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를 이어 의병활동… 한말엔 항일 운동 '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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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의 종가이야기
대를 이어 의병활동… 한말엔 항일 운동 '기개'
보성의 진원박씨 장계파 박윤원 종가
김덕진의 종가이야기
  • 입력 : 2018. 04.19(목) 21:00
죽천 박광전 선생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죽천정. 필자 제공
청백리로 '진원군'에 봉해져 진원박씨 시조가 되다.

진원박씨 시조는 조선전기 사람 박희중(朴熙中)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외교관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김제 벽골제 축조에 공을 세우니 백성들이 제방 위에 그를 칭송하는 공덕비를 세웠고, 집현전 직제학으로 있으면서 청백리에 이름을 올렸다. 세종 때에 공신으로 진원군(珍原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진원'을 관향으로 삼아오고 있고, 박희중의 유훈 '청백전가(淸白傳家)', 즉 청백의 정신을 대를 이어 전하겠다 또는 청백리로 살아가는 가문이다는 말을 지켜오고 있다.

참고로 진원은 백제 때부터 있어 오던 독립고을이었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에 왜군에 의해 크게 분탕질을 당한 나머지 도저히 자립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빠져버렸다. 그래서 주민들의 청원에 의해 1600년(선조 33)에 진원은 폐읍되어 장성에 병합된 후 끝내 복설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사람들 가운데 진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이가 적지 않다. 지명이 남긴 역사이다.

보성의 장계파는 박윤원(朴胤原, 1458~)을 조상으로 한다. 박윤원 본인은 생원이었고, 그의 아들 박간(~1548)과 손자 박이의(朴而誼, 1534~1577)는 모두 진사였다. 3대가 내리 사마시를 합격한 것이다.



높은 학식으로 많은 제자를 둔 큰 학자, 왜란 때 70 노구로 아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다.

진원박씨 보성파의 문인 집안으로서의 위상은 박윤원의 증손자 박광전(朴光前, 1526~1597)에 의해 발현되었다. 그는 자가 현재(顯哉), 호가 죽천(竹川), 시호가 문강(文康)이고, 유집으로 '죽천집(竹川集)'이 있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서 도내에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은봉 안방준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선조 때에는 감찰과 함열현감, 회덕현감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 김익복, 문위세 등과 보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 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을 종사로 삼고 장자인 박근효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이리하여 임계영은 전라좌도 의병장이 되었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판관 송홍렬, 생원 박사길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동복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박광전은 사후 용산서원(龍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용산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었다가, 1707년(숙종 33)에 '용산'이라 사액되었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훼철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터를 옮겨 2016년 12월에 복원되었고, 유물관도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죽천 박광전의 유택이 남아 있는 문화유산들

보성군 노동면 광곡리에 있는 죽천정(竹川亭)은 박광전이 생전에 정사(精舍)를 지어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학을 교육하면서 강학하던 곳이다. 중간에 헐리었던 것을 1946년 후손들이 선조의 유택(遺澤)을 기리기 위해 정자를 세우는 공사를 시작하여 1950년에 완공하였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정자 중앙에 재실을 갖춘 구조이다.

보성군 문덕면 죽산리의 대원사 입구 천변에 위치한 산앙정(山仰亭)은 죽천 박광전 선생이 후학들과 학문을 탐구하면서 '우계기(遇溪記)'를 남겼는데, 이글은 당시의 명문으로 통하였다. 이어 제자였던 안방준 선생 등이 산앙정을 짓고 유생들의 학문 토론장으로 활용하였다. 이후 산앙정은 국난극복과 후학교육의 중심으로 활용되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다. 1988년 '산앙정 복원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1990년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보성 죽천선생 문집 및 유묵 목판'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1999. 7. 5. 지정)이다. 박광전의 시문집을 새긴 목판과 초서를 새긴 유묵판이다. 1929년에 새긴 목판은 문집 134판, 유묵 12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후대의 판각이지만 근대 책에서 현대 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쇄술과 '표제지' 개념을 살필 수 있는 자료여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찾기 힘든 사례 - 손자ㆍ증손자들 대를 이어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키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박근효(朴根孝, 1550~)는 아버지와 함께 임진왜란 때에 의병활동을 하였다. 그는 자가 입지(立之), 호가 만포(晩圃)이고, 장수현감을 역임하였다. 박근효의 아들 박춘수(朴春秀, 1590~1641)는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을 하고 화의가 된 후에 낙향하여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는 자가 언종(彦宗), 호가 아수재(我誰齋)이고,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박춘수의 아우 박춘장(朴春長)은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고향에서 저술에 힘써 '산양지(山陽誌)'(산양은 보성의 별호)를 남겼다.

박광전의 손자와 증손자들도 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다. 손자이자 박근제의 아들인 박춘호(朴春豪)는 병자호란 때 종형인 박창수(朴昌秀)와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전라도 경계 여산으로 달려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그리고 증손자이자 박춘수의 아들인 박진형(朴震亨, 1611~1672)은 병자호란 때 은봉 안방준과 함께 창의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칠현거의록(七賢擧義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처럼 할아버지 또는 증조부의 왜란 때 활약을 잊지 않고 호란 때 아들과 손자 및 증손자들이 의병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사례는 찾기 힘들 것 같다.



국내는 물론이고 상해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를 배출하다.

박진형의 아들 박만주(1659~1740)는 보성의 양사재를 건립하고, 지역에 향약을 실시하는 데에 앞장섰다. 그리고 박만주의 아들 박화석(朴華錫, 1684~1732)은 노론의 명망가 김창협의 제자였다. 당시 지방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18세기에 중앙 요직에 진출한 호남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와 함께 진원박씨 사람들도 이 정도를 넘지 못하였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이 되면 상황은 급변하게 된다. 박태승(朴泰升, 1855~1924)의 동생인 박태로는 동학의 접주로 활동했다고 한다. 한말에 와서는 일제에 주권이 강탈당하자 가산을 털어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박남현(朴南鉉)이 있다. 그는 이른바 '제주(祭酒 )사건'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이다. 그리고 학자로 명망이 높았던 박용주(朴鎔柱), 신학문의 기수 박우용(朴佑龍)이 유명하였다. 또한 박문용(朴文鎔)은 면장으로 있으면서 공금을 빼돌려 독립군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의 요인이 되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활약하여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을 받았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출신으로 만주 봉천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국내에 진입하여 활동하다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기도 하였다.

현재 종손은 박종업(朴鍾業, 1957~ )이다. 종손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중을 지키겠다는 데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고, 문중에서도 적극 협조하는 상황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불천위제례를 모시는 사당은 퇴락해 있으니, 향후에도 보존될 수 있도록 대책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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