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없는 DJ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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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인맥
말이 필요없는 DJ 고향
[호남인맥-신안]
무안서 분리 한때 인구 40만
소금 일궈 인물 키웠다
공부 좀 한다는 인재들
목포 유학 '신목회'가 대표적
  • 입력 : 2014. 08.01(금) 00:00
'1004의 섬' 신안군. 유인도 72개ㆍ무인도 932개 등 1004개의 섬을 보유하고 있다고 해서 이렇게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섬을 보유한 곳은 없다. 신안(新安)이라는 지명은 비교적 최근부터 사용됐다. 조선시대까지는 나주목ㆍ광주목ㆍ지도군ㆍ영광군ㆍ해남현으로 분포하다 일제강점기에 무안군에 속했으나 1969년 1월1일부터 신안군으로 분군(分郡)되면서 독립적인 군으로서 위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전남도 자료에 따르면 무안(務安)군에서 생겨난 새로운 군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신안은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해 입도(入島)가 시작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전에도 사람은 살았겠지만 왜구의 침입이 잦아 공도(空島)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신안사람들은 바다와 접해 살았지만 값비싼 배를 구입하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대대로 맨손어업ㆍ양식어업, 그리고 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40만 가까운 인구가 섬 곳곳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신안 출신들도 1960년대 이후 경제개발의 물결을 타고 목포를 통해 전국 각지로 이동했다. 현재 인구가 예전의 10분의1 수준인 4만4000여 명으로 줄어든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섬들의 고향' 신안사람들이 육지를 향해 첫 발을 내디딘 곳이 목포였다. 그래서 목포가 신안사람들의 거점 역할을 했다. 신안군 청사가 지난 2011년 압해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목포시내에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또 공부 좀 한다는 청소년들은 목포로 나와 학업에 정진했다. 서울에 신안 출신 목포고 동문들의 모임인 신목회(新木會)가 있을 정도다.

학업을 지탱해 주었던 것은 소금이었다. 해방 직전 신안 비금도에 염전이 들어선 이후 인근으로 확산된 염전은 인재들을 키운 학자금의 원천이었다.

이런 혜택도 보지 못한 신안의 청년들은 맨주먹으로 상경, 거센 파도보다도 억척스럽게 서울에 뿌리를 내려 성공했다.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 신안건설산업㈜ 우경선 회장 등이 그런 신안 출신들이다.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대표하는 거장 김환기(1913~1974) 화백도 신안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다. 김 화백은 소년시절부터 고향 신안의 푸른 파도와 돛단배를 그리며 화가의 꿈을 키웠다.

장재식 전 산업자원부 장관을 비롯 3대에 걸쳐 호남 최대의 명문가로 자리잡은 인동 장씨 일가(가계도 참조)도 신안 장산에서 잉태됐다. 장씨 집안은 구한말 장산도 일대 염전과 논밭을 가진 만석꾼 부호였다. 1915년쯤 장 장관의 할아버지(장진섭)대에 자녀들 교육을 위해 육지로 나와 광주에 자리를 잡았다. 신안군이 선양작업을 전개하고 있는 장병준(임시정부 외무부장ㆍ장진섭의 큰아들) 등 1세대는 모두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장재식 전 장관을 비롯한 2세대는 정치인과 관료로, 장하진 전 여성부장관(충남대 교수ㆍ고 송기숙 교수 배우자)를 비롯한 3세대는 학자로 우리나라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다.

신안은 이제 마지막 아껴놓은 땅으로 평가받고 있다. 26개 교량(완공 8개소, 추진 중 4개소, 향후 추진 14개), 총 41km에 달하는 연륙ㆍ연도사업이 완성되면 신안은 이제 더 이상 섬지역이 아니다. 정치계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 하의면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아들인 김홍일ㆍ홍업 형제도 국회의원을 지냈다. DJ의 최측근 중 한 명인 한화갑 전 평화민주당 대표(목포고ㆍ서울대 정치학과)도 도초면 출신이다.

민주한국당 부총재를 지낸 유옥우 전 국회의원(3ㆍ4ㆍ5ㆍ8ㆍ11대ㆍ작고)도 비금이 고향이고 그의 손자가 영화배우 겸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지태다. 암태면이 고향인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은 4선 국회의원(15ㆍ16ㆍ17ㆍ18대ㆍ목포중고ㆍ서울대 법대)을 지냈다. 천 전 장관은 고교시절인 1972년도 대학예비고사 인문계 전국 수석과 서울대 법대 수석 합격을 한 인물로, 사법연수원을 3등으로 수료한 뒤 공군 법무관으로 복무하던 중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 정권에서 법관 임용 받기를 거부하고 변호사가 됐던 인물이다. 목포를 중심으로 환경운동을 주도해온 서한태 박사가 그의 장인이다.

김유배 전 국가보훈처장(하의도ㆍ목포고ㆍ청와대 복지노동수석), 백일도 전 공화당시절 국회의원(도초면), 주도윤 전 국회의원(지도면), 주영대사를 지낸 최선홍 전 외교통상부장관(안좌면ㆍ목포고), 박형오 전 국회의원(목포공고), 이수동 전 아태재단 상임이사(하의면), 황호순 서울시의회 예결위원장(비금면ㆍ민주당 신안무안군 위원장) 등이 있다.

경제계

신안 출신으로 경제계의 거물은 역시 신안그룹 박순석 회장(비금면)이다. 젊은 시절 일찍이 상경해, 경제적 감각을 익힌 박 회장은 건설업을 주력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이어 금융ㆍ철강업으로 진출했고 상장회사인 ㈜휴스틸은 국내 두번째 철강제조업체로 유명하다. 골프장ㆍ콘도ㆍ스키장 등을 다목적 리조트인 강원도 횡성 성우리조트를 인수하기도 했다.

신원그룹 박성철 회장(자은면ㆍ목포고 12회)은 섬유산업으로 성장한 기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섬유산업협회장도 역임했다. 목포고 시절 학생회장을 하기도 했던 박 회장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이후 노승숙 전 국민일보 회장(무안 출신)이 이어받았다.

우경선 신안건설산업㈜ 회장(자은면)은 아파트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인물로, 목포에서는 유명한 신안비치호텔이 그의 소유다.

김진일 ㈜해우GLS회장(자은면ㆍ조대이공대)은 우리나라 물류산업의 개척자로, 한국통합물류협회장ㆍ한국물류사업협동조합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박신광 한미그룹 회장(임자면ㆍ목포공고)은 국내에 주유소만 100여 개를 소유한 GS칼텍스의 최대 고객이다. 박 회장은 향우들에 대한 애정이 높아 재경신안군향우회장을 역임하고 많은 장학금을 출연, 장학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박부일 ㈜라스포 회장(안좌면ㆍ목포고 9회ㆍ연세대)은 1974년 다다실업을 설립, 세계 스포츠 모자시장을 석권한 인물이다. 미국 4대 스포츠리그 선수들이 쓰는 모자의 대부분은 이 곳에서 생산된 제품이다고 보면 될 정도. 일찍 해외로 눈을 돌려 베트남ㆍ중국ㆍ방글라데시ㆍ인도네시아에 법인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금탑산업훈장(2003년)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형이 ㈜라스포 대표이사인 박부근 사장이다.

여성으로는 김영금 삼익CNE 대표이사(임자면)가 재경광주전남향우회여성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고, 김길재 신안화학 회장, 윤성균 오성철강 사장, 정호현 유영상사 회장, 이원일 성원기업 사장, 김종인 영진약품 전 사장, 박문수 하이테크 하우징 대표이사 등이 신안출신으로 경제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금융인으로는 김영준 전 기업은행신용정보㈜ 대표이사(목포상고)가 있다.

법조계

조승형 전 헌법재판관(증도면ㆍ목포중고)은 검사 출신으로 이회창 전 국무총리와 서울대 법대 동기생이다. 민추협운영위원으로 참여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치적 인연을 맺기 시작했으며, 민주당 시절 김대중 총재 비서실장, 국회의원(전국구)을 역임했다. 강직한 성품을 지닌 조 전 헌법재판관은 DJ가 가장 신망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으나 대통령 당선 이후 자녀들의 정치참여를 반대했고, 국민의 정부시절 공직에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변호사로는 김정길 전 법무부장관(도초면ㆍ조대부고ㆍ고려대), 박종택 변호사(광주숭의학원 이사장 역임), 김구일 변호사(이상 재경신안군향우회장 역임), 박상선 변호사 등이 있다

관계

김광희 전 농촌진흥청장(도초면)은 국제농산물 관련 국제통으로 우루과이라운드협상 실무책임을 맡기도 했으며 농림수산부 양정국장ㆍ축산국장, 산림청 차장, 제1차관보를 역임했다. 홍영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하의면ㆍ목포고ㆍ전 전남경찰청장)도 신안 출신이다.

박우량 전 신안군수(도초면ㆍ목포고 21회)는 내무부 공무원으로 성장했고, 강운태 내무부장관 시절 비서실장, 하남시 부시장을 역임했다. 박우건 전 한국생산성본부 전무이사가 그의 형이다. 또 최장봉 전 예금보험공사 사장(안좌면ㆍ목포중ㆍ서울고)은 재무부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그림1중앙>
군계

이성출 예비역 대장(비금면ㆍ목포고)이 신안 출신으로는 가장 높은 계급장을 달았고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역임했다. 동생이 이성식 예비역 해군소장이다. 고기원 예비역 중장(도초면), 김복산 예비역 소장도 있다.

군인으로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 박정모 예비역 해병대 대령(도초면)이다. 그는 6ㆍ25 당시 서울을 수복했을 때 지금은 없어진 중앙청에 태극기를 최초 게양한 인물이다. 당시 해병대 1연대 2대대 6중대 1소대장으로 부하 소대원 3명과 함께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해 수도 서울 수복을 알렸다.

의료계

김상태 혜민병원 이사장(압해면ㆍ목고중고ㆍ전남대 의대)이 서울 광진구에서 개인종합병원을 운영하고 있고, 천상배 내과의원 원장(암태면ㆍ목포고)은 서울 향우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ㆍ예체능계

김환기 화백(안좌면)은 한국 최고의 대가다. 1992년 그의 예술정신을 기리기 위해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세워졌고 그의 생가는 2007년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251호로 지정됐다. 김 화백의 인척관계인 김암기 서양화가(안좌면)도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장을 했으며 활동은 주로 목포에서 했다. 한국화가 천현혹 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시위원도 암태면이 고향이다.

프로바둑기사 이세돌(李世乭ㆍ31) 9단이 신안 비금 출신이다. 12세되던 해인 1995년 입단, 한국기원 사상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9단까지 승단(2003년)한 인물이다. 형 이상훈과 누나 이세나 등 3남2녀 가운데 3남매가 프로기사로 활동하고 있다. 바둑을 즐겼던 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훈이 1987년 세계청소년바둑선수권대회에서 우승, 먼저 두각을 나타냈지만 이후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일찍 재능을 발견한 아버지로부터 보다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던 이세돌이 승승장구하고 있다. 신안군은 비금면에 폐교를 활용, 이세돌 기념관까지 마련했다.

언론ㆍ교육ㆍ종교계

언론인으로서는 정일윤 전 KBC광주방송 사장(임자면ㆍ목포중고ㆍ고려대)이 서울MBC 기자로 입사해 서울MBC 보도국장, 진주MBC 사장을 역임했다.

교육계에는 김신복 전 전 서울대 부총장(안좌면ㆍ목포고 12회)이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ㆍ교육인적자원부 차관 등을 역임했으며, 김해천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비금면)가 우리나라 경영학박사 1호로 고려대 부총장까지 지냈다. 황현산 고려대 명예교수(비금면)는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번역비평학회 명예회장도 맡고 있다. 이창우 고려대 농대 교수(비금면), 박득순 전 협성대교수도 있다.

종교계에는 김수진 목사(비금면ㆍ목포고 5회ㆍ전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는 한국 교회사의 최고 권위자로 영락교회사를 비롯 한국교회사를 거의 집필했다. 이만신 목사(임자면ㆍ문태고)가 성결교회 중앙회장을 지냈다.


강덕균 기자

남다른 고향사랑 향토지 릫비금릮 만들고 신안향토사박물관 건립 추진도
■ 유부철 SB에셋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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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철(劉富喆ㆍ64) ㈜SB에셋 회장은 신안군 비금면 지당리에서 태어나 비금중앙초등ㆍ유달중ㆍ목포고ㆍ중앙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곧바로 한국은행에 입행한 유회장은 과장시절 광주에서 2년간(1992~1994년) 근무하기도 하면서 금융인으로 한평생을 살아왔다.

광주 근무 이후 한국은행 소속이었던 은행감독원에서 근무하던 중 1998년 증권감독원ㆍ보험감독원 등이 통폐합돼 금융감독원이 생기면서 그곳에서 소비자보호실장을 끝으로 지난 2008년 정년퇴직했다.

한국 금융계의 산 증인이기도 한 그는 IMF구제금융 당시 폐쇄되는 금융기관을 지휘했다. 또 한스종금(구 아시아종금) 등 법정관리인, 한신저축은행 감독관 등을 하면서 쓰러져 가는 금융현실을 목도하기도 했다. 퇴직 이후 공평저축은행 감사로 3년간 근무했던 그는 금융컬설팅회사인 SB에셋 회장으로 취임, 활동하고 있다.

애향심이 남달랐던 유 회장은 금융감독원에 근무하던 시절인 지난 1987년, 고향 비금의 역사를 집대성한 향토지 릫비금릮을 만들기도 했다. 이로 인해 당시 월간 조선 화보표지에 이달의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지난 2005년 유씨 종친 회비 등 4000여 만원의 기금을 조성해 임진왜란(1592년)을 전후해 비금도에 최초로 입도한 유씨 선조를 기리기 위한 비금입도 기념비를 제작해 건립하기도 했다. 그는 또 신안군 향토사 박물관을 건립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은행 광주지점에서 근무할 때 당시 지방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한국은행이 특별지원하는 릫일레븐 자금릮 200억원이 배정됐는데, 타 시도에서 사용하지 않은 100억원을 더 끌어와 고향 중소기업, 심지어 배농가까지 지원해 고향에 도움을 줬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강덕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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