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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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흔적
  • 입력 : 2018. 05.07(월) 21:00



역사의 흔적이 다시 우리 시대의 흔적이 된다.

광주의 오월은 5ㆍ18민주화운동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시민들의 마음에도, 도시의 거리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날의 기억들을 우리의 현재에서 기억하고 재해석하고 있다. 그것이 가신님들에 대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애도이며 존중이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 우리가 기억해야 또 하나의 흔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5ㆍ18의 흔적을 가슴에 품고 그 진실을 위해서 애썼던 푸른 눈의 선교사, 허철선(Charles Betts Huntley 1936~2017)의 흔적이다. 허철선 선교사는 노스캐롤라인 수도 샬롯 출신이고, 듀크 역사학와 컬럼비아 신학교 출신의 목사였다. 그는 1965년에 한국에 왔고 1969년부터 광주기독병원 원목으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허철선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의 원목시스템을 만들고, 병원의 복지시스템을 구축하는데 헌신한다. 또한 입원한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환자들이 지역교회에 연결한 후에 심방하여 그들의 삶과 마음을 살피는 사역을 했다. 그리고 아내였던 미세스 헌트리는 영어 성공부반을 진행하여 광주의 젊은 인재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시골사람들이 오면 그들의 거처에서 기거하게 하였으며, 젊은 예술가들이 그림을 가지고 오면 사주면서 광주전남 지역사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렇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일상은 5월 18일 이후에 아픔을 겪게 된다. 허철선의 제자였고 5ㆍ18당시에 독일 기자에게 시위대의 노선을 알려주고 통역을 해주었던 차종순 목사(전 호남신학대학교 총장)는 당시의 허철선 선교사가 5월 18일에 제일 먼저 사진을 찍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미국 사람이었던 허철선 선교사가 도망가느라 널브러진 신발들의 사진과 도청 앞에서 시신들 사진을 제일 먼저 찍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허철선 선교사는 사진을 미국으로 반출을 시도했지만 공항에서 걸리게 된다. 그 뿐 아니라 5ㆍ18 당시 그의 사택에 많은 시위대와 영화 '택시운전사'의 위르겐 힌츠페터와 외신기자들을 피신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5ㆍ18이 끝난 후에 외과수술을 한 김성봉, 박민원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 총알과 엑스레이를 가지고 미국대사관에 찾아가서 광주에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의 노력은 계속해서 묵살당하고 만다. 그리고 1985년, 남장로교 철수정책에 의해 미국으로 갔다.

허철선 선교사의 이러한 노력은 1985년 한국을 떠난 후에도 계속된다. 허 선교사는 부채처럼 가지고 있던 5ㆍ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2002년 5ㆍ18기념재단과의 14통의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진들을 5ㆍ18기념재단에 보내주는 노력들을 계속한다.

보낸날짜 2002년 08월 10일 토요일, 오후 5시 07분 22초 EDT

보낸이 BettsH@aol.com / 받는이 surnadal@hanmail.net

Dears,

I am glad to hear that the situation has changed so much there. I am grateful to God and to the patience and endurance of the Korean people that this is now the case.

한국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하나님과 이 같은 고통을 잘 참고 이겨낸 한국인에게 감사드립니다.

I am sending you now two pictures taken in May, 1980. Sateh 01 was taken by me in front of Kwangju's city hall. Sateh 02 was taken in the morgue of the Kwangju Christian Hospital by KimYoung Bok. I have enhanced the pictures just a bit so the sadly vivid colors are true to my memory.

광주항쟁 중에 도청 앞에서 제가 찍은 사진 01번과 김영복씨가 광주기독병원 영안실에서 찍은 사진 02번을 보내드립니다. 사진에 선명도를 조금 높였는데 그랬더니 이 슬픈 선명한 컬러 사진들이 내 기억을 생생하게 합니다.

We have as many as 200 or 300 pictures here. See if you would like for me to send them to you this way.

이곳에는 200에서 300장 정도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렇게 메일로 보내는 방법에 대해 고려해 보시기 바랍니다.

With best regards,

Betts Huntley (Huh Chul Sun)

허철선 목사로부터

허철선 선교사의 이러한 노력은 그가 2017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도 계속되었다. 두 달 전인 2017년 4월 5일에 설갑수 선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판 광주일지 편집번역자)과의 메일로 통해서 그 당시의 계엄군이 사용한 탄환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 기록은 설갑수 선생의 5ㆍ18기념재단의 소식지인 주먹밥 2017년 가을호에 실어졌다. '계엄군이 사용한 탄환이 HP탄이 아니라 FMJ(Full Metal Jacket)탄이었다고 말씀하셨다. FMJ탄은 탄환 끝이 깨지면서 탄환 안에 담겨있는 연성금속(주로 납)이 피해자의 몸에 작은 파편으로 퍼지게 만들어져 있다. 수술로써 수많은 납 파편의 완전한 제거는 거의 불가능하나, 탄환자체가 제거가 가능하다 하여 HP탄보다는 인도주의적이라고 여겨지는 탄환이다.' 그리고 허철선 선교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FMJ 탄환이 신체 내부에서 터져 수많은 파편이 박힌 피해자의 X-ray를 설갑수 선생에게 보내준다. 설갑수 선생은 기록에서 '허 목사님이 항쟁 다시 목격한 내용을 가지런히 정리한 것을 넘어서서 깊게 연구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렇게 허철선선교사는 광주를 지독히도 사랑했다. 그리고 5월 광주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감당했고, 5ㆍ18의 흔적을 그의 남은 시간에 채우며 광주의 고통에 동참했던 우리의 이웃이었다. 그렇게 허철선선교사는 자신이 믿고 따르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 구도자였다. 이제 광주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그가 평생 불렀던 '광주', 죽어서도 다시 돌아오고 싶었던 그 광주, 그가 온다. 5월 17일, 허철선 선교사의 유해가 양림동 선교사 묘역에 안장된다. 그 때 광주 시민들이 이제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의 흔적을 우리의 흔적으로 담아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양림미술관에서 '허철선과 오월'전시회를 한다. 5월16일은 허철선 사택에서도 전시회를 한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하는 '허철선의 밤'을 가질 것이다. 허철선 가족에게 광주도 당신들을 사랑한다는 몸짓을 할 것이다. 조대여고 학생들이 마음을 담아 글 그림 영상을 준비하고, 허철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The1904 식구들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정성껏 준비한 공연을 선보일 것이다. 부채춤도 연습하고 있다. 지금 허철선 선교사안장위원도 모집하고 있다.

다음번엔 허철선 선교사님과 5ㆍ18기록을 중심으로 기록해 보겠다.


홍인화

The 1904 대표ㆍ전 광주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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