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에만 의존않는 자생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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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공프로젝트
지원에만 의존않는 자생력
어르신들이 앞장선 공동체
2017 공ㆍ프 투게더광산나눔문화재단상임이사 강위원
  • 입력 : 2017. 06.05(월) 00:00
한총련 의장 때 국보법에 걸려
4년2개월 감옥에서 복지 공부
고향 영광서 '여민동락' 결성

어르신들에 꿈 뭐냐 물었더니
눈물 글썽이며 "죽는날 기다려"
불편한 어르신에겐 '돌봄복지'
건강한 어르신에겐 '일자리'
주민들에겐 '건강한 마을' 선물
경제ㆍ교육ㆍ문화 융합하는
공동체 건설에서 해답 찾아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전국 지자체 잇단 벤치마킹


작가 루쉰은 '애초에 길은 없었다. 한 사람, 두 사람이 걸어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했다.

10년간 묵묵히 걸어오며 길을 만든 이가 있다. 강위원(45)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상임이사다.

그는 '노인'을 새로운 공동체 운동의 주체로 복권시킨 장본인이다. 그의 젊은시절 삶은 평탄치 않았다.

광주 서석고 3학년 당시 전교조 교사 구속 반대집회를 하다 제적된 뒤 6개월 감옥생활을 했다.

지난 1997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의장이던 그가 4년2개월의 수형생활을
마친 뒤 과거의 운동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공동체운동의 모델을 만드는 일에 주력했다.

지난 2006년 고향인 영광 묘량으로 귀향해 노인들과 이듬해 마을공동체 '여민동락'을 만들었다.

지난 2011년부터 광주 광산구에서 노인들이 주체가 되는 도시형 공동체 '더불어락노인복지관' 모델을 선보였다.

노인복지관장에서 물러난 뒤 지난해 2월부터 광산구청과 시민이 함께 만든 나눔문화공동체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한해 강연 200회 이상을 하는 사회복지ㆍ노인복지계 스타강사로 자리매김 됐다.

광주 광산구 KTX 송정역 맞은편 사무실에 들어서니 강 상임이사가 선한 웃음으로 반긴다.

박박깎은 머리 때문일까. 오랜 종교생활을 한 수도자 분위기가 풍긴다.

넉넉한 미소로 그가 걸어온 삶의 족적을 들려줬다.



-학생운동가에서 사회복지사로 변신이 가능했는가.

△제일 많이 듣는 질문이다. 복지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한총련 의장으로 구속돼 감옥에 있을 때였다. 출소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처음 갇힌 다른 입소자들과 달리 두번의 감옥생활 덕택에 생각의 여유가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산업화시대, 민주화시대를 지나 복지시대가 열릴 것으로 예상했다. 미래를 준비하기로 마음 먹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지인으로부터 사회복지개론부터 사회복지법제, 사회복지실천 등 관련 교재를 받아 섭렵했다. 거기에서 복지를 통한 사회운동의 길을 보았고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두번의 감옥생활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던데.

△광주 서석고 3학년이던 1989년 광주지역 고교 학생회장들의 연합모임에 갔다가 얼떨결에 광고협(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 의장에 뽑혔다. 전교조 교사 해직에 반대하는 집회를 주도했다. 전남대학교에 광주지역 49개 고교생 1만5000명이 모였다. 그 시위 때문에 그 해 구속됐다. 당연히 학교는 제적처리 됐다. 석방된 뒤 서울로 올라가 식당 배달부, 광장시장 노동자로 막노동 하며 살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1994년 전남대 국문과에 수석합격 했다. 학생운동 근처에도 가지말라던 어머니의 당부를 뒤로한 채 총학생회장에 선출됐고 1997년 한총련(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 의장에 추대됐다. 끝내 그 해 7월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두번째 옥고를 치렀다. 5년 형 중 10개월 감형받아 4년 2개월만인 2001년 7월 석방됐다.



-출소뒤 대구 한 복지관에서 본격 복지업무를 배웠나.

△출소후 대구 달성군 현풍면 효경노인복지원으로 갔다. 4년간 가명 '김지원'으로 활동했다. '돈(金)을 지원해야 한다'는 의미의 김지원이다. 정부지원이 없어 후원금이나 자원봉사자를 발굴하며 활동했다. 전국 복지재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창의적 사업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때 외친 구호는 '왼손엔 수첩을, 오른 손에 걸레를, 입가엔 미소를'이었다. 수첩을 들고 주민의 뜻을 경청하고, 걸레를 들고 누추하고 후미진 곳으로 들어가고, 입가에는 늘 미소로 화답하자는 모토였다. 덕분에 그곳에서 부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다.



-마침내 고향인 영광 묘량에 둥지를 틀었는데.

△맹자의 '여민락(與民樂ㆍ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린다)'에서 이름을 딴 '여민동락'은 학생운동을 하던 젊은 청년 부부 3쌍이 귀촌해 2007년 귀농한 뒤 이듬해 5월 설립한 노인복지시설이다. '중심보다 변방으로, 작게 곳곳에 시작하자, 지역사회를 변화시키자'는 모토였다. 건평 175㎡(53평) 규모의 건물 2개 동을 지어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 청소하고 빨래해주는 등 방문요양 활동과 주간보호센터를 시작했다. 1년간 빈집에서 생활하며 인구조사, 교통량조사 등을 통해 농촌에서 '수혈복지'가 아닌 '지속가능한 복지'를 설계했다. 외부 자원으로 노인을 모시는 수준이 아닌, 농촌의 경제, 교육, 문화를 되살리고 융합시켜 공동체를 꿈꿨다. 학교 살리기운동, 협동농장, 협동조합, 사회적 경제 등을 통해 농촌에서 활력을 되찾았다. '작게 곳곳에 모델을 만들자'는 의미로 시작한 사업은 전국 자치단체의 새로운 복지모델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여민동락을 운영하면서 했던 다짐은 뭐였나.

△어떻게 하면 공동체의 관계와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 마을살이를 통해 삶이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여민동락은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에게는 돌봄 복지를, 건강한 어르신들에게는 스스로 생활이 가능할 수 있도록 행복 일자리를, 지역 주민들에게는 건강한 마을과 바른 이웃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힘을 보탰다. 그것이 바로 마을 생태계의 원칙이자 복지의 정도라 생각했다.



-공동체라고 하면 어렵고 거창한 의미로 들린다.

△공동체라는 게 뭐 있겠나. 사람살이엔 공식이란 없다. 뜻이 만나면 길을 열어갈 뿐 서로 존중하며 배려하고 맞춰가는 것 말고 어떤 묘책도 없다. 날마다 낮아지고 날마다 실패하며 나아가는 일이 공동체의 길이다.



-마을 사람들과 만났을 때 받았던 느낌은 어땠나.

△마을 어른을 찾아가 얘기하던 중 꿈을 물어봤다. 꿈이 뭐였느냐고. 눈물을 글썽이더라. 팔십 평생을 살았어도 꿈을 물어봐 준 사람이 없었는데 라면서. 그러면서 '어디 꿈을 꾸고 살았것는가. 살려고 살았제. 일만 하다 늙어버렸지. 죽을날만 기다리면서 경로당과 집만 오가고 있다'고 하더라. 어르신들을 곁에서 지켜주면서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조그마한 역할이라도 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농촌은 도시에 비해 소외됐는데

△오늘날 농촌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이다. 빈곤율이 50%에 육박한 노인들의 삶은 더욱 어렵다.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고 예우받기보다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존재였다. 농촌에서 살아가는 노인들의 삶은 더욱 각박하다. 공공성은 사라지고 복지가 곧 돈이 되는 세상에서 국가와 사회는 어르신들의 존엄한 삶을 지켜주지 못한다. 인생의 종반전을 보내고 있는 그들이 겪는 삶의 위기는 곧 있으면 닥칠 미래의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국가와 사회가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농촌이란 어떤 곳이라 생각했나.

△극단적인 양극화와 불평등이 지배하는 곳이다. 공공성은 고사하고 시장이 제공하는 흔한 서비스마저도 접하기 어려운 곳. 단순한 생활의 불편함을 넘어 당장의 생존조차 위협을 받을 수 있는 곳. 의료, 교육, 문화, 교통, 복지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는 곳. 거듭되는 인구유출과 고령화로 마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한 농촌은 전원의 로망 대신 생존의 치열한 사투가 일상화 된 곳이 농촌이다.



-더불어락노인복지관 운영 사례가 전국 자치단체 벤치마킹 되고 있다.

△여민동락 공동체는 농촌형이었기에 도농교류형 거점으로 광주 광산구에서 집을 찾고 있었다. 그 때 대학선배인 현 민형배 광주 광산구청장으로부터 노인복지관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농촌에서 내 돈으로 작은 집을 지어 복지를 시작한 사람이 볼 때 광산구노인복지관은 큰 집에, 많은 직원이 있고, 적지 않은 예산이 있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열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지난 2011년 2월 더불어락 노인복지관장에 부임하자마자 복지관 이용 어르신들을 면담하고 프로그램을 전면 개편했다. 어르신들이 노후와 복지관 분위기를 스스로 바꾸는 자치를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 변화의 핵심이었다.



-복지관장을 맡기 시작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관 중심의 복지관이 아닌 민간중심의 복지관으로 운영하기 위해 이름부터 '더불어락(樂)노인복지관'으로 바꾸고 어르신과 더불어 사는 길을 실천했다. 사회복지사 등 직원들이 복지활동가로 변화되면서 대한민국의 노인복지를 넘어 마을공동체 운동의 산실이 됐다. 복지관이 정한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던 어르신들은 회의를 갖고 역할을 분담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2011년 외부의 도움 없이 만든 북카페를 바탕으로 이곳 어르신들은 광주전남 제1호 협동조합 '더불어樂'을 결성했다. 두부를 만들고, 동지죽과 팥죽을 팔면서 어르신들은 일자리를 만들고, 2013년부터 2015년 말까지 총 4억8487만원의 매출도 올렸다. 어르신들은 '더불어락 대동회'를 결성해 복지관 운영도 직접 한다. 성과가 쌓이면서 더불어락 복지관은 어르신만이 아닌 인근 주민까지 함께 하는 복지 거점으로 성장했다. 광주시교육청은 지난 2014년 더불어락 노인복지관 사례를 광주지역 초등학교 4학년 1학기 사회과 교과서에 수록했다. 중장기계획을 세우고 활동기록을 전국에 전파시킨 결과였다.



-농촌 주민들과 도시민들의 성격이 전혀 달랐을 텐데. 어떻게 적응했나.

△부임하니 제일 말썽 많은 노인들이라면서 복지관에서 13명의 '블랙리스트'를 보여줬다. 집있고 연금 받는, 사장님이나 학교장 출신들이었다. 왜 블랙리스트였을까 봤더니 사회에서 대접 받던 분들인데, 복지관만 오면 유치원생 취급을 받았던 거다. '한 줄로 서시구요 식판 드시구요, 식권은 끊으셨나요' 왠지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에 화를 내곤 했다. 자존감을 지킬 여지가 없었던 거였다. 시대의 피해자들 아닌가. 대우를 해주기로 했다. 복지관 모토가 '꼰대에서 원로로'였다. 그렇게 대접했더니 바뀌었다.



-지금까지 사례로 볼 때 꿈도 클 것 같다.

△여민동락을 시작할 때 애로사항이 가족이 살아갈 수있는 거주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귀농귀촌 예정자들에게 첫번째로 농촌청년사회주택을 제공해주는 일을 하고 싶다. 일본의 경우를 보더라도 청년이 돌아오는 농촌을 만들기 위해 지원해주는 사업이 주택 임대였다. 두번째는 농촌형 청년배당정책을 추진하고 싶다. 교통비, 보육 확대 등을 위한 지원이며 별도생산활동도 병행할 수 있다. 세번째는 단독이 아닌 집단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지원정책을 만들고 싶다. 경남 남해, 경북 상주 등에서 보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귀농귀촌 정책이다. 이러한 정책들이 펼쳐질 때 도시민들의 농촌이주가 훨씬 더 자유로울 수 있다. 앞으로 이 부분에 역점을 두고 복지정책을 연구해 갈 생각이다.



-최근 귀농ㆍ귀촌인구가 늘고 있다. 예비 귀농ㆍ귀촌인들에게 조언한마디 한다면.

△넉넉한 마음으로 마을주민들과 함께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사람은 좋은데 함께 살기엔 부적격인 사람, 농촌엔 왔는데 도시인 껍질을 안 벗고 사는 사람, 민주주의를 말하는데 민주주의자는 아닌 사람, 입 주장은 센데 몸 실천은 약한 사람, 뿌리를 내려야 하는데 딴 곳을 기웃거리기 일쑤인 사람, 자신의 저력은 평범하면서 동료들이 일궈 온 역사를 쉽게 보는 사람, 침묵의 성실이 초년생 비법인데 논쟁과 판단이 실력인 줄 착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결국 실패한다. 욕심내지 말고 이웃과 함께 한다는 생각을 갖춰야 한다.



얘기를 마친 강 상임이사가 서둘러 자리를 뜬다. 마을복지 벤치마킹을 하러 온 서울 성북구의회 의원들을 만나러 가야 한다며 웃는다. 국가에서 마을로, 통치에서 자치로, 관치에서 협치로, 개인에서 공동체로 지향하겠다는 꿈을 품은 강 상임이사의 뒷모습이 든든해 보인다.

글=박간재 기자ㆍ사진=김양배 기자






강위원은>

2008년 5월~ 2017년 2월

여민동락 공동체 대표

2010년 11월

광주전남기자협회 오피니언리더 100인 선정

2011년 2월~2016년 1월

광산구 더불어락노인복지관장

2011년 12월

전남도지사 표창

2013년 10월~

現 투게더광산 나눔문화재단 상임이사

2017년 1월~

現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

2015년 10월

보건복지부장관상 표창

2016년 11월

전국시군구청장협의회 주관 지방자치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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