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비경 간직… 시인ㆍ묵객 자취 그윽한 천하제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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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태고의 비경 간직… 시인ㆍ묵객 자취 그윽한 천하제일경
화순적벽
장항ㆍ보산ㆍ창랑ㆍ물염 4개의 적벽
닮은 듯 다른 듯 각자의 아름다움
화가ㆍ문장가 가을 절경 노래ㆍ칭송
  • 입력 : 2017. 01.13(금) 00:00
수몰 전 화순 적벽. 화순군 제공
혹시, 봤어? 요즘 화순적벽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화순적벽은 예나 지금이나 보는 이로 하여금 찬사를 쏟아내게 한다. 태고의 비경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과 물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몽환적 분위기가 일상의 풍경에서 느낄 수 없는 색다른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화순(이서)적벽은 장항(노루목)ㆍ보산ㆍ창랑ㆍ물염 등 4개의 적벽을 총칭하여 일컫는다. 이들은 서로 닮은 듯 다른 듯 연관성을 가지면서도 각자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그 가운데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장항적벽은 산의 형세가 노루의 목을 닮았다하여 노루목적벽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실제 산길에 노루가 많이 뛰놀았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또 정지준(丁之雋, 1592~1663)이 건립한 망미정((望美亭) 앞에 있다고 하여 망미적벽으로 불러지기도 한다. 어쨌든 '화순적벽'이라함은 노루목적벽을 일컫는데 이를 맞은편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금방 호수에서 거대한 새가 막 춤을 추며 비상하는 것처럼 위용을 뽐내고 있다. 산의 계곡과 능선은 수목과 바위가 어우러져 마치 새의 깃털이나 노루의 등 근육처럼 생동감 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화순적벽은 조선시대 중종(1519년) 때 기묘사화로 화순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1483∼1536)에 의해 중국의 적벽에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다. 붉은색 기암괴석이 소동파가 노래한 중국 양쯔강의 황저우(黃州) 적벽에 버금간다는 이유에서다. 화순 동복 일대는 일찍이 풍광이 빼어난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인 적벽(赤壁)은 원래 석벽(石壁)으로 불러지기도 했다.

조선 후기 전국 유명 명승지를 그린 '청구남승도'와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조선남승도'에는 적벽으로 기록되어 있고, '해동남승도'에는 그 앞을 흐르는 적벽강으로 등재되어 있다. 적벽은 옹성산(해발 572.8m) 서쪽에 우뚝 서 있는데 절벽의 바위색이 붉은색이어서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적벽강을 마주보고 형성된 붉은 단애(斷崖)가 7km이상 되는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화순적벽 바위에는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는 붉은색의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를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적벽이 신선세계(仙境)와 다를 바 없다는 의미로 석천 임억령(1496~1568)이 명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화순적벽은 일종의 암벽정원(岩壁庭園)이자 수직정원(垂直庭園)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화선지에 그려진 그림을 감상하듯 감상하면 된다. 다만, 그 액자 안에 어떤 풍경 어떤 구도를 담을 것인가는 보는 이의 몫이다. 정약용은 화순 현감으로 있던 부친을 방문했을 때 적벽을 보고 느낀 감상을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적벽은 울퉁불퉁 그 모양이 기묘하고 빼어났다. 돌의 높이가 약 수십 길이고, 넓이가 수백 보나 되는데, 그 빛깔은 담홍색이며 도끼로 깎아 세운 듯 우뚝하다. 그 아래는 맑은 못이 이루어져 배를 띄울 만하고 못의 위아래는 모두 흰 돌이다'.

또 황현(1855∼1910)이 그곳을 거닐며 구경하다 쓴 글에는 적벽의 기이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을미년(1895년, 고종 32) 9월에 나는 동복현의 적벽을 유람하였다. 이 벽은 동복현에서 서북쪽으로 20리쯤에 있다. 상하로 10리 산이 다 벽이고 강이 이를 감돌아 흐른다. 우뚝하게 높고 큰 벽이 무너질 듯 위태로우며 마치 새가 날개를 편 듯 둘러쳐져 있다. 모두 불가사의한 형세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비할 수 없이 기이하고 웅장하기로는 이곳 적벽이 최고다. 그리고 한창 가을 깊어지면 자주색 끈이 늘어진 것처럼 늙은 이끼가 길게 드리워진다. 거기다 석양이 붉게 비칠 때에는 바위틈에 비스듬히 자란 단풍나무가 솟아오르는 불처럼 아련하게 붉은 빛을 더한다. 그리되면 여러 색이 섞인 가운데에서 한 덩이 붉은 물결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적벽이란 명칭은 역시 가을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적벽의 풍경은 어느 때나 아름답지만 특히 가을의 적벽을 예찬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적벽일대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그림이 있다. 17세기에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 전충효(생몰년 미상, 조선후기 화가)의 '석정처사유거도'인데 적벽강의 물줄기와 양옆의 절벽이 표시되어 있어 그림으로도 완벽한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한편, 기묘사화로 중종 때 유배된 조광조(1482∼1519)도 화순에서 사약을 받기 전 한동안 배를 타고 적벽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한(恨)을 달랬다고 전해지고 있고, 대학자 하서 김인후(1510~1560)도 적벽시를 지어 화답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수많은 풍류 시인들이 이곳에 머물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방랑시인 김삿갓(본명 김병연ㆍ1807∼1863)도 적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노래했을 뿐 아니라 그의 방랑벽을 잠재운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무등산이 높다더니 소나무가지 아래 있고(無等山高松下在),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 위에 흐르는 물이더라(赤壁江深沙上流).'

이같이 노래하면서 적벽에 반한 그는 무려 13년의 여생을 여기서 머물며 수많은 시를 남겼고, 화순군 동복면 구암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화순적벽이 근대까지 '조선10경' 가운데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했던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송태갑 광주전남연구원 사회문화관광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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