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오르면 장수라는데 35년 무대인생 '한편의 그랑파드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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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 공프로젝트
10년 오르면 장수라는데 35년 무대인생 '한편의 그랑파드되'
[2018 공프로젝트] 2. 최고령 발레리나
김정희 前 광주시립발레단 단원
인생 1막 광주 무대 선택한 부산 출신
부모 반대 무릅쓰고 "내 운명"
  • 입력 : 2018. 02.04(일) 21:00



'열정' 하나로 평생을 춤과 함께 살아온 예술인이 있다. 35년동안 전국 최고령 발레리나로 활동하다 지난 2017년 은퇴한 뒤 후학을 양성하고 있는 김정희(48) 전 광주시립발레단원이다. 지난 1994년 부산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광주시립무용단에 들어왔다. 부산에서 24년을 살고 다시 광주에서 24년을 살고 있으니 이제 광주는 그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10년 장수하기 어렵다'는 발레 업계의 불문율을 비웃기라도 하듯 35년을 현역에서 뛰었다.

춤은 그에게 전부였다. 춤 외에 다른 분야를 생각해본 적조차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발레단 활동이 평탄치는 않았다. 발레단 수석까지 올랐다가 다시 말단으로 추락하는 우여곡절도 겪었다. 고관절 퇴행 수술을 권하는 의사의 말에도 끝끝내 통원치료만 받으며 공연을 마쳤다. 은퇴한 지금의 삶은 행복하다. 광주시립발레단에서 함께 호흡하던 러시아 출신 발레리노와 결혼해 평생 함께하고 있어서다.

광주에서 발레 꿈나무들을 키우며 인생 2막을 살아가고 있는 김정희씨를 찾아가 봤다. 첫 인상은 아담했으며 표정은 야무지고 해맑았다. 어느 분야에서건 오직 한 길만을 걸을 것같은 모습이다.



-부산 출신인데 광주시립무용단에 오게된 계기는.

△1990년대 광주시립무용단(2015년 시립 발레단으로 명칭 변경)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한때 그 명성은 국립발레단을 능가할 정도였다. 부산대 무용과 친구들도 그 명성을 알고 있었던가 보다. 모두가 광주시립무용단에 들어가고 싶어했다. 친구들이 간다기에 같이 광주에 와서 오디션을 봤다. 마치 '어떤 유명 연예인이 친구 따라 갔다가 오디션을 봤는데 친구는 떨어지고 본인이 캐스팅 됐다'는 드라마 같은 일이 실제로 제게도 일어났다.

세명이 함께 시험을 봤는데 친구들은 다 떨어지고 나만 합격했다. 그 시대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감정의 골이 아주 깊었던 터라 부모의 반대도 심했지만 광주시립무용단이 운명이라고 생각해 입단을 결심했다.



-발레리나 꿈은 언제부터 꾸기 시작했나

△초등학교 4학년때 우연히 TV에서 볼쇼이 발레단 공연을 봤다. 발레리나의 모습에 반해 무작정 발레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니던 초등학교에는 발레부가 없었고 기계체조부만 있었다. 발레를 하려면 몸이 유연해야 하고, 기계체조를 하면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기계체조반에 들어갔다. 이 후 5학년 되던 해 친구따라 처음으로 무용학원을 갔다. 그때도 오직 무용에만 몰두했다. 춤이 좋았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는 게 즐거웠다. 중학교 2학년 때 첫 콩쿠르에 나갔다. 제가 다니던 중학교는 부산에서도 무용으로 이름있는, 내로라 하는 학교였다. 120명이 무용단 오디션에 지원했다. 그 결과 저를 포함해 12명이 뽑혔다. 어찌나 연습이 혹독했던 지 졸업할 때 보니까 11명이 떨어져 나가고 저 혼자만 남아 있었다.



-무용반에서 최후 1인으로 살아남은 비결은.

△당시 학교에선 발레를 가르쳐주지 않고 스트레칭만 지도했다. 엄마한테 '이건 좀 아닌 것같다'고 했더니 엄마는 그건 기초를 다지기 위한 것이니 조금만 더 견뎌보라고 격려해 줬다. 이후 몸매 관리를 위해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심지어 세탁소 비닐을 몸에 감고 공원을 뛰어다녔다. 항상 10여곳의 정거장은 뛰어다녔다. 종착역에서는 줄넘기를 했다. 독종이었다. 토ㆍ일요일도 쉬지않고 트레이닝을 했다. 스트레칭 수업이 10시에 시작하면 항상 1시간 반 이상을 먼저 가서 몸을 풀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키도 작고 체격도 작았지만 언제부터인지 선생님은 저를 무대 중앙에 설 수있도록 배려해줬다. 당시 무용반에서는 한국무용, 발레 등 모든 춤을 망라했다. 힘들었지만 그때 무용반에서 배웠던 끈기와 기술들이 지금의 저를 있도록 한 가장 큰 재산이 됐다. 프로 발레리나로 무대에 서보니 발레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연기력이었다. 연기력이 없으면 발레는 감흥이 없는 법이다.



-고관절 퇴행성 관절염을 안고 무대에 섰다고 하던데.

△고관절 퇴행성 관절염을 평생 안고 살고 있다. 3년 전부터 통증이 본격 진행됐다. 발레 인생 통틀어 가장 해보고 싶었던 역할이 '그랑파드되'였다. 모든 발레 무용수들의 로망이다. '파드되'는 발레에서 두 사람이 추는 춤을 말하는 데 그랑 파드되는 발레의 클라이맥스 장면에서 프리마 발레리나와 남성 제1 무용수가 추는 춤을 말한다. 젊었을 적 역할이 주어지지 않다가 45살에야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고관절 퇴행성 관절염이 말썽이었다. 의사도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위험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 생각에 통원 치료 받으며 연습을 했다. 연습 중 정신이 혼미해지는 고통을 느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아침마다 메이크업을 하면서 나는 할 수 있다고 주문을 외웠다. 마침내 그랑파드되 공연을 마쳤다. 그러면서 느낀 게 있다. 우리 몸이 참 신기하다는 것을. 가장 찬란했던 그 순간 만큼은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무용단 활동 중 가장 큰 고비는 언제였나

△평생동안 6명의 광주시립무용단(발레단)장을 만났다. 불화도 많았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8할은 그 단장들이다. 한때 그 들을 원망했지만 지금은 고맙고 감사하다. 수석단원에서 하루아침에 말단으로 내려 앉았다. 맡는 역할도 주인공에서 지나가는 행인 정도로 추락했다.

내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이를 갈고 연습하며 몸을 만들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 했던가. 그 때 깨달은 게 있다. '인생은 넘어져봐야 비로소 성숙한다'는 것을. 넘어지지 않으면 절대로 인생의 쓴맛을 모른다. 쓴맛도 잘 삼킨 뒤에라야 단맛을 알게 된다. 그 당시를 교훈삼아 지금은 정신적ㆍ육체적으로 건강하게 지내려 한다. 건강해야 후학을 잘 가르칠 수 있고, 그래야만 이 지역 꿈나무들에게 체계적인 춤을 가르쳐줄 수 있을 테니까.



-은퇴 후 제2의 인생을 언제부터 준비했나.

△나이 45세가 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현역에서 활동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으니까. 본격적으로 은퇴 이후의 삶을 준비했다. 고관절 퇴행으로 몸이 예전같지 않았고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밀려오면서 인생2막을 고민했다. 광주의 발레 꿈나무들에게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체계적인 교육을 시켜보고 싶었다. 비록 몸과 마음은 다쳤지만 후학들에게 만큼은 영혼마저 다치지 않도록 배려해주고 싶었다.



-남편과 만남도 드라마틱 하던데.

△이 자리에 있기까지 힘이 돼 준 이는 남편이다. 제게 '열정'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남편(벨릭떼 노르보예프ㆍ43)은 러시아 출신 발레리노다. 바이칼 호수 근처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부터 발레로 몸을 다져왔다. 유전적으로 러시아와 몽골의 핏줄이 섞인 탓에 러시아 출신이라고 말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외국인으로 보지 않는다.

벨릭떼가 지난 1997년 광주시립무용단에 입단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광주시립무용단장이 직접 러시아에 가서 스카우트 해왔다. 벨릭떼와 가까워진 계기는 '프리발 카발리에(기병대의 휴식)' 공연을 함께 하면서부터다. 남편은 영혼이 맑은 사람으로 그 모습에 반했다. 자연스럽게 가까와질 수 있었고 마침내 지난 2000년 결혼에 골인했다.

중학생인 딸(16)도 큰 키(174㎝)에 무용을 전공하고 있어 장차 광주를 넘어 한국ㆍ세계를 대표하는 무용수가 되겠다는 각오가 남다르다.

은퇴후 현재는 남편과 함께 발레학원을 운영하며 입시생은 물론 초ㆍ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발레를 가르치고 있다. 남편은 러시아 출신인 만큼 학생들에게 발레뿐 아니라 헝가리, 폴란드, 스페인, 러시아, 차르타슈 민속춤도 가르치고 있다. 남편을 만난 지 30년이 다 돼가지만 예전보다 지금이 더 사랑스럽고 좋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성품이 착한 사람이라서 더욱 그렇다.



-퇴직 후 무대가 그립지는 않나.

△퇴직하면 후회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 평생 무대에서 춤을 추고 싶었는데 이제는 아쉽지 않다. 40살 무렵부터 은퇴를 생각해온 덕택인 듯하다. 은퇴를 염두에 뒀기에 그 당시 더 열심히 뛰었던 것 같다. 그만 둘 날을 생각했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아낌없이 내 몸을 사용했다. 이젠 앞만 보며 살아가려고 한다. 그것이야말로 광주의 발레 발전을 위한 나의 미약한 헌신일 테니까.



-전국 최고령 발레리나로 알려졌는데 장단점은 뭐라고 생각하나.

△발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테크닉이다. 나이가 먹을수록 중력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점프를 해도 높이 뛸수가 없다. 중력을 이기려면 젊은 친구들에 비해 연습량이 많아야 한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게 가장 힘들었다.

반면 나이가 많으면 이점도 많다. 장인정신으로 연기를 하는 배역이 있기 마련인데, 나이가 많으면 이런 배역에서 젊은친구들보다 다소 유리하다. 술집여자 춤이 대표적인 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여자를 연기하려면 젊은 무용수보다 경험이 많은, 연륜이 높은 무용수가 더 제격이다. 발레에서 춤은 일부이고 나머지는 연기력이기 때문에 나이가 많을수록 연기력 부분에서 유리하다. 나이 많은 무용수에 대해 '처치 곤란한'이라는 평가가 마음이 아픈 이유다. 이런 수식어를 무용수에게 붙이는 건 상처다. 후배들이 그런 상처를 받지 않고 연기에만 몰입할 수있는 문화가 시급하다.



-앞으로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지.

△광주 출신 무용수들이나 광주에서 고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한국종합예술학교(한예종), 세종대, 한양대 등 무용 명문에 꾸준히 입학하고 있다. 각종 전국대회 콩쿠르에 입상한 뒤 대학원까지 전액 장학금을 받기도 하고 군면제, 유니버셜발레 스튜디오에까지 입단하는 발레 꿈나무들이 많다. 잘나가는 제자들을 배출할 때마다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게 있다. 이렇게 유능하고 잠재력 뛰어난 꿈나무들이 이 지역으로 내려오거나, 남으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점 말이다. 이게 늘 고민의 지점이다. 잘 하는 제자들이 남아서, 또는 찾아와서 광주 발레 발전에 헌신토록 하는 게 제 목표다. 제자들이 평생 건강한 발레리나로 살아갈 수있도록 이끌어주고 싶다.

요즘 공부하는 분야가 늘었다. '해부학'이다. 발레는 스트레칭 등 해부학적으로 완벽하게 정립된 뒤 나온 예술이다. 발레 지도자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해맑게 웃는 그의 미소가 어쩐지 든든해 보인다.




김정희는

1990년 부산대 무용학과 입학

1994년 광주시립무용단 입단

2009년 광주여대 무용학과 대학원 입학

2011년 광주여대 무용학과 대학원 졸업

2017년 12월 광주시립발레단 퇴직


주요활동

1998년광주시립무용단 차석

1999년~2002년 광주시립무용단 수석

안무작: 달콤쌉사름한 초콜렛

something Special Lapolia

에드가의 아뜰리에

출연작

지젤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명성황후



글=박간재 기자ㆍ사진=김양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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