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의식없고 대소변 못 가리는 중상자 이튿날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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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의식없고 대소변 못 가리는 중상자 이튿날 사라져"
5ㆍ18 당시 광주교도소 의무과 민경덕 교도관 인터뷰
5월21일 군용트럭에 부상자 50여명 실려와… 창고에 수용
의료진들 화상ㆍ총상 중상자 치료 계엄군들이 엄격히 통제
  • 입력 : 2017. 09.11(월) 00:00
지난 6일 전남일보 취재진과 만난 민경덕 전 교도관이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교도소에 연행된 시위대의 치료 실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즉시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될 정도의 위중한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시설도 없고 의료진도 턱 없이 모자라 응급처치만 했지."

1980년 5ㆍ18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교도소 의무과에 재직했던 민경덕(69) 전 교도관은 전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80년 5월 참혹했던 교도소 내 시위대 치료 실태를 밝혔다. 민 전 교도관은 본보가 입수한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 문건을 작성한 광주교도소 의무과에 근무하고 있었다.

민 전 교도관에 따르면 '치료현황' 문건은 당시 추가 예산 확보차원에서 내부결재용으로 작성됐다. 80년 5월21일부터 그해 6월26일까지 치료받은 체포자 연인원과 사용 의약품 및 수량, 비용이 구체적으로 적혔다.

● "체포자들 군용트럭에 실려왔다"

민 전 교도관의 증언과 당시 '치료현황' 문건에 의하면 광주교도소에 시위대가 연행돼 온 건 80년 5월21일 오후 5시께로 추정된다. 문건상 치료가 시작된 시각은 이날 오후 5시30분.

민 전 교도관은 "석가탄신일(5월21일) 저녁엔가 교도소 면회실 옆 등나무 인근에 군용트럭들이 도착하더니 시위대를 쏟아냈다"고 회상했다.

민 전 교도관은 "트럭 안에는 의식을 잃은 사람들이 최소 50명 이상 피를 흘리며 무더기로 쌓여 있었는데 군인들이 이들은 쏟아내다시피 끌어내렸다. 최루탄 가스 냄새가 지독하게 나서 근처에 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면서 "내려놓고 바람이 조금 부니까 점차 의식을 차리는 이도 있었다. 교도소에 의무실이 존재했지만 이 만한 수를 수용할 수 없어 일단 창고로 옮겼다"고 말했다.

빗자루와 삽, 곡괭이 등 교도소 청소와 시설관리에 필요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였다. 20평 규모의 직사각형 형태 통 건물은 구획을 나눠 청사 청소를 맡는 재소자들에게 일을 분배할 사무실로도 쓰이고 있었다. 부상자 치료를 하기엔 부적합한 장소였지만 체포자들은 군인들에 의해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내팽개 쳐졌다.

● "군인들 통제에 고개조차 못 들었다"

당시 광주교도소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히 통제됐다. 민 전 교도관은 '점령당했다'고 표현했다. 그는 "교도소 외벽에는 군인들이 10m 간격으로 참호를 파고 경계근무를 하고 있었다"며 "5ㆍ18 기간 교도관들도 외출이 금지돼 사실상 감금 상태에서 교도소 내 교회당에서 숙식을 해결했다"고 말했다.

당시 창고에 끌려온 체포자들의 치료는 계엄군이 짜놓은 일정에 의해 이뤄졌다. 교도소 의무과 직원들은 군인들이 호출하면 부상자들이 있는 창고에 들어가 치료를 진행했다.

창고 안에서 군인들의 제약은 더욱 심했다. 군인들은 교도관들이 부상자들과 일체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했다. 민 전 교도관은 "치료도 고개를 숙인 채 진행하게 했다. 주위를 둘러보려 고개를 들면 '뭘 보냐'며 위협했다. 그렇기에 환자 숫자 파악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곁눈질로 본 부상자들은 군인들에 의해 말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 앉아만 있었다. 몸을 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다친 이들은 벽에 기대 있었다. 그들끼리 서로 대화를 하거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도록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치료를 마치고 나면 군인들이 교도소 교무과에 마련된 '조사실'로 데리고 갔다.

● "화상환자 대다수… 총상자도 존재"

민 전 교도관은 5월21일 첫 치료가 있던 날 중증 화상환자가 대다수였다고 기억했다. 그는 "이상하게 화상 환자가 많아서 거즈나 붕대를 많이 썼다. 환부를 보면 다리 같은데는 환부가 넓게 퍼져있는 등 한군데만 다친게 아니라 여러군데에서 화상이 발견됐다"면서 "2~3도 화상으로 꽤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화상환자의 치료를 위해 옷을 벗기려 하면 최루탄 가스 냄새가 훅 풍겼다. 민 전 교도관은 "옷을 조금만 건드려도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을 못 뜰 정도였다"며 "우리도 최루탄 가스가 어떤지는 알지만 그렇게 심하게 나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이 사람들이 최루탄에 범벅이 됐나보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화상 환자가 다수 발생한 것은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로 이송 당시 시위대를 실은 차량에 계엄군이 화학탄을 떠뜨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민 전 교도관은 당시 총상환자도 존재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그는 "총상자로 보이는 이가 있었다. 피를 꽤 많이 흘렸던 것으로 기억한다"며 "마침 리도카인(마취제)을 구비하고 있어 마취하고 봉합했는데 따로 탄환이 나오거나 한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일부 심각한 중상자들은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였지만 사실상 방치됐다. 민 전 교도관은 "첫날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다음날 아침에 가보니 어떤 사람이 몸을 못 움직이니까 그런건지 누운 채로 대소변을 봤더라. 그 정도로 심각한 수준의 부상자가 더러 있었다"며 "다음날에는 그 환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 "전부 중상자인데 의료진 모자랐다"

문건에는 첫날인 5월21일 치료받은 체포자 수가 143명으로 나온다. 시간은 오후 5시30분부터 7시50분까지 1차 치료, 오후 10시부터 익일 오전 1시까지 2차 치료가 있었던 걸로 기록됐다. 총 5시간20분 동안 치료에 동원된 의무직원은 4명 뿐이다. 여기에 군 당국에서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 1명이 나와 치료를 했다.

교도소 직원 중 실제 치료가 가능한 의료인은 의무과장(의사)과 남자 간호사 등 2명 뿐이었다. 나머지 2명은 민 전 교도관과 같이 교정직 공무원으로 업무를 보조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민 전 교도관은 "부상자가 워낙 많으니까 나 같은 경우에도 치료에 투입됐다"면서 "당시에는 교도소 근무를 꺼리는 분위기가 있어 의사들이 의무과에 지원하려 하지 않았다. 우리 교도소 같은 경우에도 상당히 연로한 의사분이 의무과장을 맡고 있었다. 그 만큼 열악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전문의료기관이 아닌 교도소 특성상 중상자들을 치료할 시설이나 의약품도 없었다. '치료현황' 기록에 해열진통제와 소독약 등 기초약품들 일색인 이유다. 민 전 교도관은 "할 수 있는 게 응급처치 뿐이었다"며 "당시 기준에서 보더라도 제대로 된 치료가 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글ㆍ사진=김정대 기자 jdkim@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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