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마음이 같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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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칼럼
우리의 마음이 같이 있어요
  • 입력 : 2018. 05.29(화) 15:32
우리의 마음이 같이 있어요. 마샤 헌트리가 여사가 떠나기 전에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남긴 말이다. 오월의 광주는 가족과도 같은 운명공동체였다. 1980년 오월, 열흘의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 마샤 헌트리와 바바라 피터슨과의 조우는 '80년 오월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마샤 헌트리와 가족들에게는 아버지 허철선 목사가 묻힌 곳이기에, 이제 광주는 삶의 일부에서 전부가 되었다. 그렇게 2018년 오월은, 38년의 시간만큼 더 깊어진 역사와 사람들이 '80년 오월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시간이었다.
마샤 헌트리의 17일 일정은 허철선목사가 근무했던 광주기독병원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0시에 허철선 목사의 안장식이 진행되었다. 거기에서 헌트리 여사는 '전능하신 하나님, 저의 남편이요. 아이들의 아버지요. 사위들의 장인이요. 선생이요. 또한 사랑하는 친구인 허철선 목사를 당신께서 사랑과 자비로 돌보아 주실 줄 믿고 맡깁니다.'하면서 영원한 생명, 부활을 소망하면서 하관예배를 드렸다. 안장식이 끝난 뒤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안장식을 취재하러 온 기자들에게 말을 남겼다. "여러분들이 기자이니까 항상 진실을 말하고 사실만을 말하기를 원한다. 이 새로운 세대와 시대를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의존하겠다."라는 말로 마무리했다. 언론인 출신이었던 마샤 헌트리 여사의 애정 어린 조언은 5·18당시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던 부분에서의 안타까움에서의 조언이었고, 현재의 대한민국 언론을 향한 격려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진 광주NCC와의 간담회를 통해서 5·18 당시의 광주기독병원과 호남신학대학교 등에서 5·18의 진상을 알리기 위해서 허철선 목사를 중심으로 일들이 진행되었던 부분들이 이야기되어졌다. 그 당시 허철선목사의 사진을 보관하여 5·18의 진실을 알렸던 안성례 의원과 장헌권 목사 등이 그 당시의 활동들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였다.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그 세월동안 견뎌준 이들에 대한 감사가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일정 동안 마샤 헌트리는 월요일마다 영어를 배웠던 제자들과 사제의 정을 나누었다. 전남대 수의학과 신성식 교수는 마샤 헌트리와 가족들과 저녁식사를 통해서 자신이 현재가 있게 해준 스승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8일 38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헌트리 여사는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우리는 지금 38년 전 5·18민주화운동의 희생자, 생존자 및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이곳 광주 국립5·18민주묘지에 모였습니다!'라고 시작된 편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광주 시민들에게서 배움을 얻었다고 말했다. 또한 마샤 헌트리는 스승보다 나은 제자들이 '민주주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 광주와 대한민국을 위해 고통 받고, 피 흘리고, 목숨을 잃은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들의 염원을 이루어주셨지요.'라고 하면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희생했던 그들의 이웃과 친구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나누었다. 마샤 헌트리는 남편의 회고록의 내용을 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보낸 20년을 되돌아 보면 다른 문화의 사람들과 그들의 언어로 가슴 깊은 대화를 나누고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사랑도 전할 수 있었던 마법과도 같은 순간들, 절대 잊을 수 없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대한 사랑, 한국인에 대한 사랑을 항상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얼마나 한국에서의 시간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자신이 한국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를 전하면서 마지막 순간 "광주에 가고 싶다. 광주에 묻히고 싶다"고 유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또한 마샤 헌트리는 남편에게 이제 광주는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두 부분에게 광주는 그렇게 자신들의 전부를 떼어서 나누어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곳이었다고 말했고, 죽어서도 광주에 묻히기를 원했던 허철선 목사의 마음을 담아 편지를 읽었다. 비가 내려 5·18민주화운동기념식에 울려 퍼지는 마샤 헌트리의 낭독은 허철선목사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하는 뜻 깊은 시간이었다.
필자도 수피아 여고에 재학 시절, 마샤 헌트리 여사의 월요 성경공부에서 영어성경공부를 배웠던 제자였다. 5·18 당시 현장에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오월의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으로 이번 행사는 내 안에 있는 오월의 빚을 갚는 시간이었다. 너무 어려서 한계가 있었지만, 살아남는 자의 부채를 안고 살았던 시간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에서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최선을 다해서 민주주의를 위해서 노력했었다. 그렇게 가슴 한편 남아있는 가신님들에 대한 부채는 38년 동안 광주에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끝임 없는 질문이었고, 삶의 담금질이었다.
마샤 헌트리와 바바라 피터슨 여사와 그의 가족들과 같이 동행하면서 내 마음에 있던 오월의 부채가 내려지는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알았던 마음의 신열을 식히고 더 단단해진 우리와 만나는 시간이었다. 1980년 오월을 견뎌내온 우리는 38년의 시간을 넘어서 다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위로를 얻었고, 앞으로 희망의 광주, 대한민국을 축복하는 시간이었다.
19일 마샤 헌트리는 광주를 떠났다. 떠나면서 "우리는 광주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했고, 마샤 헌트리는 "우리의 마음이 같이 있어요!"로 사랑의 마음을 전했다. 우리의 마음이 이제 같이 있다. 함께 하지 못했던 그 30년 동안도 우리의 마음은 하나였고, 앞으로의 시간동안 우리의 마음은 하나일 것이다. 멀리 노스캐롤라이나의 캐리에 있는 마샤 헌트리여사는 이제 우리의 이웃이며, 우리의 가족이다.
홍인화 The1904 대표 / 전 광주시의원
yglee@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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