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 1000척 어시장 '위도 파시'는 옛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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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바다 위 1000척 어시장 '위도 파시'는 옛 기억으로…
[섬이야기] 전북 부안 위도
  • 입력 : 2015. 03.06(금) 00:00
위도 앞바다에서는 1994년 292명이 숨진 서해훼리호 사건 등 안타까운 해난사고가 자주 발생했다. 아픔을 간직한 섬이지만 빼어난 풍광은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아름다운 해변을 간직한 미영금 해수욕장.
위도는 전북에서 가장 큰 섬으로 변산반도 격포항에서 서쪽으로 14㎞ 거리에 있다. 위도는 격포항에서 정기여객선으로 5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의 생김새가 고슴도치와 닮았다해 '고슴도치 위(蝟)자'를 붙여 위도(蝟島)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도는 서해안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중요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의 해군 무관에 해당되는 첨사라는 수군첨절제사가 주재하며 사법, 행정권을 총괄하는 업무를 관장했다는 점을 볼 때 위도가 얼마나 중요한 해상 군사 요충지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림2중앙>
고깃배 1000척 대규모 '조기 파시'

여객선이 닿는 위도 파장금항은 격포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제일 먼저 닿는 곳이다. 한때 대규모 '조기 파시'로 이름을 날리던 곳이다. 위도 남쪽 바다가 바로 조기잡이의 보물창고였던 칠산어장이다. 조기는 동지나해에서 겨울을 보낸 뒤 봄철이 되면 황해를 거슬러 올라 산란길에 오른다. 3월은 흑산도 바다에서, 4월은 영광과 위도 근해의 칠산어장. 5월은 충남 태안의 격렬비열도를 지나 연평도와 황해도 장산곶에 이르러 알을 낳는다. 이곳에 집결한 대부분의 안강망 어선들은 물이 많이 빠지는 사리 때 바다에 나가 그물을 내려 조업을 하고 조금 시에는 파장금항으로 들어와 휴식을 취하면서 배와 그물, 어구를 손질했다. 파장금항에 파시가 들어서면 맞은 편에 있는 식도까지 1000여 척의 고깃배가 빽빽히 들어서 밤이 되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뤘다고 한다. 이곳에선 일본인 어선 400척, 한국인 어선 700척 등 약 1100여 척의 어선과 일본인 2000명, 한국인 3500명 등 5500여 명의 어부가 좁은 어촌인 파장금에 몰려 들었다. 그 당시 파장금 포구가 번창할 당시에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리집이 6개, 한국인이 경영한 음식점이 35개나 됐다. 술집 색시만도 400~500명이 북적거렸다니 위도의 파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조기 파시가 들어서면 좁은 어촌이 일시에 번화한 어촌으로 변했다. 따라서 어부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을 판매하는 상인들과 음식점, 술집, 선구점, 기계수리점, 잡화상, 이발소, 미용실, 식당, 다방, 세탁소, 술집 등 많은 가게들이 문을 열었고 파장금항은 소도시를 이뤘다. 이 때 이들이 건져 올리는 조기는 배 한 척당 50~60동, 1동이 1000마리니까, 1100척의 고깃배가 건져 올린 조기는 무려 4000만 마리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잡힌 조기는 영광의 법성포로 실려가 염장으로 가공돼 '영광굴비'라는 브랜드로 전국에 판매됐다. 그러나 이는 40여 년 전의 일로 지금은 다 꿈같은 이야기다. 파시가 사라진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다. 먼저 어선의 대형화와 현대화에 따른 남획으로 조기가 많이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방에 넓고 빠른 육로가 생기고, 냉동 기술 발달과 유통구조 변화로 대형 냉동 차량이 싱싱한 조기를 대도시까지 운반할 수 있게 된 것도 한 원인이 됐다.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그 당시의 파시여 '다시 한번'이라고 외치고 싶다.

<그림1중앙>
마을의 평안과 풍어 기원 '띠뱃놀이'

전막리 마을에서 바로 언덕만 넘으면 위도 띠뱃놀이로 유명한 대리 마을이다. 면소재지인 진리에서 치도리를 거쳐 서쪽으로 약 6㎞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대리는 일찍이 풍부한 어족자원의 형성으로 많은 어선들이 어장으로 향하면서 큰 마을로 발전했다. 대리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가 됐다. 마을 안쪽에 보면 전수관이 두 채 있다. 그 중 현대식 건물은 2년 전인 2008년 12월 띠뱃놀이 전수활동 지원을 위해 만들어진 '위도띠뱃놀이 다목적 전수관'이다. 160~170년 전부터 치러진 위도띠뱃놀이(중요무형문화재 82-다호)는 마을의 평안과 어민들이 고기를 잘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으로, 대리 마을에서 매년 1월초에 열린다. 띠뱃놀이는 만선, 평안, 행복 등을 적은 소원문과 오색깃발을 매단 띠배를 임금 진상품인 '칠산조기'가 많이 잡히는 마을 앞바다에 띄워 보내는 풍어제다. 바닷가에서 용왕굿을 할 때 띠배를 띄워 보내기 때문에 띠뱃놀이라 불려졌고 소원을 빌기 위해 세운 집인 원당에서 굿을 하기 때문에 원당제라고도 한다. 뱃노래와 술, 춤이 함께 하는 마을의 향토축제로 고기를 많이 잡고 안전을 기원하는 어민들의 신앙심이 담겨져 있다. 띠배는 마을 인근에서 자라는 갈대를 길이 4m, 폭 2m로 엮은 모형어선으로 그 안에는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어부와 선원들이 탄다. 특히 띠배를 바다 멀리 띄워 보낼 때에는 농악에 맞춰 술배소리, 에용소리, 가래질소리 등 뱃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신명나는 굿판을 벌인다. 술과 음식도 넘치게 나와 위도 주민들은 매년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위도띠뱃놀이는 위도 주민들과 관광객이 하나 되는 대동화합의 축제 한마당을 연출한다. 위도 띠뱃놀이는 지난 1978년 제19회 전국민속 예술경연대회에서 최고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안타까운 대형 해난사고 잇따라

위도의 치도리 마을 앞에는 딴치도라는 무인도가 있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면 바닷길이 열려 걸어서 그 섬에 들어갈 수 있다. 위도에는 위령비(탑)가 2기가 있는데 딴치도에 있는 '조난어업자조령기념비'와 진리에 있는 '서해훼리호참사위령탑'이 그것이다. 이 딴치도(외치도)의 어선 조난사고는 지금으로부터 83년 전(1931년) 한 해 동안에 세 차례에 걸친 풍랑으로 전국에서 모여든 돛배 500여 척과 어부 600여 명이 치도 앞 바다에서 수장된 해난사고다. 1931년 4월, 8월, 12월에 연이은 세 번의 대형 풍랑 사고였다.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조령기념비(弔靈記念碑)가 그때를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로 위도를 울린 사고는 1958년 음력 3월15일에 침몰한 위도-곰소간 여객선 사고다. 서해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풍랑이 높았지만 평소처럼 위도를 향해 출발한 낡은 목선인 통도호는 임수도와 격포 근해에서 기관고장으로 표류하다가 마침내 침몰했다. 위도 주민 62명 중 60명이 실종되고 두 명만 생존했다.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신을 찾지 못하는 아픔을 겪었다. 청천벽력 같은 사고는 또 일어났다. 이는 우리나라 여객선 사고사상 세 번째로 큰 인명피해를 낸 1993년 서해훼리호 사건이다. 서해훼리호 승선정원은 221명인데 그날 배에 승선한 인원은 무려 362명으로 정원보다 141명을 초과했다. 그 중에서 생존자는 70명, 사망자는 292명이었다. 그 중 위도 주민은 61명이 승선해 3명이 생존하고 58명이 사망한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위도는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을 이기지 못하고 모진 슬픔을 당한 통한의 현장이다.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직전까지만 해도 위도는 전국 각지에서 온 낚시꾼들로 붐볐고, 고기잡이도 번성해 살 만한 섬이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위도는 한동안 '비극의 기억을 안고 사는 섬'으로 추락했다. 21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도 사람들에게 아직도 사고의 상처가 깊다. 파장금항에서 진리 쪽으로 향하는 해안 언덕에는 서해훼리호 위령탑이 상처처럼 서있다. 탑에는 당시 사고로 희생된 292명의 이름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다. 망망한 대해를 끼고 살다보니 서해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온 몸으로 혼자 막다가 여러 번 참사를 당했다. 그러나 자연이 재해도 주지만 자연과 바다가 풍요로움을 주기도 한다. 고운 모래와 기암괴석, 울창한 숲, 빼어난 풍광이 위도를 찾는 여행자를 감탄하게 만든다. 아치형인 위도해수욕장, 미영금, 논금 등 아름다운 해변이 방문객을 사로잡는다. 연안을 따라서 자리 잡은 인심 좋은 마을 주민들이 정답기만 하다. 하지만 위도 주민들의 마음 속에는 슬픔의 고뇌가 서려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여기를 거쳐 가는 수많은 여행자들은…. 다시금 위도에 조기 파시가 형성되고 허균의 율도국과 같은 이상향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보면서 섬을 떠나간다.

이재언 섬 전문 시민기자ㆍ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그림3오른쪽>
위도는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도 20, 북위 35도 36에 위치하며 면적 11.14㎢, 해안선 길이 36㎞, 764가구 1267명(2014년)이다.

위도 가는 길

격포→위도, 위도카페리호와 신광페리호가 1일 6회 운행. 차량 선적 가능.

섬내 교통

위도 내의 교통은 택시(무쏘)와 버스가 있는데 위도 내 버스 시간표는 배 시간에 의해 조정된다. 배에서 내리면 버스 한 대가 항상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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