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가 청춘 바쳐 일군 제재소, 사명감으로 명맥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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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父子가 청춘 바쳐 일군 제재소, 사명감으로 명맥 유지"
설립 55주년 광주 최초 '대인제재소'
부친이 세운 제재소 아들이 자동화 구축ㆍ매출 신장
입지 좁아진 국내 제재산업, 광주 단 3곳만 운영 중
단가ㆍ입찰 경쟁 퇴보에 "市 등 행정기관 도움 절실해"
  • 입력 : 2017. 03.01(수) 00:00
광주지역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대인제재소는 고(故) 박성준 대표가 1962년 5월 대인동에 자리를 잡았다. 사진은 광주 광산구 장덕동으로 사업장을 옮긴 대인제재소에서 2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박현진 대표가 생산된 목재를 설명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대인제재소 작업장 내부 모습.
광주지역에서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2대째 제재(製材ㆍ베어 낸 나무로 재목을 만듦)업을 잇고 있는 향토기업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제재업이 침체기에 접어든 가운데 지역에서 유일, 대를 이어오고 있는 대인제재소 박현진(58) 대표가 주인공이다. 1962년 5월 박 대표의 부친인 고(故) 박성준(1924년생) 대표가 광주에 처음으로 세운 대인제재소는 올해로 설립 55년째를 맞았다.

박 대표는 지난해 4월 광주지방국세청 초청으로 '50년 이상 사업을 이어온 10개 명문 장수기업'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날 초청된 기업은 남화토건㈜, ㈜대유에이텍, ㈜SH에너지화학, 백광산업㈜, 광주어망, 화신볼트, 제일콘크리트 등 대인제재소 포함 10곳이었다.



●父가 세우고 子이 대를 잇다

박 대표는 대인제재소의 55년 역사를 알려 달라 하자, 부친이기에 앞서 대인제재소의 설립자인 고 박성준 대표를 가장 먼저 회상했다.

박 대표는 "(아버지는)일제 시대 당시 광주상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곧장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재 회사를 다녔다고 했다"며 "차근차근 목재일 배운 것을 토대로 광주 대인동에 지금의 대인제재소가 문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명칭은 대인동에 처음 문을 열었다고 해서 '대인제재소'라 정해졌다.

당시 대인제재소 자리는 현재 대인동 제일산부인과의원 일대 1322㎡(약 400평) 규모로 세워졌다.

그때만 해도 100% 국산 목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물류ㆍ유통 등에 어려움은 없었다고 한다. 주로 목재 운송수단이 기차와 버스 등이 많아 당시 대인동 구 공용터미널과 광주역을 이용해 목재를 운반해왔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박 대표는 1983년 경영 수업을 받기 위해 대인제재소에 들어와, 지금까지 30여 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친이 대인제재소를 기초부터 탄탄하게 다듬었다면, 박 대표는 시대 흐름에 맞춰 현대ㆍ자동화 구축을 통해 대인제재소를 발전시켰다.

현대ㆍ자동화 시스템을 도입함에 따라 인력은 부친이 운영할 당시보다 3분의 1 가량으로 많이 줄었지만, 능률은 배로 올랐다. 1980~90년대만 해도 사람이 전부 목재를 운반하는데, 이제는 지게차와 트럭 등을 통해 쉽게 운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세월이 흘러 이제와 생각해보면 청춘을 아버지의 회사에서 다 보냈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가업을 잇기 위해서라기보단 경영 수업을 받으려 했다"며 "그래도 제재소를 자동화 시스템으로 바꾸는데 큰 몫을 했고 매출액도 많이 올려 가족들 부양하는데 보탬이 됐다"고 설명했다.



●광주서 가장 오래된 제재소 '우뚝'

1985년 대인제재소는 대인동 사업장에서 현재 산단이 밀집돼 있는 광산구 장덕동 인근 3035㎡(약 1000평) 규모로 확장ㆍ이전했다.

사업 초기에는 지역에서 유일했기 때문에 전통 가옥, 특수목 등 전 분야에 걸쳐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다. 한창 제재업이 부흥하던 때만 해도 광주에 제재소는 10여 곳, 지금은 대인제재소를 비롯해 본촌공단에 금남제재소와 광림제재소까지 총 3곳 뿐이다.

현재 대인제재소 연 매출액은 약 25억원이다. 제재업이 발달한 군산ㆍ인천을 비롯해 서울 수도권에 비해 낮은 편이지만, 지역에서 오래된 유일한 제재소 치곤 규모가 꽤 큰 편이다.

박 대표는 "국내 제재소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제재목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진데다 인력 부족ㆍ해외산지국의 원목 수출 제한 등에 따라 국내 제재산업의 경영난이 가중되기 때문"이라며 "최근에는 사양산업으로 치부받기 시작하면서 제재소를 과감히 접는 곳도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박 대표는 전 분야에 걸쳐 사업 영역을 확대했던 과거와 달리 1997년부터 특수목 분야에만 주력하기로 했다. 아파트ㆍ고층 건물 등에 사용되는 목재를 생산, 지역 건설업체에 납품하고 있다. 납품량만 보더라도 대인제재소가 차지하는 비율은 60%에 달한다. 과거에는 제재업에 사용되는 목재가 100% 국산이었지만, 10여 년 전부터 100% 수입목을 사용하고 있다.

목재는 활엽수와 침엽수 등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대부분 침엽수를 활용하고 있다. 침엽수 중에서도 나왕 나무를 주로 사용되는데, 견고할 뿐만 아니라 현판으로 사용할 때 심플한 멋을 느낄 수 있어서다.



●경쟁력 승부는 "사명감 가져야"

아버지가 일궈 놓은 제재소를 아들이 물려받아 55년째 이어오고 있는 대인제재소는 3대째 이어갈 수 있을까.

100년 이상 장수기업, 3~4대 등 후대에 걸쳐 가업을 오랜 기간 이어오고 있는 일본 등 선진국과 달리, 국내 또는 지역 현실은 힘든 부분이 많다.

박 대표는 "과거와 달리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지만 제재업의 부흥은 '옛날에는 잘 나갔지…' 이런 식으로 과거형이 돼버린 지 오래됐다"며 "단가 및 입찰 경쟁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지역 기업은 수도권 기업에 밀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품질 면에서 월등하게 지역 기업에 생산한 제품이 좋아도, 업체는 낮은 단가를 제시한 기업을 선택할 수 없다는 얘기다.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지역 기업과 손을 잡고 일하면 좋다. 하지만 입찰 공고를 올리는 즉시 타 지역 기업에서 똑같은 품질임에도 불구하고 낮은 단가로 승부를 걸고 있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업체 입장에서는 이윤을 더 많이 낼 수 있는 기업을 택할 수 밖에 없다는 것.

박 대표는 "군산이나 부산, 인천 같은 경우는 인근에 항구 등 운송수단이 많아 물류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다. 하지만 광주만 해도 원목을 가져와서 생산하고 다시 운반하게 되면 그 비용 자체가 다른 곳보다 배로 들기 때문에 경쟁력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경쟁력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이 팔고 많이 이윤을 남기는 것'인데, 이는 행정기관의 도움도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했다. 제재소는 광주에 단 3곳 뿐이지만, 제재업과 마찬가지로 목재업도 사양산업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계림동 건축자재거리 활성화도 절실하다고 했다.

박 대표는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향토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저희 대까지만 하더라도 경쟁력에 밀리지 않도록 타 지역 기업과는 차별화 된 전략을 세워 사명감을 갖고 일하겠다"고 밝혔다.

글ㆍ사진=주정화 기자 jhjo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