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집안에 4형제 '일문사문장'… 전국에 이름 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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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진의 종가이야기
한 집안에 4형제 '일문사문장'… 전국에 이름 날리다
장흥 수원백씨 기봉공파 종가
  • 입력 : 2018. 05.17(목) 21:00
백광훈을 포함한 장흥 문인을 향사하는 기양사. 필자 제공
한 집안에서 4형제가 글을 잘 지어 전국에 이름을 날리다.

전남도 장흥 땅에는 예부터 지금까지 문필가가 많이 나온다. 그 단초를 연 집안이 수원백씨 기봉공파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파조는 백광홍(白光弘, 1522~1556)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수원에서 살았다. 그의 조부인 백회(白檜)가 연산군 때 장흥으로 귀양살이 와서 살게 됨으로써 장흥 사람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백세인(白世人)인데 호가 삼옥당(三玉堂)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로 첨정(僉正) 김광통(金廣通)의 딸이다. 기봉공파는 특히 글을 잘 짓는 집안으로 전라도는 물론이고 전국에 널리 알려진 가문이다. 백광홍과 그의 아우 백광안(白光顔) 백광훈(白光勳) 및 종제 백광성(白光城) 등 한 집안의 4형제가 모두 문장가로 칭송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한자로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이라고 한다.

백광홍은 장흥에 있는 사자산 아래의 기산(岐山) 마을에서 1522년(중종 17)에 태어났다. 그의 자는 대유(大裕)이고, 호가 기봉(岐峯)이어서 그의 집안은 '기봉공파'라고 한다.

그는 어려서는 기산 마을의 봉명재(鳳鳴齋)라는 서당에서 글을 배웠는데, 이곳에서 여덟 명의 문인을 한꺼번에 배출했다고 한다. 백광홍은 뒤에 시산(詩山, 지금의 태인)에 있던 일재 이항(李恒)에게 가서 공부하였다. 문장이 뛰어나서 1549년(명종 4)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552년(명종 7)에는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백광홍은 일찍이 김인후, 이이, 신잠, 기대승, 임억령, 정철, 양응정, 최경창 등과 같은 당시의 대문장가들과 도의로써 교유하였다. 평안도로 관직 생활을 떠났다. 1년 뒤 병이 있어 귀가하다 집에 도착하지도 못한 채 그만 부안 땅 처가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때가 1556년(명종 11)이다. 나이가 불과 35세였다. 아! 왜 하늘은 우리 전라도의 문장가들을 일찍 자신의 나라로 데리고 갔을까?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작품 '관서별곡'을 창작한 백광홍

백광홍은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문학으로 평가받고 있는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관서별곡'은 정철이 지은 가사 '관동별곡'보다 25년이나 앞서 지은 작품으로, 기행가사의 효시가 되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관서별곡'은 작자가 왕명으로 평안도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고 관서지방(평안도)을 향해 출발하는 것에서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것까지의 기행 노정과 산천 풍치를 시적 운치로 그려낸 가사이다. 우리 문학사에서 보면 가사는 시조율을 가졌으면서 시조에 비해 길이가 긴 장편의 노랫말이라는 점에서 운문문학에서 산문문학으로 이행하는 교량적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백광홍은 명종으로부터 '풍아익(風雅翼)'이라는 책의 전질(15권 10책)을 하사받았다. 임금이 선비들을 성균관에 불러서 시회를 열었다. 백광홍이 '동지부(冬至賦)'라는 시로 장원을 차지했다. 백광홍의 시를 본 명종이 감탄한 나머지 '풍아익'을 하사했다. 이를 종손이 소중히 보관해오고 있다. 보물 제1664호로 지정되었다(2010. 10. 25). 현재는 백광홍의 15대 종손 백인순(白仁淳, 1954~ )님이 소장하고 있다. 종손은 백광훈의 문집 '기봉집'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임금에게서 하사받은 '풍아익'을 잘 보관하여 보물로 지정받다.

그러면 '풍아익'은 어떤 책인가? 이 책의 편저자 유이(劉履, 1317~1379)는 주자를 숭배하는 학자로 주자의 뜻에 따라 '문선'에 수록된 시에서 212편, 도연명의 시집을 비롯한 여타 서적에서 34수, 도합 246편의 시를 8권으로 편집하여 '선시보주'라 하였다. 요순이래 진(晉)대에 이르는 옛 가요 42수를 뽑아 2권의 '선시보유'를 엮었다. 이어서 당송시대 시인 13명의 시 132수를 뽑아서 '선시속편' 5권을 엮었다. 이 세 책에는 기존의 주석을 참고하고 부족한 부분은 자신의 의견으로 주석을 달고 이를 보주(補注)라 하였는데, 주석의 체재는 주자가 시경의 집전을 편찬한 방식을 따랐다. 이들 3편 15권은 인간의 성정 도야에 있어서 '시경'의 보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을 묶어서 '시경의 나래(보조)'라는 뜻인 '풍아익'으로 명명하였다. 문학을 너무 철학적으로 해설한 점에서 후대의 평가는 높지 않지만 성리학이 학문과 정치의 중심이었던 조선시기에는 중요한 시학 교과서로 기능하면서 널리 읽혀졌고, 중국은 물론 조선에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다. 제15권 말에는 주자발 3편(권근의 계미자 주자발, 변계량의 경자자 주자발, 김빈의 갑인자 주자발)과 함께 '정통칠년(1442) 유월일인출'이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초주갑인자로 인출된 책이기는 하지만 판면을 살펴보면 보자(補字)가 다수 혼입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기록보다 뒤인 내사기에 기록된 1553년 경에 인출된 책으로 판단된다. 조선 전기에 금속활자로 간행된 서적 중에서 규모가 방대하고, 시학의 교과서적인 역할을 담당한 점에서 시문학의 연구 및 도서 출판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아울러 국내에 잔존하는 유일한 완질본이다. 필자가 조사차 종가를 방문했을 때 종손은 손수 가져와 보여주었다. 더욱 잘 보관하여 가문의 자랑스러움과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후세에 전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런데 수장 시설이 미흡하여 못내 아쉬었다. 관계기관의 면밀한 관찰이 더더욱 필요한 것 같다.



위토와 선산이 있고 가통을 이르려는 종손ㆍ종부의 의지가 강하니, 옛 문명(文名)이 중흥하리라

인물이 나면 그를 향사하는 사우가 없을 수 없다. 안양면 기산리에 있는 기양사(岐陽祠)가 그것이다. 여기에는 장흥 출신으로 학문과 예술을 세상에 떨친 수원백씨 9현(九賢), 광산김씨 2현(二賢), 부안임씨 2현(二賢) 등 총 13위가 배향되어 있다. 기양사는 학행이 뛰어난 문인학자들이 동시대에 배출되었으나 그 분들을 위한 사우가 없어 배향되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중 1808년(순조 8) 생원 이상원 등 20여인이 장흥향교에 통문(通文)을 발문해 사우를 건립할 것을 청했다. 또한 그때에 수원백씨 후손인 진환, 사찬 등이 사림들과 힘을 합쳐 사우를 창건하고 '기양사(岐陽祠)'라 칭하였다. 건물은 사당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강당은 정면 7칸, 측면 2칸의 우진각 지붕이다(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동계 임65~67).

기양사와 기산리 주변의 '기봉가비'나 '기봉백광홍선생문화인물선정기념비' 등의 큰 비석들과는 다르게 종가를 오면 발길이 무거워진다. 우선 종택이 아담하기는 하지만 현대식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백광홍 이후 현달자가 이어지지 못해서 그런 것 같다. 후손 가운데 백만영(白萬榮, 1760~1835)이 1822년(순조 22)에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확인되고, 이 외에는 급제자와 출사자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 하여 종가를 유지하기 위해 재산도 모았는데, 일제 때 지키지 못하고 또 상당수 유실되었다고 하는데 현재 종가에는 그때 주고받은 매매문서나 편지 등이 상당수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문중 소유 논이 아직도 있고 몇 곳의 선산도 지키고 있다.

그리고 100여점의 제기도 아직 사용 중이고 반닫이 등의 생활도구도 명가의 옛 정취를 선명히 띠고 있다. 더군다나 가통을 이어가려는 종손과 종부 이인심님의 의지가 강하니, 옛 문필의 기운이 다시 일어나리라고 생각한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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