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ㆍ은행ㆍ신사ㆍ우편소… "영산포는 작은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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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학교ㆍ은행ㆍ신사ㆍ우편소… "영산포는 작은 일본"
재팬로드-<9> 나주 근대건축물
33만평 소유 대지주
쿠로즈미 저택 등 남아
  • 입력 : 2017. 08.29(화) 00:00
일제 강점기 작은 일본이나 마찬가지였던 나주 영산포지역 최대 지주였던 쿠로즈미 이타로의 저택. 전형적인 일본 농촌 주택으로 각종 자재를 일본에서 직접 공수해 건축했다.
일제 강점기 영산포 등 나주는 실상 작은 일본이었다. 일본인 지주와 학교, 각종 국가기관이 영산포 읍에 즐비했다. 지금도 일본 오사카에는 '나주 모임'이 있을 정도다. 어린 시절 영산포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이 모임을 만들고 가끔 나주를 방문하기도 한다.

일본인들이 영산포에 들어 온 것은 1902년부터다. 전남의 중심지 나주와 가깝고, 영산강 수운의 요지인데다, 미개발지라서 매력이 넘쳤다. 나주와 영산포는 3.4㎞ 거리에 불과하다. 영산포에 정착한 일인들은 점차 나주읍으로 진출해 상권장악에 나섰다. 우선 신작로를 낸다는 구실로 나주읍성을 철거했다. 영산포에는 우편수취소(1903), 영산포 일본인회(1906), 일인소학교(1907), 영산포 헌병부대(1909), 일본 신사(1910), 광주농공은행 영산포지점(1910) 등 여러 식민기구들이 설치됐다. 1930년에는 영산포 시가지가 나주 시내보다 더 커지는 역전 현상이 발생했다. 1940년대에 이르면 나주는 일제 수탈이 극심해지는데, 당시 영산포 읍사무소에는 일장기가 새겨진 현판에 '국가총력의 발휘'와 '국민정신의 앙양'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태평양 전쟁의 물자를 대는 총력 동원의 기지가 된 셈이다.

일제 강점기 나주 역사를 볼 수 있는 곳이 영산포 다리 막 건너 오른편에 자리잡은 일본 지주 저택이다. 널찍한 마당과 정원,청기와에 2층형 구조, 다다미가 깔린 방이 한눈에 일본풍임을 알수 있다. 나주에서 가장 큰 지주였던 쿠로즈미 이타로(黑住猪太郞)가 살던 집이다. 1935년 일본 농촌 주택을 본떠 만들었는데, 일본에서 직접 목재와 기와 등 건축 자재를 들여왔다. 쿠로즈미는 1905년 영산포에 도착해 불과 4년만인 1909년 영산포에서 제일가는 지주가 됐다. 1930년에 논, 밭 등 총 1098정보(33만여 평)를 소유했다고 한다. 또 조선 가마니 주식회사 사장, 다시 수리조합장, 전남중앙영농자조합장 등 사업가로도 활동했다. 해방 후 적산가옥으로 선교사가 불하, 고아원으로 운영했고, 1981년 개인이 매입해 주택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나주시가 2009년 근대건축물 역사보존 차원에서 사들여 찻집과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쿠로즈미가 영산포에 들어 온 것은 일본의 수탈 정책의 일환이었다.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은 "일본은 토지와 자원 수탈을 목적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 출장소를 세워 나주평야의 쌀을 수탈하고자 했으며, 일본인들의 영산포 이민을 적극 유도함으로써 자주와 상인 등 많은 일인들이 영산포에 정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런 식민정책 결과 1930년 나주군 조선인들의 1인당 소유 토지는 310평인데 비해 일본인은 1만10평에 이르렀다. 영산면의 경우 전체 토지 5880 정보 중 일인 소유가 74.3%였다. 1정보는 9917.4㎡, 즉 3000평이다. 당시 동척 목포지점은 나주 등지에서 9031정보(2700여만 평)를 소유했고, 나주에는 동척 외에도 동산농장, 카마타 주식회사, 조선실업주식회사 등 일본인 농업회사들이 진출했다. 이 무렵 나주군 인구는 14만6686명으로 일본인이 3425명, 중국인 69명이었다.

영산포 근대사를 보려면 영산동 홍어의 거리 '영산포 역사갤러리'를 찾으면 된다.

일본은 나주 일대 이주민들의 사업자금 대여를 위해 1908년 광주 농공은행 영산포 지점을 연다. 그러나 10년 후 이 농공은행을 모체로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되는데 영산포 사람들은 이 건물을 '식산은행'이라고 불렀다. 2012년 9월 나주시가 매입하여 2015년 영산포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 갤러리로 조성했다.

영산포에서 나주읍(곰탕거리 금성관)으로 나가는 길에 붉은 벽돌집 2층 건물을 만날 수 있다. 옛 나주경찰서(등록문화재 34호)인데, 한일 병탄해인 1910년 일본이 세웠다. 나주에 1910년 경찰서가 들어선 것은 집단 이주한 일본인의 보호와 동학 항쟁 등 이 일대의 치안 유지 차원이었다.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2층 건물로 창문과 출입구 등 건물의 외관상 중요한 부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했다. 수직성을 강조한 단순한 형태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이 민족 운동가들에게 잔인한 고문을 자행했던 곳이다. 특히 1929년 일본 경찰은 학생 시위 당시 광주에서 응원대까지 불러와 학생시위를 진압했고, 학생들을 연행 모진 고문을 했다. 해방 후에는 이념의 대결장으로 건준위원들이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치렀다.

옛 나주경찰서 앞길을 따라 죽림동으로 가면 엣 나주역사(驛舍)를 볼 수 있다. 학생독립운동기념관과 붙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주역사는 1913년 7월1일 호남선 개통에 따라 신축한 근대건축물이다. 1923년에 북쪽 벽에 화물 창고 4평을 증축했다. 다만, 1970년 일본 기와를 슬레이트로 바꾸고 역사 건물 외부에 있던 개찰구를 건물 내부로 바꾸었다. 현재 역사의 기본 구조나 골조 목재 등은 초창기 그대로라고 한다.

나주역사는 1929년 10월30일 오후 4시께 나주 통학생과 일본인 학생 사이에 다툼이 되어 일어난 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일명 '나주역 댕기머리 사건'이다. 통학 기차 안에서 후쿠다와 다나카 등 일본인 중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 박기옥, 이광춘, 이금자의 댕기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했다. 이를 본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가 일본인 학생에게 주먹을 날려 한바탕 싸운게 첫 발단이었다.

다만,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자료에는 나주역 개찰구를 빠져 나오던 일본 학생 중 한 명이 한국인 여학생을 밀치면서 다툼이 시작됐다고 기술하고 있다. 댕기머리 사건은 하나의 설로 보고 있다. 한ㆍ일 학생들의 갈등은 31일, 11월1일에도 계속 다툼이 이어졌다가 2,3일 께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광주, 나주 등 전국 및 해외 154개교 5만4000여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로 일제하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나주는 일제 수탈과 항일의 도시다. 거기에는 일제 잔재의 근대건축물과 지주의 수탈에 항거했던 농민들의 소작쟁의, 항일의병, 동학, 학생독립운동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일제 잔재는 일본인에게는 유년의 기억을, 항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준다.


글ㆍ사진=이건상 기획취재본부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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