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아티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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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소남의 통기타 이야기
팝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아티스트
국소남의 통기타는 영원하다-엘비스 프레슬리
  • 입력 : 2016. 09.22(목) 00:00
●통기타! 그 정체성에 대하여

'국소남의 통기타는 영원하다'라는 제목으로 이 지면을 통해 4회에 걸쳐 꽤 장황하고 긴 이야기를 썼다. 통기타, 특히 광주 통기타의 역사와 정체성을 얘기하려면 국내 통기타의 태동과 그 줄기의 흐름부터 먼저 써 나가야 하는 게 옳다.

하지만 통기타 음악이라는 문화적 접근에는 반드시 거쳐야할 수순이 있다. 기타가 본래 서양악기가 아닌가? 그래서 바로 서양음악(흔히 말하는 POP'S)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국내, 아니 광주 통기타 문화를 얘기하기 어렵다. 결론은 통기타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이 글을 읽는 이로 하여금 보다 넓게, 그러나 쉽고 흥미롭게 이해되도록 접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접근으로의 정체성 즉 매체가 POP'S인 것이다. 외국의 POP'S를 말하려면 그것을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 이 두 나라의 커다란 양대산맥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20세기 POP'S계에 도저히 빼놓으면 안되는 5개의 그룹이 있다. 로큰ㆍ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인류 POP'S 음악사에 위대한 전설 비틀즈(Beatles),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프로테스트송의 선구자, 포크ㆍ컨트리록의 창시자, 록의 메시아 밥 딜런(Bob Dylan), 그리고 포크의 여왕 존 바에즈(Joan Baez)가 그 주인공들이다.

그렇다. 인류 POP'S의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이름을 남긴 이 5개 그룹은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가장 빛난 활동을 했던 시기의 가수들이다. 그들이 얼마나 커다란 족적을 남겼는지 차례대로 살펴보자!

위에서 말한 그룹의 활동주기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 영국에서의 이들은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까지 모두가 그 정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다. (마이클 잭슨은 조금 예외지만)

●로큰ㆍ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

로큰ㆍ롤은 1950년을 전후해서 생겨난 장르다. 락과 롤은 흑인들이 성행위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속어로 미국 주류 백인들에게는 불쾌하고 반항적이었으나, 젊은이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엘비스는 미국 미시시피주 이스트 투펠로에서 1935년 1월 8일 쌍둥이로 태어났고, 먼저 태어난 형이 태어나자마자 죽게 됐다. 1948년(12살) 7월에 테네시주 맴피스로 이주하게 된다. 11살의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게 되고, 로큰ㆍ롤의 제왕으로 군림하다 1977년 8월 16일(42살) 심장쇼크로 사망하게 된다. 로큰ㆍ롤의 제왕이라는 닉네임으로 죽을 때까지 팝 뮤직 역사상 가장 인기있는 아티스트로 그가 데뷔한 이후 어떠한 가수, 배우 그리고 엔터테이너들도 팝계를 지배할 수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비틀즈의 맴버였던 존 레넌은 전기작가 헌터 데이비스에게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아무도 내게 음악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밥 딜런은 '내가 포크무대에서 품었던 꿈은 그보다 반드시 위대한 가수가 되겠다'라는 것이었고,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자신이 타임지와 뉴스위크지의 표지에 나온 인물이라는 점만 믿고 그의 저택에 찾아가 경비원에게 그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쫓겨나고 말았다는 사실만으로 엘비스 프레슬리의 위대함이 어느 정도인 것인지 짐작이 간다.

●청춘, 로큰ㆍ롤에 열광하다

1935년에 태어난 엘비스는 54년에 데뷔, 그 시절 그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기성의 미국과 청춘의 미국으로 편을 갈라놓을만큼 폭발하는 새로운 청춘의 의미를 부각시켰다. 한마디로 그것이 곧 미국의 로큰ㆍ롤 혁명이었다. 그가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1953년 TV방송국이 328개로 불어났고 TV수상기가 2700만개에 육박해 TV시대가 열리게 되면서 TV라는 뉴 미디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양키 미남인 점도 큰 몫을 차지했다.

얼굴뿐만 아니라 구렛나루, 이글거리는 눈빛, 와일드한 헤어, 복장, 이 모두가 충격적이었다. 그의 허리놀림과 주물대는 히프는 이제껏 그 누구로부터도 보지 못했던 센세이셔널한 볼거리로 야성미의 실체라고까지 표현되며 그야말로 청춘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악의 표본'으로 몰리기도

엘비스의 첫 취입곡 '좋아요 어머니(that's all right mama)'를 시초로 '상심의 호텔(Heart Break Hotel)'은 엘비스 열풍의 기폭제로 이어졌고 음반은 눈 깜짝할 사이 150만장이 팔리기도 했다. 허나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만은 않았다. 시인 톰건의 표현은 이랬다. '그는 소란을 하나의 스타일로 변화시키고 있으며 미국의 기성세대는 그를 하나의 눈엣가시로 보기도 했다'고….

각 음악계, 언론계, 학계, 종교계 등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악의 표본'으로 몰아 부쳤고, 뉴욕타임지는 그에게서 유별난 가창력은 발현되지 않고 오로지 리듬, 미녀들의 육탄공세, 자극적인 몸놀림만이 있을뿐이라고 지적했다.

예일대학에서는 '우리는 엘비스가 아니라 베토벤을 사랑한다'는 피켓을 내걸었고, TV의 에드 설리번 쇼에서는 가족 시청자들에게 적합치 않다는 이유로 그가 노래할 때 카메라를 허리 아래는 비추지 않았다.

오클랜드의 한 경찰은 '그가 만약 거리에서 그렇게 몸을 놀려 댔더라면 우리는 그를 체포했을 것'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압도적으로 그를 지지, 발표하는 노래마다 정상을 차지해 57년 한해에 2700만 달려의 수입을 올리면서 1인 기업의 위치에 올라서기도 했다.

●노동계급서 팝계의 우상으로

미국의 전형적인 노동계급출신의 속된 말로 '촌놈 중의 촌놈'으로 14살때까지 영화구경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던 엘비스.

부친 버논 프레슬리는 잡역부였고 모친 글래디스는 재봉질로 푼돈을 벌어 가계를 꾸려야 했다. 결국 가난 때문에 고향 미시시피를 등져야 했다.

멤피스로 이주 후에도 연방주택계획에 따른 보조금으로 셋방살이에 급급했던 어린시절. 트럭운전을 하던 어느날 어머니께 생일선물을 드리기 위해 4달러를 들여 녹음했던 'My happiness'란 노래가 씨앗이 되어 일약 슈퍼스타의 길에 오르게 된다.

그는 미국에서의 성공이 여전히 개인의 창의력과 노력,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창조자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룩될 수 있다는 미국식 사고방식을 재확인 시켜주며 빈민층 자녀들의 꿈이 되기도 했다.

●엘비스의 혁명은 미완성 혁명

60년대 들어 격렬한 로큰ㆍ롤로부터 차분한 발라드로 음악의 조류를 바꾸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곡의 하나로 '한줄기 당신의 체취를 찾아(Anything that's part of you)'라는 제목의 노래가 있다. 국내에서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가수 고(故) 차중락이 '낙엽따라 가버린 사람'이란 제목(이상하고 엉뚱한 제목)으로 노래해 크게 히트한 바 있다.

엘비스, 특히 그는 살인적인 여인들의 인기속에 사생활을 전혀 즐길 수 없는 식물인간적인 삶을 살았다.

한밤중에나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어찌보면 현실세계와는 완전히 유리되어 공식석상에서 조차 자신의 모습을 꺼려하는 생활로 일관하게 됐다. 한때는 영화에만 집념, 금단의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그의 삶은 실로 수감상태가 아닐 수 없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그는 록 음악의 신화와 갖가지 휘황찬란한 기록들을 유산으로 남겼지만 록 음악의 특징인 사회의식을 남기진 못했다.

결국, 록 음악의 외형적인 혁명을 이룩했지만 의식혁명은 1960년대 가수들에게 그 바톤을 넘겨야만 했다. 하여, 엘비스의 혁명은 미완성 혁명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다.

●죽음의 신과 입 맞추다

엘비스가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이유 하나, 그의 음악은 흑인음악이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백인이 흑인음악으로 세계적인 사랑을 받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흑백차별이 심했던 시대에 인종의 크로스 오버를 그것도 성공적으로 이루어 냈다는 점. 그리고 1950년대 중반, 단 1~2년만에 세상을 바꿔버린 전설은 인류 문화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1977년 8월16일 죽음의 신과의 입맞춤이 없었더라면 지금 밀레니엄의 시대에 로큰ㆍ롤은 어떻게 평가되고 들려질까.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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