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복되는 왜곡 5·18 북한군 개입설 종지부 찍나
침소붕대‧허황된 주장 연속…극우 세력 통해 반복 재생산||낭설 종지부 찍을 수 있을까…탈북민 주장 등 검증
2020년 05월 12일(화) 13:52
새터민 김영순 씨가 지난해 서울 여의도 국회 앞 5·18 천막농성장에서 열린 지만원피해자대책위와 5·18 단체장 공동 기자회견에 참석해 지만원씨가 주장한 5·18 민주화운동 투입 북한 특수부대 리스트는 거짓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뉴시스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왜곡과 폄훼는 여전하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 진상규명 범위에 '북한군 개입 여부 및 북한군 침투조작사건'이 포함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북한군 개입설'은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지면서 논란이 컸던 부분이기도 하다. 보수진영이 '북한군 개입설'을 진상규명 범위에 넣자고 주장하면서다. 논란끝에 오월단체 등에서 보수진영의 요구를 받아 들였고, '북한군 개입설'은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진상규명 범위에 포함됐다.

오월단체 등이 '북한군 개입설'을 진상규명 범위로 받아들인 이유는 명확했다. 공식적인 규명활동을 통해 '지긋지긋한' 왜곡의 뿌리를 뽑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다.

실상 '북한군 개입설'은 그동안의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이를 증명할 증거나 정황이 나온 적은 없다.

오히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 자료에도 북한군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일부 보수단체와 '수구 논객' 지만원 씨 등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 포위된 광주 북한군 침투?

시작은 지만원씨다.

"5‧18은 국가 전복을 목적으로 북한 특수군 600명이 광주에 내려와 주도한 반란 폭동이었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이다.

근거가 이렇다. "1985년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한 '광주의 분노'에는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군중 한 집단이 이룩한 성과가 기록됐다. 5·18 주도 세력은 북한 특수군 600명이고 광주 시위대 600명은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과장된 주장이다. 지씨가 거론한 '광주의 분노'에는 600명이라는 단어가 단 한 번만 나온다.

'600여명으로 구성된 폭동 군중의 한 집단은 괴뢰군 제199지원단 제1훈련소 무기고를 기습해 숱한 무기를 탈취했고 지원동 석산의 독립가옥에 보관돼 있는 많은 폭약과 뢰관들을 빼앗아 냈다.'

이마저도 사실과 다르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내 곳곳에서 수백 명, 수천 명 단위의 시민 학생들의 시위대는 많이 있었지만 199지원단 제1훈련소라는 부대는 애초에 광주에 존재하지 않았다.

또 광주 외곽은 공수부대 3개 여단을 비롯해 보병 20사단, 31사단, 전투교육사령부 예하 병력 등 2만여 병력이 철통같이 봉쇄하고 있는 상태였다. 당시 계엄군은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로는 물론 무등산 등 산악 지대 샛길까지 철저히 봉쇄하고 있었다.

한 두 명이 통과해도 가차 없이 총격을 가하는 상황인데 600명이라는 인원이 통과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 대학생은 한명도 없었다 침소붕대도

"당시 광주시에는 대학생들이 모두 꼭꼭 숨었다. 이런 칼바람 부는 시기에 광주 대학생 200여명이 책가방에 돌멩이를 가져와 계엄군에 던지고 달아났다. 군검찰은 이들을 북한 특수군이라고 의심하지 않고 대학생 200여명으로 기록했다."

지씨의 또다른 주장이다. 5·18 때 광주에 대학생은 없었으며. 북한군만 있었다는 주장이다. 지씨는 또 "5월18일 새벽부터 대한민국 땅에 젊은이들은 거의 구경할 수 없었다.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고도 했다.

사실일까.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발표를 하기 전 이미 보안사 요원, 헌병, 경찰들을 동원해 예비검속이 시작됐다. 전남대, 조선대 등 광주에 있는 십여 개 대학에 재학중이던 수많은 대학생들은 광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지씨의 주장대로 대학 운동권 학생 지도부 들은 검거가 시작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하로 숨기도 하고 도피하기도 했지만 지도부에 포함되지 않은 수많은 학생들은 검거되지 않았고 검거할 필요도 없었다.

17일 자정을 기해 선포된 계엄령 전국 확대 실시를 전후해 전남대, 조선대를 포함해 광주 시내 각 전무대, 관공서 등에 계엄군이 진주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에서 69명, 조선대에서 학생 43명이 연행됐다.

5월15~16일 광주에서 민족민주대성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대학생들의 가두시위에 경찰들은 진압없이 우호적으로 시위대를 보호했다.

지씨는 "5·18 기념재단이 발간한 증언집에 의하면 '광주 대학생들은 항쟁 기간 내내 꼭꼭 숨어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러한 표현은 증언집 어디에도 없다.

소수의 대학생이 계엄군에 체포될까 두려워 집에 숨어 있을 수 있지만 모든 대학생들이 항쟁기간 내내 숨어 있지 않았다.

● 무기고 습격 등 허구의 연속

북한 특수군이 무기고를 습격했고, 사망자 70%가 카빈총에서 나왔다는 주장 역시 허황되는 마찬가지다.

광주 시민들의 무기 소유는 5월20일 저녁 광주역에서 발포로 인한 시민의 사망과 21일 오후 1시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충격을 받은 시민들의 자위권 차원에서 시작됐다.

당시 무기고는 지·파출소 옆이나 뒤편에 마련돼있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무기 탈취에 가담했던 많은 시민들이 항쟁 이후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구속됐는데 검찰 수사결과 보고서 기록 어디에서도 북한 특수군이 포함돼 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또 1980년 5월16일부터 6월 19일까지 검찰에서 작성한 5·18관련 사망자 검사 조서에 따르면 사망자 165명의 사인 가운데 총상이 전체 79.4%로 가장 많고 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 9명이라고 나와있다. 당시 검찰 입장에서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를 축소할 이유가 전혀 없다.

● 진상조사 낭설 종지부 '기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북한 침투설은 사실이 아님이 확인될 가능성이 크다.

애초 원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북한군 침투설'이 보수진영의 요구로 논쟁 끝에 진상규명 범위에 들어갔지만, '사실'에 대한 근거를 찾기 위한 과제보다는 '허위'라는 사실을 명명백백 밝히기 위한 목적이 더 컸기 때문이다.

북한군 개입설의 허구성을 지적한 도서 '5·18때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고?' 저자인 안종철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 부위원장은 "북한군 개입설은 극우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띄고 국민들을 편가르기 위해 이미 여러차레 반박됐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며 "이번 조사를 통해 허구적 내용들이 명명백백히 밝혀지면 국민들을 현혹시키는 왜곡을 뿌리 뽑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진영 기자 jinyo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