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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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 입력 : 2018. 05.15(화) 21:00



'한국의 미래는 지난 과거와의 기나긴 싸움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마르다 헌트리가 한국 초기 교회 역사를 엮어낸 책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의 한 구절이다. 외부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역사가 아닌 스스로 오래된 폐습과의 싸움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꿈꿨다.

허철선 부부는 5ㆍ18의 현장 속에서 오래된 과거의 폭력과 싸우는 광주의 의로움을 보았고, 평생을 그 광주의 정신을 기억하고 지지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아직은 미발표된 허철선 선교사의 자서전 중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담아낸 기록을 통해 그들의 마음과 만나보고자 한다.

허철선선교사는 5월 17일 대전에서 광주로 오는 기차 안에서 일부 술에 취한 군인들을 보았으며, 5ㆍ18일부터 계엄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요일 내내 거리의 시민들은 계엄군의 공격을 받았다…예배를 보기 위해 거리로 나섰기 때문에 기독교인 중 상당수가 사전 경고 없이 계엄군의 공격을 받았다'라 한다. 5월 19일 월요일 선교부 운전기사로 근무하는 정씨와 함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서 카메라를 들고 시내로 나간다. '이 중에서 가장 끔찍했던 것은 군인들에 의해 끌려간 젊은이들의 신발이었다. 일부는 젊은 여성들의 것이었다. 이들은 어디로 끌고 간 것일까?' 그리고 수요일에 '군인들이 긴장한 나머지, 혹은 명령에 의해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광주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하고 총격전이 벌어졌다. 허철선은 시민들의 대응 사격에도 충격을 받았다. 당시 광주기독병원은 다양한 총상환자들이 들어왔고, 허철선 사택에는 많은 사람들의 피신하는 은신처가 된다.

허철선 선교사의 광주기독병원의 원목으로 환자들을 치료를 도우면서 당시의 X- 레이 사진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계엄군이 사용한 총탄이 환자의 몸과 접촉하면서 분리된 것이었다. 하나의 탄알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팔, 다리, 척추 등에 파편으로 박혀 수술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정상적인 총탄은 분해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몸을 파고 들어가 부상시키나 인명을 앗아가지는 못한다. 이러한 총탄은 나무도 관통하여 적군을 부상 시킨다'. 허철선은 이러한 총탄을 시민을 향해서 사격하는 계엄군을 보면서 그 기록들을 보관하였다. 그리고 미 대사관 등에 알려 진상 조사를 촉구한다. 그러나 매번 그의 노력은 묵살되고 만다. 허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의 운영진들의 헌신적이고 신속한 대응을 보면서 광주 시민들과 기독교인들의 성숙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들은 병원에서 역대기 7장 14절을 배포하였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나는 참회의 기도를 하며 자신을 핍박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정신이 향후 이 도시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일조할 것으로 확신한다… 내가 또 깨달은 것은 북한이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날이 올 때 북한을 치유하는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광주의 우리 친구들은 기독교의 기본을 기르친 것이다'. 그렇게 광주는 서로를 보듬으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허철선 선교사의 5ㆍ18당시의 이러한 노력은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기독병원 간호감독이었던 안성례 간호사와 외과 레지던트였던 전홍준 의사의 협력이 있었다. 두 사람은 허철선 선교사가 찍은 사진을 안성례 간호사가 보관한 후에 전홍준 의사가 그 사진을 동아일보 이태호 기자에게 전달해서 국내외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5ㆍ18 당시 초반의 기록들을 신속하게 세상에 알려서 고립된 광주를 향해서 세계인의 눈이 집중하는 역할을 감당 하였다. 허철선 선교사는 사진뿐 아니라 X-레이 사진도 보관하였다. 5ㆍ18 후에도 자신이 비밀리에 소장하고 있던 X-레이 사진을 보여줬다. 사람들에게 광주의 진상을 알리기 위하여 주변에 도움도 요청한다. 그러나 일부는 당국자들에 발설하는 등의 배신을 당하게 된다. 또 미 국무부에 증언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지만 어떠한 답변도 듣지 못하고 끝이 난다. 허철선 선교사는 계속해서 거절당하고 감시를 받지만 광주를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미국으로 철수하고 난 뒤에도 허철선 선교사는 계속해서 자신들이 한국정부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비극적 사건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그들에게 기탄없이 전했을 것이다. 정부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정도의 최악의 사진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국외로 전송하고 있었다' 그는 어떤 위협 속에서도 자신이 본 그날의 진실을 광주의 정신을 담아내고 세상에 알리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2018년 5월 16일과 17일, 마르다 헌트리 여사가 허철선 선교사의 유해를 가지고 광주에 온다. 허철선 선교사의 유해는 양림동 선교묘원에서 17일 10시에 안장식을 갖는다. 17일 전날인 16일에는 헌트리 여사와 함께 '허철선의 밤'을 개최하여, 광주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응원했던 두 분의 마음과 만나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홍인화

The1904 대표ㆍ전 광주시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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