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적 소원" "난 우즈벡 사람" 극명하게 갈린 고려인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사회
"한국 국적 소원" "난 우즈벡 사람" 극명하게 갈린 고려인
가난 찌든 고려인 2세 老 부부
소련 붕괴 되면서 국적 잃어
네 딸 중 두 딸 역시 무국적자
한국 왔다갔다 하면서 힘든 삶
  • 입력 : 2017. 11.24(금) 00:00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야경은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이곳 우즈벡에 거주하는 고려인은 대략 17만명, 그중 상당수가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극명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 그래서 모국인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도 차이가 크다. 배현태 기자 htbae@jnilbo.com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의 도로에는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한국에서는 진하고 뚜렷하게 볼 수 있는 도로 차선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있어도 아주 희미하다. 이 부분에 대해 통역인 고려인 3세 샤샤(42)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아주 시크했다.

"다 해 처 먹어서 그렇죠. 잘 보시면 우즈벡 대통령이 사는 도로 앞은 선명해요. 외곽으로 나갈수록 아예 선이 안보이죠."

샤샤의 말처럼 일부 도로는 중앙 분리선 조차 지워져 없었다. 차선 도색 비용을 공무원, 업자들이 빼돌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인지 일행들은 운전을 담당하는 이넘(30)이 핸들을 틀 때마다 비명을 질렀다. 앞에 차가 오고 있음에도 무단으로 중앙선을 침범하는게 일상화됐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있어 '한국은 곧 대우 김우중 전 회장'이라는 점이다.

샤샤는 한국에도 몇번 다녀오고 한국말을 잘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에 취업도 예정돼 있다. 당연히 한국에서 김 전회장의 상황이 어떤지도 잘알고 있다. 그럼에도 김 전 회장에 대한 강한 그리움을 내비쳤다.

"김 전 회장이 우즈벡에 왔을때 지역 고려인들은 환호를 질렀지요. 그가 대통령을 만나고 이곳에 공장을 세우면서 고려인들의 위상도 덩달아 높아졌구요. 잘 보세요. 도로를 지나는 차량들의 대부분이 '대우'잖아요. 우즈벡에 대우는 그런 기업이죠. 자긍심과 직결되는 기업…"

그러나 그의 말은 웬지 힘이 없어보였다. 하기야 자긍심이라던 대우는 더이상 자동차를 수출하지도, 예전만큼의 힘을 가진 기업도 아니기 때문이다.

샤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새 우리는 첫번째 인터뷰 대상자의 집에 도착했다.

그곳은 타슈켄트 외곽에서도 30여분을 달려야 도착하는 시골지역의 한 낡은 집이었다. 기르는 개가 사납게 울고 멀리서 온 손님을 바라보는 노부부의 모습은 그들이 살아온 곤궁한 역사를 충분히 짐작케 했다.

박르보쉬(81) 할아버지와 박일리아(83) 할머니, 이들은 고려인 2세들이자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다.

고려인들의 무국적 문제의 근본은 소련 붕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이전의 고려인들은 카레이스키도 고려인도 아닌 소련에 살고 있는 소련인이었다. 출신지가 조선이었을 뿐. 그래서 그들은 공산국가인 소련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발언권을 획득하고 노력해서 당 간부로도 올라가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혔다. 당시 소련은 많은 국가의 강제 연합체였기에 특정한 민족을 배제하기 보다는 공평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 틈새에서 고려인은 빠른 시간에 급격히 소련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이것이 일거에 무너진게 바로 소련 붕괴때부터다.

소련 붕괴 이후 일부 고려인들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러시아를 뺀 구 소련 시절 연방이었던 나라들이 소련 국적을 인정하지 않아 국적을 다시 신청해야 하는데, 이를 몰랐거나, 서류를 분실하거나, 거주자로 등록하지 않았거나,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이유 등으로 신청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소련에서 독립한 국가들은 자국민 위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고려인은 공무원이 될 수도, 큰 기업가가 될 수도 없는 차별을 받아야 했다. 무국적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기본적인 혜택에서부터 차별을 받아야 했다. 그들은 국가가 없는 국민, 다른 말로는 집시였으니까 말이다.

일행이 만난 노부부는 바로 그런 역사의 파도에 휩쓸린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같은 고려인 무국적자는 전체 고려인의 12%에 해당하는 약 5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박 할아버지는 더듬거리는 한국말과 러시아어를 섞어서 말을 이어갔다. 그와 부인은 연해주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다른 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강제이주열차에 올라탔고 살아남아서 키르키스탄에 도착했다. 거기서 성장한 박 할아버지는 우크라이나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1965년 다시 키르키스탄으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그는 자동차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키르키스탄에서 내전이 발발하면서 가족들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해 왔다. 이때가 1992년이었다. 허나 우즈베키스탄에서 그에게 국적을 주지 않아 그는 그때부터 무국적자가 됐다. 우즈베키스탄은 소수민족에게 국적을 주지 않기로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다.

부모가 무국적자이다 보니 그들의 자식들도 일부는 무국적자다. 그들은 4명의 딸을 두고 있는데 큰딸과 넷째딸은 무국적자다. 둘째딸과 셋째딸은 각각 러시아 남편, 카자흐스탄 남편을 만나 국적을 획득했다. 특히 막내딸은 지금 한국에 있는데 국적이 없어 무비자로 입국한 상태라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녀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절에 한국에 들어와 재외동포법에 따른 3년 비자를 받고 한국에서 일을 했으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무국적 재외동포의 여행증명서 유효기간을 일률적으로 1년 이내로 제한'하면서 한국에서는 일을 할 수 없게 돼버렸다.

박 할아버지는 "내사 인자 죽으믄 그만이니, 국적이야 뭐가 중요하겄소. 그나 우리 딸은, 우리 딸만은 국적이 꼭 있었으믄 좋겄습네다" 이북 억양이 섞여 있는 그의 목소리는 간절함과 눈물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의 손과 말은 병원에서 제때 치료를 받지 않아 안쪽으로 굽어져 있었다. 걷는 것도 일하는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아내인 박 할머니는 낡은 휠체어에서 자기 힘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고 말도 잘 하지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우즈베키스탄이 주는 것은 죽지 않을 만큼의 연금이 전부다. 병원은 꿈도 못 꾼다. 공짜임에도 이 나라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박 할아버지는 "우리 같은 밑바닥 사람들은 러시아 국적도, 우즈벡 국적도 다 싫소. 한국 국적을 받을 수만 있다면 더는 소원이 없겠소. 우리 딸도 자식 때문에 3개월마다 한국에 들어갔다가 우즈벡 왔다가 하는 것도 너무 힘들어 하오"라며 고려인 4세에 대한 대한민국의 지원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의 굽은 등과 움푹 들어간 눈, 낡은 집을 뒤로 한 채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다음 순서로 만난 사람은 고려인 출신 중에 가장 유명한 황만금(1919-1997)씨의 아들 황스타이슬라프(75)씨였다.

잠깐 황만금씨를 언급하자면 그는 소련의 대표적인 고려인 지도자로, 1953년에 '폴리타젤(Politadel)' 집단농장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소련 최고의 모범농장으로 만들어 '사회노동영웅'으로 불렸으며, 레닌 훈장과 10월혁명 훈장을 받았다.

그러다 소련 붕괴 당시 우즈베키스탄 지도층이 '면화 스캔들'이라는 정치적 탄압을 실행하면서 최고회의 의원이었던 황만금이 희생양이 됐다. 물론 재판이 진행되면서 무죄임이 밝혀졌지만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1989년에 감옥에서 풀려나 폴리타젤 집단농장의 명예회장을 맡아 여생을 보냈다. 1991년에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자, 정치적인 명예를 온전히 되찾았으며, 1997년에 세상을 떠났다.

황스타이슬라프씨의 집에 발을 들이니 사람만한 큰 세퍼트가 귀가 찢어질듯한 소리로 짖어댔다. 집은 매우 넓었다. 담이 높을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은 했으나 거의 '재벌집' 수준이었다. 내부의 가전은 모두 한국에서 최근 생산된 제품으로 없는게 없었다. 집 안에는 정원 비슷한 것도 있었다. 방금 전 만난 무국적자인 박씨 노부부와는 어마어마한 차이였다. 황스타이슬라프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내놓은 것은 한국 과자였다. 우즈벡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것들이다.

그는 30여분을 천천히 공들여 그의 아버지인 황만금에 대해 설명했다. 태어나서부터 여기에 살았던 그는 영웅인 아버지를 따라 이 마을에서 주목받는 인재로 성장했다고 한다. 농업대학교를 졸업했으나 학교 재학당시 스포츠에 관심이 더 많아 축구팀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만약 당신에게 한국에서 국적을 준다면 받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고민없이 바로 답했다. "안 받는다. 한국 국적이 지금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되겠는가? 우즈벡은 다른 출신 사람들을 무시하는 민족이 아니다. 그들은 예의 바르고 따뜻하다. 나의 조국은 바로 우즈벡이다"라고 말했다. 당연히 나올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입에서 우즈벡어로 들으니 약간의 괴리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고려인 내부의 극명한 생각차이를 직접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노병하 기자 bhro@jnilbo.com
사회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