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에 무너져가는 충칭 임시정부 국방부장관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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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무관심에 무너져가는 충칭 임시정부 국방부장관 집
대책 없이 철거 직전에 놓인 김원봉 충칭 거주지
약산 숨결 어린 하나뿐인 유적
재래시장 골목안 3층짜리 건물
남ㆍ북에 버림받아 철거 직전
  • 입력 : 2018. 03.01(목) 21:00
1942년부터 1945까지 김원봉이 거주했던 충칭의 주택. 재개발에 밀려 올해안 철거될 예정이지만 아무런 보존 대책이 없다.
약산 김원봉은 1942년 조선의용대와 한국 광복군의 통합을 선언, 광복군 부사령이자 제1지대장으로 합류했다. 이어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현 국방부장관)에 취임한다.

약산이 1940년 이후 거주했던 충칭(重慶)의 옛 집을 찾아 나섰다. 임시정부 청사를 제외하고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충칭에서 그나마 약산의 숨결이 서린 공간이다.

허름한 재래시장 골목을 20여분 정도 걸어 들어갔다. 대불단정가 150호 건물 앞에 섰다. 건물 두채가 맞닿은 3층짜리 집이다. 곧 쓰러질 듯 하다. 1층 가게만 운영될 뿐 사람이 사는 흔적이 없다.

가게 주인은 "가끔 한국 사람들이 찾아와서 사진을 찍고 간다"고 말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살았던 항일 유적지라고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다. 아무런 표식도 없다.

재래시장 골목을 더 들아갔다. 172호가 약산의 집이라는 설도 있다. 학자들간에도 의견이 달라 두곳 모두를 찾기로 했다. 172호도 마찬가지였다.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철거 직전의 상태로 방치돼 있다. 가게 주인은 이집이 한국 독립운동가의 집이 맞다고 말한다. 방송에도 나왔단다. 어쩌면 남ㆍ북한 양쪽으로부터 모두 버림받은 그의 삶이 집에 그대로 투영된 듯 싶다.

김원봉은 평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하면서 일본 군경을 두려움에 떨게 했지만, 정작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서는 악명 높은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붙잡혀 뺨을 맞는 등 온갖 모욕을 당한다. 남로당에 연관된 파업 주동자라는 이유였다.

그는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위해 김구와 함께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에 북쪽으로 간 이유는 노덕술과 같은 친일파와의 갈등 때문이었을 것이다. 약산이 친일파 악덕 경찰 노덕술에게 체포되었다 풀려난 뒤 지인을 찾아가 3일간 통곡했다고 한다.

약산이 북을 선택하면서 남쪽에 남은 인척은 고난을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이복 동생들은 한국전쟁을 전후해 거의 군경에 의해 처형당했다.

약산은 어쩌면 공산주의자라기보다 여운형과 같은 중도적 성향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그는 좌우합작의 정당인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또 밀양의 후배이자 동지였던 석정 윤세주가 공산당 거점으로 이동할 때, 김원봉은 그와 헤어져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그가 공산주의자였다면 여러 차례 그들과 함께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선택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남쪽으로 귀국하였다.

이제라도 이념을 떠나서 일제강점기에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한 사실에 대해서는 마땅히 본인은 물론 그 후손에게도 합당한 대우를 해야 한다. 충칭의 허물어져 가는 약산의 집이 눈에 밟힌다.


송지혜 첨단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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