정부 복지제도와 연계되지 않아 지역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이상덕 재외동포청장이 지난해 12월 열린 ‘국내동포 정책 학술포럼’에서 국내 거주 동포를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연합뉴스TV
이상덕 재외동포청장은 지난해 12월 열린 ‘국내 동포 정책 학술포럼’에서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도 중요한 정책 대상”이라며 “그동안 재외동포 정책에서 소외됐던 분들을 위한 실효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정부가 국내 체류 동포를 공식적으로 정책 대상에 포함하겠다고 언급한 첫 사례였다. 그러나 이후 관련 법령 개정이나 제도 실행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국적’보다 ‘실질 주민성’을 기준으로 정책을 설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은채 국제이주문화연구소 부대표는 “현행 재외동포법은 해외 체류 동포 중심으로 설계돼 있어 국내 거주 동포를 위한 예외 조항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국적이나 혈통보다 지역사회 내 역할과 기여도를 기준으로 정책 수혜 자격을 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락 광주전남정치개혁연대 대표도 “고려인은 역사적으로 강제 이주된 한민족으로, 국내에서 일하고 세금도 내는 실질적 시민”이라며 “정책적 배제는 헌법상 평등의 원칙에도 어긋난다. 이재명 정부가 이 사안을 정확히 인지한다면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같은 구조적 모순은 헌법재판소의 판단과도 충돌한다. 지난해 3월 헌재는 난민 인정자를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한 정부 방침에 대해 “합리적 이유 없는 차별”이라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이후 난민은 소비쿠폰 지급 대상에 포함됐지만, 고려인은 여전히 정책의 테두리 밖에 머물러 있다.

정치권의 책임도 작지 않다. 광주시는 조례 제정과 실질적 지원책 마련에 앞장서 왔지만 국회와 중앙정부는 여전히 ‘동포의 자격’을 협소하게 규정하고 있다. 재외동포법 개정안은 2022년 이후 수차례 발의됐지만, 세대 제한과 국적 중심주의 논란 속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반면 해외 사례는 대조적이다. 독일은 동포를 ‘역사적 귀환자’로 보고 시민권과 복지를 보장하는 ‘귀환법’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스라엘도 해외 유대인을 국민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고 귀환권과 정착 지원을 제도화했다. 이들은 동포를 단순한 체류자가 아닌 실질적 국민으로 보고 있다.

대한고려인협회는 지난 11일 대통령실에 공식 청원을 제출했다. 협회는 “F-4 비자 소지 고려인을 반복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공동체 통합 정신을 위반한 정책적 차별”이라며 “이번 소비쿠폰 문제는 단순한 복지 대상 논란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동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라고 밝혔다.

정영순 대한고려인협회장은 “고려인은 수년간 국내에서 일하며 세금을 납부하고 있음에도, 주민등록이 없다는 이유로 반복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며 “국내 거주 고려인의 80% 이상이 동포 비자를 소지한 만큼, 최소한 이들은 정책 대상에 포함돼야 한다. 법이 동포로 인정했다면 행정도 동포로 대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앞서 정부는 외국인 예외 허용 기준을 “예산과 행정 효율성을 고려했다”고 밝혔지만, 대한고려인협회가 제출한 청원에 대해 대통령실이 자료 보완을 요청하고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관련 기준 재논의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