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링 필드'-존 레논 '이매진(Imagine)'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김기호의 음악세상
영화 '킬링 필드'-존 레논 '이매진(Imagine)'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보아요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살인도 죽음도 없고 종교도 없는 곳을요
  • 입력 : 2018. 03.29(목) 21:00
지난 2012년 제30회 하계올림픽 폐회식이 열리던 영국 런던 올림픽 스타디움에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형 스크린 속 남자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읊조렸고, 세계 각지에서 찾은 관중들은 한 목소리로 그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Imagine there's no countries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해보아요 / It's isn't hard to do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살인도 죽음도 없고 종교도 없는 곳을요 /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모든 사람들이 평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상상해 봐요'



그로부터 6년이 흐른 2018년, 대한민국의 평창에서는 동계올림픽의 개회식이 열리고 있었다. 한국의 각 세대를 대표하는 네 명의 가수 역시 이 노래를 불렀다. 굳이 외국 곡을 불러야 했나하는 비판을 감수하면서도 그들이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영국의 밴드 비틀즈 멤버였던 존 레논은 팀이 해체된 이후 가수 겸 진보적 평화운동가의 길을 걷는다. 이 노래 '이매진(Imagine)'은 '평생의 동지'였던 일본 출신 전위 예술가 오노 요코와 결혼한 이후 그가 발표한 두 번째 앨범의 수록곡이다. 곡 전체가 지닌 로맨틱한 분위기와는 달리 가사는 도전적이고 혁명적이다. 종교와 이념도 없고 국가 간의 경계마저 사라진 무정부주의(아나키즘)적 세계, 이 노래에서 존 레논이 상상한 인류의 이상향이다. '언젠가 세계는 하나가 될 것(the world will be as one)'이라고 노래한 존 레논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19세기 후반 인도차이나 반도를 두고 제국주의 영국과 경쟁하던 프랑스는 베트남 응웬왕조의 선교사 박해사건을 빌미로 사이공을 점령한 이후 1884년 베트남 전 국토를 식민지화 한다. 20세기 이후에도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지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베트남 민족주의 세력 중 공산주의 계열의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에 의해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된다. 프랑스는 이전의 지배권을 되찾으려 했고 양국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한다. 1954년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으나 결국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나뉘고 만다. 미국 지원을 등에 업은 남베트남 지엠정권은 토지분배정책 실패 등으로 민중의 반발을 샀고 이로 인해 결성된 NLF(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은 정부군에 대한 게릴라 활동을 시작한다. 남베트남 정세가 불안해지자 미국이 개입했고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에 나서면서 베트남전쟁은 본격화됐다. 장기화하던 베트남전은 미국 내 반전여론과 닉슨독트린으로 인해 소강상태를 보이지만, 1970년대 들어 다시 재개됐다. 그러나 베트남 주둔 미군의 감축은 꾸준히 진행됐고 1973년 휴전 합의가 이뤄진다. 결국 1975년 북베트남의 대규모 공세로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전쟁은 끝이 났다.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앙코르와트의 나라 캄보디아 역시 19세기 중반 프랑스 보호령으로 편입됐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 사실상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지만 정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1970년 쿠데타에 성공한 론놀 장군은 크메르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 반정부 세력을 공산주의자로 간주하고 탄압해 훗날 크메르루즈의 성장을 초래한다.



영화 '미션(Mission)'을 연출한 롤랑 조페 감독의 1985년 작 '킬링 필드(Killing fields)'의 시대적 배경은 이와 같다.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에서 캄보디아 주재 뉴욕 타임스지 특파원인 시드니 쉔버그(샘 워터스톤 분)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캄보디아, 많은 서구인들에겐 낙원이거나 혹은 숨겨진 세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웃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이 이곳으로까지 번졌고, 중립국이던 캄보디아는 전쟁에 휩쓸리게 됐다. 1973년, 난 이 보수적인 싸움을 취재하기 위해 뉴욕타임즈 특파원으로 캄보디아에 왔다. 그땐 이미 정부군과 공산 크메르루즈 반군간 치열한 격전으로 전국이 쑥대밭 됐고 바로 그곳에서 난 내 인생을 바꿔놓은 한 인물, 디스 프란을 만났다. 프란 덕분에 난 사랑과 동정심을 배웠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이 참전하자 캄보디아는 중립을 선언했다. 소극적으로 베트남쪽에 기우는 양상을 보이면서 미국에 공습 빌미를 제공했고 미국은 50톤의 재래폭탄을 쏟아 붓는다. 시드니는 수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낸 폭격의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다. 당시는 캄보디아가 공산주의 크메르루즈 정권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인 1973년 8월이었다. 미국은 현장 참상이 본국에 알려질 것이 두려워 취재를 방해하고 시드니는 현지 기자인 캄보디아인 디스 프란(행 S. 응고르 분)의 도움으로 어렵게 현지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아냈다.



미군 폭격으로 폐허가 된 캄보디아 민중은 기아에 허덕였고 당시 크메르루즈를 이끌고 있던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시절 경도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그들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굶주림에 지친 채 세뇌된 캄보디아 젊은이들은 폴 포트가 쥐어준 총을 들고 수도 프놈펜을 공격하고 있었다. 심각성을 느낀 시드니와 프란, 서구 취재기자들은 가족들을 먼저 탈출시키고 자신들은 남아서 마지막까지 현장을 취재한다. 결국 수도 프놈펜이 함락되고 크메르루즈 군에게 붙잡힌 시드니 일행은 죽음의 위기에 처하지만 프란의 간곡한 설득과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탈출을 위해 찾아간 프랑스 대사관에서 프란은 캄보디아인이라는 이유로 요청을 거부당한다. 시드니와 동료들은 프란을 위해 영국여권을 위조하지만 프란에게는 증명사진이 없다. 천신만고 끝에 카메라와 필름, 현상액을 구한 그들은 프란의 사진을 만들어내고 이제 프란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 프란의 사진은 시꺼멓게 변해버리고, 프란은 눈물을 흘리며 크메르루즈군에 끌려간다.



베트남, 캄보디아 등 인도차이나 국가의 현대사는 마치 오래 전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19세기 들어 급속도로 발달한 자본주의와 함께 새로운 원료 공급처와 시장이 필요했던 유럽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을 침탈할 명분이 필요했다. 그들이 채택한 논리는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 사회진화론이었다. 강한 자 혹은 국가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는 제국주의자들의 탐욕에 날개를 달아줬다.

일찌감치 서구의 산업과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은 제국주의 광기에 편승하며 이웃 민족들을 도탄에 빠트렸다. 조선반도를 두고 벌인 주변국과 일전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편입한다. 인정할 수 없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해외로 거점을 옮긴 후 새로운 저항방식을 모색했고 제1차 대전 이후 주창된 민족자결주의는 그들에게 큰 희망을 심어줬다. 그러나 세계는 이른바 자유주의 진영과 반 자유주의 진영간 충돌양상으로 치달았고 유럽 상당수 국가들은 공산주의와 파시스트 정권에 장악됐다. 급기야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은 파죽지세로 유럽 각국을 점령했고 자유주의 진영의 패배는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자유주의동맹에 소련이 참여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된다. 전쟁은 결국 연합군 승리로 종결됐고 얼핏 자유주의 진영의 완전한 승리로 보였다. 그러나 나치즘을 괴멸시킨 공(功)의 상 당부분은 소련에 있었고 종전 후 그들은 세계 질서의 한 축으로 떠올랐다. 동유럽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됐고 중국의 국공내전에서는 공산당이 승리했으며 공포를 느낀 미국에서는 극단적 반공주의가 팽배했다. 이들의 세력대결은 결국 한반도에서 다시 충돌했으며 자력으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한 한국은 남과 북으로 나뉜 채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비극을 겪는다.



작가 황석영은 자신이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던 당시 겪었던 전쟁의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가족들이 피난길에 오른 와중에 인천에 배를 타러 가서 한밤중에 배수구에 숨어 있다가 한 무리의 군복 입은 사람들에게 끌려나왔다. 그들이 "이승만을 지지하느냐, 김일성을 지지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황석영의 아버지는 "저희는 정치라고는 전혀 모르는 양민입니다.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답했고 그들은 황석영의 가족을 보내줬다.

제국주의 희생양이던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 후에도 이념의 선택을 강요 받았다. 그들에게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선택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어느 한편에 서야 했고 외세의 충돌로 빚어진 전쟁을 겪으며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그로 인한 분단의 비극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베트남을 국빈자격으로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며 쩐다이꽝 베트남 국가주석에게 사과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힌 것으로 역대 대통령 중 세 번째다.

캄보디아 역시 베트남전 영향으로 수많은 양민이 학살됐다. 1975년 프놈펜을 점령한 크메르루즈는 과거 론 놀 정권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지식인, 정치인, 군인은 물론 국민을 개조한다는 명분 아래 노동자, 농민, 부녀자, 어린이까지 무려 전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00만명을 살해했다.

영화 '킬링 필드' 속 프란은 지식인이었으며 미국의 편에 섰다는 이유로 극한의 강제노동에 시달린다. 총을 든 어린 소녀는 프란의 옆에서 일하고 있던 남자의 손을 만져보고 굳은 살이 박혀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사살한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소의 목에 상처를 내고 그 피를 빨아먹다 발각된 프란은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독립된, 주체적인 정부의 시민으로 살기 위해 어느 한 쪽에 서야만 했던 프란과 캄보디아 민중에게 인간으로서 존엄과 존중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21세기, 인류에게 이념대결은 무의미해 졌다. 오직 자국의 실리를 위한 극한의 세(勢)대결만이 존재할 뿐이다. G2로 떠오른 미국과 중국은 무역전쟁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은 중국산 수입품에 연간 600억 달러 규모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고 중국은 대대적인 반격 조치를 예고했다. 불행히도 한반도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주변 열강의 극한대치는 지난 20세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은 북한과 대화를 앞두고도 과거 베트남과 캄보디아 폭격을 주도했던 세력을 연상케 하는 강경 매파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북한은 전통적 혈맹인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나서는 모양새다. 일본과 러시아 역시 이와 같은 역사적 흐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 향후 수개월에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있다.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프란은 결국 캄보디아와 태국 접경 중립지역에 도착한다. 다리가 잘려나간 한 소년을 돌보고 있던 그에게 누군가 찾아왔음을 알린다. 미국에서 온 그 손님은 시드니였다. 두 사람은 뜨겁게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눈물을 흘리고, 스크린 위로 존 레논의 노래가 흐른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천국도 지옥도 없다고 상상해 봐요.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 Above us only sky 우리의 머리 위엔 오직 하늘만이 존재해요 '



노래는, 이런 상상을 하는 우리가 그저 몽상가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꿈을 꾸는 사람이 나 하나만은 아닐 거라 말한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그리고 지금, 한반도에는 봄이 오고 있다.





영화 '킬링필드 The Killing Fields'(1984)
감독 롤랑 조페
주연 샘 워터스톤ㆍ행 S. 응고르


캄보디아. 서구인들에겐 낙원이요, 숨겨진 세계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웃 베트남에서 벌어진 전쟁이 이곳으로 번지며 급기야 중립국 캄보디아는 전쟁에 휩쓸리고 만다.

1973년 8월 7일. 미국 뉴욕 타임스 특파원 시드니 쉔버그(샘 워터스톤 분)는 종군기자로 캄보디아에 참전한다. 1972년 캄보디아 사태에서 크메르군을 섬멸하기 위해 미국 공군이 니크루움에 잘못 폭격해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캄보디아가 크메르 루즈 정권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도착한다.

정부군과 공산 크메루즈 반군간 치열한 격전으로 전국이 쑥대밭이 됐던 그곳에서 인생을 바꿔놓게 만든 한 인물을 만난다. 통역관 디스 프란이다. 그 덕분에 사랑과 동정심을 알게 된다. 그와 함께 현지를 돌아다니며 참혹한 현장을 카메라에 담는다.


문화평론가 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김기호의 음악세상 최신기사 TOP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