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롱하롱 꽃 졌다고 설워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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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하롱하롱 꽃 졌다고 설워 말자
  • 입력 : 2017. 05.10(수) 00:00



또 한 차례의 봄을 보낸다. 지천으로 피어 우리를 황홀케 했던 수많은 꽃들은 이제 자취를 감췄다. 아쉽다. 아니, 영랑이 노래했던 찬란한 슬픔인지도 모르겠다. 봄 언덕 끄트머리에 서서 이형기(1950~2005)의 '낙화(落花)'를 생각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 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 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이 계절에 어울리는 시다. 사삭스런 얘길 좀 해야겠다. 아마 10여일 쯤 됐겠다. 창 밖 꽃 지는 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 3시다. 평소 좋아하는 시인의 시집을 꺼내들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자다 벌떡 일어나 궁상(?)을 떨고 있는 나를 올려다보며 아내는 눈을 흘겼다. '당신이 아직도 문학청년인 줄 아느냐'는 투였다. 글쎄, 틀린 건 아닌 듯싶다. 요즘 갱년기를 지나는 길목에서 생각이 많아진 건 사실이다. 불현 듯 문청시절이 그립다. 한때는 붉은 칸의 원고지만 보아도 가슴 시린 적이 있었다. 어느 두메산골 여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고 싶었고,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시인이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순을 앞둔 지금, 어느 것 하나 이룬 것 없이 그저 세월만 축낸 것 같다. 하지만 시를 읽는 가슴은 예나 변함없었다. 뜨거웠다. 40여년 만에 맛보는 쾌감이랄까. 아직 내게도 시집을 움켜쥐고 밤을 지새울 수 있는 열정, 그 '문학의 불씨'가 사그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집을 넘기며 그날 밤은 그렇게 지샜다. 꽃의 떨어짐, 그것은 마치 만행(萬行)을 떠나는 수행자의 뒷모습을 연상케 했다. 미련 없이 돌아서기 때문에 낙화(落花)엔 구차함이나 요사스러움이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왜 아쉬움이야 없겠는가. 굳이 문학적 감수성을 지니지 않았더라도 꽃 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하거나 반길 이는 없을 터이다. 꽃이 진다는 것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행위이며, 또한 슬픈 일이다. 때문에 이별의 뒤끝은 언제나 등 뒤를 허전하게 만들고, 수많은 날들로 하여금 눈물 돌게 한다. 그러나 이형기 시인의 말처럼 가야할 때를 분명히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은 아름답다. 제 때에 떠나감은 말끔하고 쾌적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사이클을 보면 오묘하면서도 재밌다. 새잎이 돋고, 줄기가 힘차게 뻗고, 꽃이 피고, 나비와 벌이 꽃잎에 맴돌고, 비로소 어느 아침에는 꽃이 하롱하롱지고, 꽃의 서사를 구구절절 기억하며 열매가 맺히는 현상 등은 조화롭기만 하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이 같은 자연의 운행에서 자유스러울 수 없다. 이처럼 자연은 변화무쌍하거니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게 우주의 섭리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꽃이 진다하여 마냥 슬퍼할 일만은 아닐 것 같다. 이 논리대로라면 꽃이 진 빈자리에 반드시 그 무엇인가 채워지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빈자리를 열매라는 상징물을 통해 영원불멸의 진리를 확인해주고 있다. 봄밤이 깊어진다. 이 시간 수많은 꽃들이 피고 지며 아픔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듯이, 우리의 가슴에도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슬픔이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그 아픔과 슬픔의 빈자리는 반드시 감동과 희열로 채워질 것임을 나는 믿는다. 그래서 사라지는 것은 모두 아름답지 않다던가. 지상에 없는 몇몇 얼굴들이 그립습니다.

김선기 강진군 시문학파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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