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향기·김강>‘저스티스 리그’는 없다
김강 호남대 교수
2025년 07월 22일(화) 10:06 |
![]() 김강 호남대 교수 |
두 사람 모두 고위 공직자 후보로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도덕성과 공공성에 심각한 문제가 드러났음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갑질에 대해서는 유달리 장관직 수행이 어렵지 ‘않을 만큼’의 흠결이라는 궤변으로 임명을 강행하는 태세다. 초록은 동색이 분명하다.
보좌진에 대한 갑질, 노동 착취, 자녀 특혜 유학, 연구윤리 위반 등 수많은 의혹이 명확히 해명되지 않았으나, 검증은 형식에 그쳤다. 국민의 상식과 동떨어진 결정이 반복될수록, 한국 사회는 또 하나의 ‘신뢰의 균열’을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왜 끊임없는 인사 실패와 정치적 무기력함을 참아내야 하는가. 이는 단순한 ‘개인의 결함’이 아니라, 권력 구조 깊숙이 자리 잡은 엘리트 정치의 본질적 문제다. 고위 공직자의 윤리적 결함이 용인되고, 불공정이 ‘관례’가 된 사회, 거대화된 정치적 자기합리화의 카르텔. 이러한 현상은 이념과 진영을 떠나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구조적 병폐에 가깝다. 대한민국 암흑의 핵심이다.
문득 영화 ‘저스티스 리그’가 떠오른다. 의외처럼 보이나, 이 영화는 한국 정치의 모순과 폐단을 되돌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비유를 제공한다.
배트맨, 원더우먼, 아쿠아맨, 플래시, 사이보그 등 저스티스 리그의 영웅들은 각기 상처와 결핍을 안고 있다. 처음엔 서로 불신하며 각자의 방식에 집착한다. 그러나 강력한 외부 위협에 맞서면서 그들은 ‘나’가 아닌 ‘우리’로 존재할 때 비로소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닫는다.
공정과 정의는 혼자 실현할 수 없고, 공동의 책임과 연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메시지가 영화의 교훈이다.
반면 한국 정치 엘리트들은 상호 신뢰와 책임이 아닌, 기득권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보호에 몰두한다. 공직자 검증 기준은 보편적 윤리가 아니라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달라지고, 비리가 드러나도 ‘진영 동지’라면 면죄부가 주어진다. 이것은 연대가 아니라 편의적 협잡이고, 협력이라기보다 카르텔에 가깝다. 인사권자도 아닌 자가 논란의 후보를 ‘곧 장관님’으로 아첨했다니, 한겨레가 지적한 천박한 ‘동업자 의식’이다.
이런 엘리트 카르텔은 학벌, 지연, 인맥, 정당 등 다양한 연결고리로 점점 더 공고해진다. 시민사회의 감시는 무력화되고, 자기반성은 멀어진다. 피해를 보는 것은 국민의 신뢰요, 잃는 것은 정치의 도덕성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엘리트는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청년들 위에 군림하며,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없는 특권 계급에 머무른다. 높은 자리일수록 무거운 도덕적 책임이 따른다는 상식은 이미 무너졌다. ‘엘리트’란 가치가 위선으로 전락한 셈이다.
두 장관 후보 논란은 단순한 인사 실패가 아니다. 시중에 ‘어차피 다 똑같다’는 냉소와 피로가 가득한 이유는, 구조적 불공정이 아직도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는 태도와 ‘누구나 그랬다’는 변명은 국민감정을 무디게 하고 있다. 자신이 불의를 저질렀음에도 ‘왜 나만 문제 삼느냐’고 따지는 현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실종이고, 저스티스 리그와는 정반대의 사회상이다. 그리고 현실은 영화처럼 영웅의 출현으로 악이 물러가는 동화가 아니다.
공직 후보자에게 바라는 기준은 결코 높지 않다. 탐욕과 위선, 아부가 아니라 최소한의 성찰과 책임감, 그리고 신뢰를 요구하는 것뿐이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이 지켜지는 사회다.
한 사회의 정의는 고위 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묻는다. “이 인물이 정말 국민을 위한 사람인가? 공정과 정의를 실현할 사람인가? 또 하나의 ‘그들만의 리그’의 일원이 아닌가?”
강선우와 이진숙 임명 논란은 하나의 인사 실패가 아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일시적인 사과나 정치적 방어가 아니라, 구조적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의. 그것은 배트맨의 기술도, 슈퍼맨의 힘도 아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각성과 용기에서 시작된다. 영화가 끝나면 조명은 꺼지지만, 우리의 현실은 계속된다. 침묵은 더 이상 금이 아니다. 저스티스 리그는 없더라도, 정의의 기초는 우리가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