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신의와 충절 지키려… 북향으로 전하는 마음 담긴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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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오로지 신의와 충절 지키려… 북향으로 전하는 마음 담긴 곳
남도정원의 원조 독수정
송태갑의 정원이야기
  • 입력 : 2017. 10.27(금) 00:00
독수정은 전통적 자연풍경식 정원조성 기법으로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기법을 선보였다. 독수정은 이후 원림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담양에서 화순 쪽으로 887번 지방도를 타고 가다보면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취가정 등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유서 깊은 누정들이 광주호 주변에 즐비하다. 그곳을 조금 지나 화순 방향으로 진행하다보면 담양 남면소재지를 통과하는 도로변에 남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그 맞은편을 올려다보면 무등산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산마루 초입부에 왠지 쓸쓸해 보이는 작은 정자 하나가 있다.

'홀로 지키다'라는 의미를 가진 독수정원림이다. 혼자서라도 지키고 싶은 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인근의 누정들이 조선시대 이후 지어진 것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시대에 지어진 독수정은 한 시대를 앞서 지어진 것으로 남도 누정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옛것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요즘, 이토록 가까운 곳에서 고려시대 정원을 만나볼 수 있다니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독수정 원림(獨守亭 園林)은 담양군 남면 연천리(燕川里) 산음동(山陰洞)에 있는 누정과 숲으로 1982년 전남기념물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산음(山陰)이라는 동네 이름이 말해주듯 산 그림자가 짙게 내려 앉아 있어 묵직한 산 내음을 풍긴다.

원림(園林)은 일반적인 수림(樹林)과는 달리 정원 느낌으로 조성되었는데 누정 주인이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하며 나무와 꽃을 심은 곳으로 당시 인위적인 뉘앙스의 정원(庭園)이라는 용어를 대신하여 사용한 말이다.

이곳은 무등산으로부터 길게 뻗어 나와 구릉을 이룬 곳으로 느티나무와 회화나무, 왕버들, 소나무, 참나무, 서어나무 등이 잘 보존되어 주변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거목(巨木)을 이루고 있다.

원림 중앙에 자리한 독수정은 고려 공민왕 때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의 정원이다.

전신민은 아들 오돈과 함께 무등산에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며 처음엔 제계(齊溪)라는 동네에 살다가 산 하나를 넘어 산음동에 터를 잡게 되었다.

전신민은 재계정(宰溪亭)과 가정(稼亭)을 짓고, 조복(朝服)을 입은 뒤 그 정자에 올라 송도를 향해 통곡하며 절을 했다고 한다. 전신민이 나이 들어 두 정자를 오가는 것이 불편해지자, 전오돈(全五惇)은 아버지를 위해 집 앞에 독수정을 지어드린 것으로 전해진다. 전신민은 고려 후기 무신ㆍ절의신(節義臣)으로 호는 서은(瑞隱)이고 본관은 천안(天安)이다. 처부는 대사간(大司諫) 박팽우(朴彭佑)다. 그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그가 고려 공민왕 때 북도 안무사 겸 병마원수를 거쳐 병부상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14세기 중반에 태어나 15세기 초반까지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되고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벼슬을 버리고 그 뜻을 혼자라도 지키겠다고 다짐하며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아침마다 조복(朝服)을 입고 송도(松都)를 향하여 곡배를 올리며 충절을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특이하게도 이 정자는 여느 정자처럼 남향이 아니라 북향(北向)이다.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쇠락해가는 고려를 지켜보면서 매일아침 북쪽 송도를 향하여 허리 굽혀 절하는 간절한 충신의 모습이 그려진다.

독수정(獨守亭)이라는 이름은 이백(李白)의 ‘백이숙제(伯夷叔齊)는 누구인가,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죽었네(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라는 시(詩)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독수정은 1891년(고종 28년) 후손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1915년과 1972년에 중수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정자는 몇 차례 중수를 거듭하면서 변형되어 그 주변의 원림(園林)만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정면과 측면 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과 후퇴(後退)를 온돌방으로 꾸몄다. 정면과 측면 모두 3칸의 중앙에 재실이 있는 팔작지붕으로 비교적 잘 보존된 상태다. 물이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뒤쪽 정원에는 소나무를 심고 앞 계단에는 대나무를 심어 절개(節介)를 다짐한 것이다. 정자 앞에 있는 배롱나무, 매화나무 등의 수목은 대부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수정은 전통적 자연풍경식 정원조성 기법으로서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원림기법을 선보임으로써 이후 원림문화에 크게 영향을 끼치는 선구적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로지 신의와 충절을 지키기 위해 외로운 산 속에서의 생활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그나마 그것을 견디게 해준 것은 나무와 꽃, 그리고 햇살과 바람, 지저귀는 새소리였을 것이다. 독수정은 그에게 은신처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위로와 용기를 주었다. 이것이 자연의 힘이고 곧 정원의 가치다.



전신민이 직접 말하는 독수정을 세운 이유

전신민은 이 지역과 특별한 연고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저 개성 (開城)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떠나와 머문 곳이 무등산 자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모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처가 동네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오고가다 눈여겨봐둔 땅도 아닌 듯하다.

전신민은 이곳에 칩거하며 무등산의 고려 때 이름인 서석산(瑞石山)에서 글자를 취하여 호를 서은(瑞隱)이라고 했다. 그는 '독수정원운(獨守亭原韻)'이라는 시(詩)를 통해 자신이 이 정자를 세운 이유에 대해 밝히고 있다. 風塵漠漠我思長(풍진막막아사장:바람과 티끌은 막막하고 내 생각은 갈수록 깊어지네)/何處雲林寄老蒼(하처운림기노창:어느 깊숙한 구름과 숲 사이로 이 늙은 한 몸을 숨길 수 있으랴)/千里江湖雙?雪(천리강호쌍빈설:임금 계신 곳 천리 밖의 자연에서 두 귀 밑 버리는 눈처럼 희어지고)/百年天地一悲凉(백년천지일비량:기껏해야 백년도 못사는 인생살이 슬프고 처량하다)/王孫芳草傷春恨(왕손방초상춘한: 아름다운 풀과 꽃들은 가는 봄을 가슴 아파하고)/帝子花枝叫月光(제자화지규월광:두견새는 꽃가지에 앉아 달을 보고 우는구나)/卽此靑山可埋骨(즉차청산가매골:이곳 청산에 뼈를 묻으려고)/誓將獨守結爲堂(서장독수결위당:장차 홀로 절개를 지키려 이 집을 지었다네) 조선 태종 이방원의 회유에 단심가를 지어 화답하며 지조를 지켰던 고려 말 정몽주를 떠올리게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를 사모했던 서은은 매일 아침 조복을 입고 곡배를 올린 것이다.

독수정은 이러한 충신의 절개와 후손들의 효(孝)를 상징하는 정자다.

정자에 오를 때마다 주변경관에 취해 넋을 잃을 때가 많지만, 잠시나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정자의 주인이 되어보려 시도해본다.

독수정은 그가 홀로 지키려 했던 신의와 품격, 그리고 그의 후손들이 몸소 보여준 효행(孝行) 등 정겨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그저 입신출세와 부귀영화를 꿈꾸며 온갖 사욕과 권력을 좇아 철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땅히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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