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 교수의 필름에세이>30년 넘어 다시 묻다, “여성은 자유로운가”
리들리 스콧 감독 ‘델마와 루이스’
2025년 07월 28일(월) 10:28 |
![]() 영화 ‘델마와 루이스‘ 한 장면. CJ CGV 제공 |
델마(배우 지나 데이비드)는 남편 데릴로부터 순종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가정주부다. 델마는, 과거에 강간의 상처로 정신적 응어리를 안고 사는 독신녀 친구 루이스(배우 수잔 서랜드)와 함께 잠시 일상으로부터 벗어나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이 여행을 위해 델마는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 했고 루이스는 생계를 위한 식당 웨이트리스 일을 멈춰야 했다. 차 안에서 델마는 호신용으로 남편의 총을 가져왔다며 루이스에게 건넨다. 당시로서는 두 여성의 여행이 만만해 보였던지 한 부랑배에게 주차장에서 강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델마를 구하기 위해 남성을 저지할 목적으로 총을 겨눈 루이스에게 남성이 모욕감을 주자, 루이스는 과거의 기억과 현실의 격분이 교차하면서 총을 쏘고 남성은 즉사한다. 이들의 여정은 이제 경찰에게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다. 오픈카를 탄 두 여성의 모습은 트럭 운전수들이 경적을 울리며 위협(희롱)을 가해도 되는 대상이라는 듯 길 위에서도 남성위주 사회의 폭력구조를 보여준다. 히치하이커를 태워주는 델마의 순진함을 악용해 몸과 돈을 앗아간 비열한 남성 제이디(배우 브래드 피트)도 만난다. 이들에게 자신들을 쫓는 경찰은 경직되고 폭력적인 남성의 이미지를 상징할 뿐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남성의 폭력성은 저항의 대상이라는 눈뜸을, 그러면서 자아를 직시하는 시각을 비로소 갖게 된다.
“너 깨어났니? 난 변했어, 루이스.”
“그래. 이제 넌 처음으로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게 된 거야.”
영화에서는 여러 유형의 남성들을 등장시킨다. 여성을 지켜주고 배려해주는 유형에 비해 남성우월주의에 사로잡혀 가부장적이거나 폭력적이면서 여성을 무시하거나 여성을 성적·경제적 착취대상으로 삼는 남성 캐릭터들이 태반인 사회. 여성이 사회적 피해자임을 절감한 델마와 루이스는 자신을 속박하는 굴레, 남성지배 구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해방감을 찾아 ―비록 살인, 폭력 등의 방법이긴 하지만―남성중심 사회에 저항하고 응징해가며 내·외적 성장을 한다. 그렇지만 법적 이탈이라는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자유로움을 간직하기 위해 그랜드캐년 절벽으로 돌진하는 두 여성은 자신들의 정체성 만큼은 지키는 카타르시스를 객석에 넘겨준다.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젠더 정체성의 변화를 경험하도록 장치해둔 만큼 개봉 이후에 여성억압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 영화비평은 1970년대 이후 활성화되었지만, 이 영화를 계기로 좀더 본격적 담론을 펼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성에 대한 편견 없는 우월성을 다룬 영화 ‘히든 피겨스’(2017), 여성의 무한 잠재력으로 구성한 ‘원더우먼’(1984) 등이 있지만, 이 영화와 결이 유사한 ‘적과의 동침’(1991)에서는 여성을 열세의 존재로 간주, 복종과 성적 도구라 여기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총살함으로써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공간을 열어준다.
페미니즘에 상대적인 마스큘리즘도 한때 양성평등의 차원에서 활성화된 바 있다. 소설을 영화화한 ‘아버지’(1997)가 대표적이다. 페미니즘이든 마스큘리즘이든 궁극적으로는 양성평등이 목표다.
양성평등의 전제는 기회의 균등, 조건의 평등, 결과의 평등이 성립될 적에 가능하다. 필자가 살아온 시절은 결코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다. 시대적 조류에 따라 구색 맞추기 식은 있었어도. 시절이 좋아져서 기회가 넓어졌다 한들, 그간의 불평등으로 여성을 키워내질 않아서 재원이 부족하기만 하다. 양성평등의 조건은, 남성과 여성의 다름을 이해하고 다름에 따른 배려의 수반이다. 여기에 대립과 회피는 매우 소모적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사회에서 양성평등을 이루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많은 부분에서 개선의 여지는 있지만 ‘미흡’이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담론은 계속될 밖에….
백제예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