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단절 있어야 시작도 있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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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죽음과 단절 있어야 시작도 있는 법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 리본커팅 세리머니
  • 입력 : 2017. 02.17(금) 00:00
일본 큐슈 남단 아마미오시마 유이 풍년제에서 진행된 새끼줄 자르는 모습.
무슨 위원회인가 연구소던가 시작하는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건물을 새로 지어 들어가는 입주식인 셈이다. 새로운 업무의 시작일이기도 하다. 오색 줄을 길게 늘어뜨리고 관련자들이 늘어섰다. 수행원들이 가위들을 나누어준다. 누군가의 신호에 의해 동시에 줄을 자른다. 길게 연결되었던 오색 줄들이 잘라져 땅에 떨어진다. 일제히 박수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흰 천으로 가려졌던 현판도 열린다. 비로소 건물 혹은 모임이 이름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 건물을 새로 지어 오픈하거나 어떤 일들을 새로 시작할 때, 우리는 으레 테이프커팅 의례를 한다. 이를 리본커팅 세리머니라 한다. 대개 의례절차가 정해져 있어 따라 할 뿐이다. 기본적인 의례라고 생각해서 행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이 풍속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언제부터 시작된 풍속인지 연구한 자들도 없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풍속이자 민속이고 문화인데도 말이다. 비로소 이름을 갖게 되는 이 순간의 의미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시인 김춘수의 언설처럼 비로소 이름을 불러주어 존재하게 된 '꽃'과 같은 것인가?


리본커팅 의례는 어디서 온 풍속인가?

유럽이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사회에서 연행되는 현대적 리본커팅 세리머니의 전통은 1898년 북 로지아나 철도 개통식에서 찾고 있다. 이 행사는 19세기 전반에 걸쳐 보다 일반화되어 급속하게 퍼져나갔다. 사례는 무수히 많다. 예컨대 1959년 디즈니랜드 오프닝행사나 1973년 세계무역센터 오프닝센터 개소식에서 연행된 것들을 눈여겨보라. 모두 이 전통에 의한 것이다. 행사의 이유나 목적은 모두 어떤 일들의 시작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리본커팅 세리머니는 근대의 발명품일까? 물론 아니다. 이 전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유럽의 결혼식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주목해볼 만하다. 프랑스에서 신부가 시집을 갈 때 집 앞에서부터 리본을 길게 늘어뜨리고 결혼식장인 교회까지 에스코트를 한 것이 전통의 시작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신부와 신랑 사이에 놓여있는 리본을 절단함으로써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것이 비즈니스나 거의 모든 일들의 시작의례로 자리 잡게 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럴까?



영국의 아서왕에서 찾는 리본커팅 세리머니의 기원

더 거슬러 올라가면 영국의 전설적인 아서왕에게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한다. 편년은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가공 재창조되어온 인물이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아서왕이 당시 농노를 해방하면서 그 의미로 리본커팅 세리머니를 행하였다고 한다. 물론 구체적인 문헌이나 사료를 통해 점검한 자료는 아니기 때문에 단정 지어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이나 일본, 중국 등지에서 행해지는 테이프커팅 의례도 서구의 리본커팅 세리머니를 수입하여 확산시킨 것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남도뿐만 아니라 동양권에서도 매우 광범위하게 행해진 의례의 일종임을 주목할 이유다. 그 역사는 매우 깊고 넓다. 지면상 많은 이야기들은 따로 해야겠기에 일본의 사례만 압축하여 소개한다.



일본 큐슈 '스와진자(諏訪神社)' 탯줄 자르기 축제

내가 2013년에 답사하고 논문화한 글을 인용해 본다. 이 답사는 김영균 박사(탯줄코드 저자)가 정보를 제공하고 동행하였다. 가나가와대학교 김태순 특별연구원도 함께 참여하였다. 축제는 마을의 서북쪽에 위치한 스와진자(諏訪神社)에서 시작하고 또 마무리한다. 삼본승 왼새끼줄을 꼬아 스와진자(諏訪神社)에서 간단한 의례를 마친다. 이후 시메나와를 수레에 태워 메고 마을 한길을 행진한다. 마을 입구에서 음식을 나눠먹는다. 다시 행진하여 큰길가의 도조신(道祖神)을 모신 신성권역으로 나간다. 집사들은 길가로 나간다. 다케오(竹雄)지역으로부터 오는 자동차를 세워 새끼줄을 자를 사람을 찾는다. 일본의 아기 낳는 풍속(産俗)에서 탯줄을 자를 때 대나무를 사용하는 것과 연관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고대 산속(産俗)에서 탯줄 자르는 도구가 대나무였다가 농경(수확)마쯔리로 변하면서 낫으로 대체되었을 것이라는 가설이다.



왜 다케오 총각을 불러 세워 새끼줄을 자르게 할까?

수대의 차를 세워 협조를 구한 뒤 다행히 청년 세 명이 탄 차가 협조에 응해왔다. 집사들을 따라 온 청년 중 한 명이 시메나와 앞에 앉아 신캉(신직(神職), 신관(神官), 신사(神社)를 대표하는 신주(神主)를 말함)이 주는 낫을 들고 시메나와를 자른다. 신캉(神官)은 연이어 술을 청년에게 따라준다. 낫을 돌에 문질러 줄을 쉽게 못 자르도록 한다. 여러 가지 농담으로 참석자들을 웃긴다. 수십 번에 걸쳐 무딘 낫으로 줄을 자르는데 성공하면 사람들이 환호하고 축제가 끝난다. 잘라진 시메나와는 뒤편 등성이 도조신(道祖神)이 있는 신성권역의 나무에 1년 동안 걸어둔다. 주목할 것은 "올해 결혼하고 아이를 출생하게 될 것"이라는 신캉의 축원덕담이다. 이 축제 자체를 탯줄자르기라고 표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탯줄자르기의 은유들

탯줄자르기를 은유할 필요도 없이 직유하고 있는 축제와 의례들도 무수하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졸고 '아마미오시마 풍년제와 유이 마쯔리(비교민속학)'를 참고하기 바란다. 교토의 기온마쯔리 등 자세한 소개를 해뒀다. 그렇다면 남도지역이나 한국에서 이 줄 자르기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을까? 매년 정월 초하루에서 이월 초하루까지는 한 해를 시작하고 준비하는 의례기간이다. 이 기간에 당산목을 감았던 지난해의 줄다리기 줄을 잘라서 집집마다 나눠 갖는 정도의 형태로도 나타난다. 지역별로 문화권별로 사뭇 다르다. 이런 저런 의미를 부여하여 의례를 행하는 것은 모두 '시작'이라는 데 방점이 있다. 이 시작은 무엇인가의 죽음을 통해 즉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치 어머니의 뱃속 그 캄캄한 암흑의 우주에서 탯줄을 자르고 광명의 세계로 나오는 출생과도 같다. 나를 감쌌던 태반을 매장하거나 화장하여 장사지내는 이치와 같다. 그래서 사람들이 안태(安胎)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것은 나를 감쌌던 이전의 세계를 매장하거나 화장했던 땅, 그래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내 시작의 정체에 대한 질문에 다름 아니다. 끊임없이 마음을 가다듬고 새로운 시작을 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리본커팅 세리머니와 같은 것이다. 정유년이 시작되었다. 나의 안태 고향은 남도다.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의 안태고향은 어디인가?

남도인문학 TIP - '시작' 알리는 다양한 의례들

정월대보름의 줄다리기와 탯줄 자르기

정월대보름이든 팔월한가위든 달에 대한 관념이 음성(陰性)원리이고 여성을 의인화한 다산(多産)과 풍요(豊饒)의 의미임은 한ㆍ중ㆍ일 뿐만 아니라 인류문화 공통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한국의 대보름 줄다리기와 일본의 8월 15일 줄다리기는 시기는 달라도 기원(祈願)맥락은 동일하다고 봐야한다. 세계적으로도 이것은 달-비-풍요-여성-뱀-죽음-주기적 재생을 하나의 주술적 체계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을 한 해 농ㆍ어업에 대입하면 풍농이나 풍어의 기점이고 한 삶에 대입하면 출생의 기점이 된다. 우리가 태어났을 때 금줄을 치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을 새로 짓거나 무슨 모임을 만들어 리본커팅 세리머니를 하는 이유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반도의 금줄권역과 줄다리기권역이 한강 이남으로 거의 유사하다는 기왕의 보고들을 재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인류문화사를 관통하는 탯줄 자르기 모티프에서 나온 의례들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영균이 쓴 '탯줄코드-새끼줄, 뱀, 탯줄의 문화사'(민속원)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줄다리기와 줄 자르기, 시작의 의례들

신성한 줄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 모티프가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작'이란 의미로만 보더라도 오늘날까지 광범위하게 행해지는 테이프커팅(Tape cutting on opening ceremony or opening ritual)은 이른바 탯줄 자르기 모티프에서 찾을 수 있는 의례다. 그것이 건물이든 행사든 새로운 출발을 할 때는 응당 테이프커팅을 통한 오픈식을 의례화 하고 있는 살아있는 풍속을 눈여겨 볼 이유다. 줄 자르기만이 아니라 줄다리기 또한 당산목이나 입석에 감아 새로운 한 해의 풍요와 다산에 대한 기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뱀이나 용, 닭뿐만 아니라 상상의 동물들까지 창조하면서 풍속 및 철학으로 확장되어 나왔다. 동양과 서양 혹은 각 나라 문화권들이 양상은 다를지라도 맥락은 유사하다. 인류에게 '시작'이라는 의미가 그만큼 중요했다는 뜻일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 설명은 차후를 기약한다. 남도민속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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