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창극은 판소리로 하는 음악연극… 오늘날 뮤지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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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창극은 판소리로 하는 음악연극… 오늘날 뮤지컬
창극의 내력||판소리 '범내려온다'를||BTS가 편곡해서 부르고||창극이 '오징어게임'처럼||영화로 뮤지컬로 아니면||획기적인 새로운 장르로||재구성되는 날을 꿈꾼다
  • 입력 : 2021. 11.04(목) 15:31
  • 편집에디터
지난해 열린 광주시립창극단의 힐링 국악한마당 공연 모습. 광주시립창극단 제공
언제부터 창극(唱劇)이란 장르가 생겨났을까? 창극은 문자 그대로 창(唱)과 극(劇)의 복합 장르다. 창은 판소리를 가르키는 말이고 극은 연극을 말한다. 판소리로 하는 음악연극이라는 뜻이겠다. 오늘날로 말하면 뮤지컬이니 음악극이니 하는 따위가 이 범주에 속한다. 20여년 전 내가 진도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있을 때, '민요창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노래극을 만든 적이 있다. 극본은 고 곽의진 작가에게 맡기고 노래는 유장영 감독에게 맡겼는데, 내 의도는 판소리가 아닌 진도의 민요를 매체 삼아 연극을 꾸며보자는 것이었다. 방송 등 언론에서는 전문 소리꾼들이 아닌 민간인들의 참여라는 점과 민요를 극으로 만들었다는 지점들을 주목해주었던 것 같다. 당시 국립국악원 개원 50주년 기념 초청공연까지 이루어졌으니 제법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기회가 되면 내가 구상하고 기획하여 만들었던 민요창극 '진도에 또 하나 고려있었네'나 내가 연출했던 민요창극 '아리아리랑 나를 데려가오(김미경 작), 스토리텔링 기법을 동원해 재구성한 수백편의 진도토요민속여행 공연 등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하지만 내가 민요창극이라는 용어를 쓰기 이전에도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속예술 전반의 노래 예컨대 무가나 민요 따위를 매체 삼은 연극을 창극의 범주로 분류하기도 했다. 판소리만을 표현 매체 삼지 않고 전통음악의 문법을 총체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창극으로 이해하는 입장인 셈이다. 민요창극이니 소리극이니 하는 주장과 시도들이, 창극은 반드시 판소리로 해야 한다는 주장과 병존해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유영대 교수에 의하면, 창극이 발아한 1900년 초에는 '신연극'이라 했다. 새로 개발한 연극이라는 뉘앙스다. 신파극이 공연되기 시작한 1910년대에는 '구파극'이라 했다. 생긴 지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구태의연한 연극으로 치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혹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창극'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주목할 것은 '판소리' 자체를 지칭할 때도 '창극'이라 했다는 점이다. 한 사람의 창자가 한 사람의 고수를 대동하고 연창하는 장르가 판소리이긴 하지만 이미 그 안에 연극이라는 공연예술적 특성이 들어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극과 판소리는 어떻게 다를까? 판소리는 종묘제례악에 이어 두 번째로 유네스코 무형유산에 지정될 만큼 우리 노래 양식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 궁중음악 중 백미를 종묘제례악 혹은 수제천(壽齊天)이라는 합주곡을 든다면, 민간음악 중 백미를 판소리로 친다. 전통악기로 연주하는 산조(散調)라는 양식도 사실은 판소리의 어법을 악기로 연주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에 판소리가 가지는 위상이 그만큼 크다. 사전에서는 수제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라 때, 아악의 하나, 궁중의 중요한 연례 및 무용에 연주하던 관악으로, 국가의 태평과 민족의 번영을 노래하는 곡'. 내가 보기에는 부족한 설명이다. 백제의 정읍사에서 비롯된 음악임을 밝혀 설명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사전에서 어떻게 설명하고 있나? '광대 한 사람이 고수(鼓手)의 북장단에 맞추어 서사적인 이야기를 소리와 아니리로 엮어 발림을 곁들이며 구연(口演)하는 우리 고유의 민속악, 조선 숙종 말기에서 영조 초기에 걸쳐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왔으며, 지역에 따라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로 나뉜다.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이 또한 2% 부족한 설명이다. 박황은 에서 이렇게 설명해두었다. "판소리는 몇 시간이나 걸리는 , , 같은 장편의 이야기를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서 혼자 부르는 것이 원식이다. 한 편의 가사 내용을 극적으로 분석하여 본다면 판소리는 한 사람이 수십 명의 역할을 도맡은 극창(劇唱)이라 하겠다. 자문자답하고 자창자화하면서 노래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진퇴, 기복, 굴신뿐 아니라 장면의 동작 표시와 희노애락의 감정 표현까지 절조있게 진행시킨다." 지면상 본 논의를 마무리하자면 창극은 전통극이라기보다는 근대극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초기 창극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에서 고유의 음악양식을 병합시킨 종합극으로 발전하였다. 판소리를 연극화한 창극은 1900년대에서 1920년까지를 형성기로 본다. 일제강점기가 창극의 최고 전성기다. 근대극이긴 하지만 일본에 의한 문화말살정책 속에서 우리 고유의 음악문법을 계승발전시켰다고나 할까. 하지만 한국전쟁 끝나고 1960년대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든다. 서양음악 등의 범람이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지난봄 칼럼을 통해 무안군 출신 강용환을 소개한 적이 있다.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연극의 형태로 만든 최초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 창극은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키 혹은 신파극으로 불리는 장르들에 영감을 받아 재구성한 근대 음악극이었다. 1960년대 들어서 국립창극단이 생기면서 제도적인 보호정책이 실시되었다.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생기고 1964년부터 국가 문화재가 지정되기 시작한 맥락과 궤를 같이 한다. 판소리에서 창극으로, 신파극에서 구파극으로, 혹은 전통음악 장르에서 창가, 가요, 트로트, 심지어는 지금의 힙합이나 랩 등의 장으로 변천해오는 동안 수많은 굴절과 승계 혹은 혁명적인 시도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문제는 전통이라는 양식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석의 편협성이다. 예컨대 오늘날 BTS가 세계음악사에 우뚝 서 있게 된 내력과 배경에 대한 시선 같은 것이다. 이를 서양음악에 기반한 것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 오징어게임이 파장을 일으키며 세계문화사 속에 스며드는 맥락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본다. 110여 년에 지나지 않은 근대극으로서의 창극을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 아닐까. 전통으로서 보호하는 것은 철저하게 하되, 나머지 것들은 제약 없이 발전할 수 있도록 장려하는 것이 옳다. 나는 다시 꿈을 꾼다. BTS가 판소리 '범내려온다'를 편곡해서 부르고, 창극이 '오징어게임'처럼 영화로 뮤지컬로 아니면 획기적인 새로운 장르로 재구성되는 꿈을.

남도인문학팁

창극의 발생, 원각사 협률사의 내력

원각사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모종의 일들이 발생하여 1906년 문들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 명창들이 백칠십여명이었다. 판소리, 민속 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박황의 에 보면, 원각사 설립의 세가지 설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희대설(戲臺說), 둘째, 이토오히로부미(伊藤博文)의 한국 군인회관 사용설, 셋째, 이인직의 궁내탕금(宮內帑金)에 의한 건립설이다. 첫 번째의 희대설은 최남선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