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 날갯짓 소나무ㆍ세월의 이끼 낀 바위… 동양화 여백미 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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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학 날갯짓 소나무ㆍ세월의 이끼 낀 바위… 동양화 여백미 진수
무등산이 품고 있는 최고의 정원, 풍암정(楓岩亭)
  • 입력 : 2017. 11.10(금) 00:00
풍암정은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이끼 낀 바위와 더불어 마치 학(鶴) 한 마리가 날갯짓 하는 것처럼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멋스러운 소나무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무등산은 참 여러 가지 표정을 지니고 있는데 그만큼 다양한 풍경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무수한 풍경 가운데 참으로 애틋하게 느껴지는 유서 깊은 누정 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원효계곡 하류에 위치한 풍암정(楓岩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충효동 분청사기 도요지에서 단풍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 무등산을 향해 약1.6㎞ 정도 걷다보면 보일 듯 말 듯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마치 흐르는 계곡 물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 듯 예사롭지 않은 풍모를 느낄 수 있다.

정자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암석들은 여느 누정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다.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이끼 낀 바위와 더불어 마치 학(鶴) 한 마리가 날갯 짓하는 것처럼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멋스러운 소나무가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정자와 바위, 그리고 소나무, 이들은 각자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아름다운 정원으로 거듭난 것이다. 동양화가 주는 여백의 미(美)와 단순미가 무엇인지 그 진수를 보여주는 듯하다.

1990년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로 지정된 이곳은 조선중기의 의병장 김덕령(金德齡, 1568~1596)의 아우인 김덕보(金德普, 1571~1627)가 세운 정자다. 풍암(楓巖)은 단풍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의미하며 김덕보의 호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큰형 김덕홍(金德弘, 1558∼1592)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작은형 덕령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자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정자를 지어 자연과 벗하며 은일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덕보의 본관은 광산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붕섭(鵬燮)의 아들이고, 의병장인 덕령(德齡)의 동생이다. 그는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에 살았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 권고로 형 덕홍(德弘)ㆍ덕령(德齡)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하여 전라도 곳곳에서 왜군을 격파하였다. 그 후 덕홍이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금산에서 전사한데다 덕령이 무고에 의해 옥사(獄死)하자 향리로 돌아와 세상일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연구에만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안방준(安邦俊)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노쇠하여 더 이상 전장에는 나가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1785년(정조 9년) 전라도 유생 기석주(奇錫周) 등의 상소에 의해 큰형 덕홍과 함께 포상, 추증되었다.

풍암정은 풍암정사(楓巖精舍)라는 편액이 말해주듯 이 지방 유림들의 강학장소로도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정사(精舍)는 학문을 가르치고 정신을 수양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 이 정자에 풍암 이전의 인물인 석천 임억령, 제봉 고경명 등의 제액들이 걸려 있는 것을 들어 일각에서는 풍암 선생 이전에 지어진 정자로 김덕보가 중수한 것으로 유추하기도 한다.

정자에는 풍암정사 현판과 송강 정철의 넷째 아들인 정홍명(鄭弘溟, 1582년~1650년)이 쓴 풍암기, 그리고 임억령, 고경명, 안방준 등이 남긴 시(詩)들을 새긴 제액들이 10여개 걸려 있다. 그 가운데 풍암기(기암 정홍명)에 의하면 당시의 풍경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큰 바위 사이에 단풍나무 백여 그루가 있는데 시내와 못에 빙 둘러서 비친다. 바야흐로 가을 서리 맞은 잎이 물에 잠기니 물 색깔이 물들인 것처럼 아름답다.(풍암기 일부)' 만영(풍암 김덕보)에서는 이 같이 노래하고 있다. '단풍나무 언덕위에 두어 칸 집 지으니 바위 앞엔 대나무 푸르고 뒤로는 산봉우리 겹겹이 둘렀네/창문 남쪽을 향해 한겨울에도 따뜻하고 물가의 정자 한 더위에도 차갑네/영약 구하려고 신선 따라 땅을 파고 좋은 책은 야인들이 빌려다 본다/이 곳에 저절로 편안한 삶이 있는데 어찌 바다건너 봉오산을 찾을까.' 이에 앞서 석천 임억령도 풍암정에 대한 감상을 노래했다. '늙어가는 이내몸이 수석사이 오고가니/물에 비친 남산에 연기와 안개가 둘렀도다/아름다운 단풍나무 줄을 지어 겹쳐 있고/바위사이 흐른 시내 오월에도 차갑도다/아름다운 영경(靈境) 속에 맑은 시상 일어나니/그림 같은 도원승경 이곳에서 보았도다/이 땅위의 송설(松雪)속에 이내몸을 길들이고/그 다음에 용을 타고 해산(海山)으로 들어가리.'

지금도 평일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할 정도로 풍암정 일원은 고즈넉하다. 원효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맑은 물소리와 숲 속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린다. 잠시 세상일 떨쳐버리고 사색하는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풍암정 가는 길은 참 즐겁다. 진입로에 들어서면 곱게 물든 단풍나무 가로수길이 반겨주고 정자에 다다르면 이끼 낀 바위와 청량한 계곡 물소리, 그리고 운치를 더해주는 소나무 등이 기다리고 있다.

풍암정 자연정원은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보아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





남도사람들의 정신과 삶의 표상 무등산

광주를 상징하는 것들이 이것저것 있지만, 무등산이야말로 광주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랜드마크(Landmark)라고 할 수 있다.

비단 광주시민뿐만이 아니라 남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치 어머니의 품속과 같이 포근하고 애틋한 산이다. 무등산은 어느 쪽이 정면인지 단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방팔방 모나지 않고 마치 초가지붕을 보는 듯 부드러운 이미지다. 어찌 보면 잘 차려놓은 밥상을 보자기로 덮어놓은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어 무슨 반찬이 차려져 있을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산이기도 하다.

무등산은 얼핏 보면 산세가 웅장하다거나 수려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실제 산 속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계곡과 기암절벽, 그리고 억새풀, 철쭉 등 온갖 다양한 식물들이 군락을 형성하고 계절마다 빼어난 풍경을 연출하며 감동을 선사한다. 남도를 얘기하자면 구구절절 할 얘기가 많지만 굳이 애써 설명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무등산은 그 모든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등산은 남도적인 정서를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산이다. 무등산은 무수한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으스대지 않는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 능선을 보면 알겠지만 오히려 자세를 낮추고 애써 주변 산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참으로 겸허하고 덕스러운 산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무등산은 생태자원을 비롯하여 역사적인 유적지나 누정, 도요지, 사찰 등 사람 향기 가득한 이야기 거리가 산자락마다 주렁주렁 걸려있다. 이런 가치를 인정하여 무등산은 1972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또 2014년에는 국가지질공원으로도 인증을 받았고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 등록을 준비하고 있다. 무등산은 높이 1,187m로 그리 높지 않는 산이다. 보통사람이면 한나절에 정상까지 왕복할 수 있을 정도여서 지역 주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무등(無等)이라는 이름은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라는 뜻이다. 통일신라 때 무진악(武珍岳) 또는 무악(武岳)으로 표기하다가 고려 때부터 서석산(瑞石山)이란 별칭과 함께 무등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렇듯 무등산에는 수려한 풍광과 유서 깊은 역사, 그리고 품위 있는 문화가 면면히 흐르고 있다. 무엇보다 보통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면서 기꺼이 팔 벌려 보듬어주는 너그러움과 따스함이 있어 좋다.

남도사람들은 그저 무등산이 거기 그대로 있어주는 것 자체만으로도 참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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