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5월 12일(화) 16:46 |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 거나/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우리 봉준이/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오늘 나는 알겠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안도현의 시 '서울로 가는 전봉준'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전봉준은 체포될 때 다리에 골절상을 입어 들것에 실려 압송된다. 그때 누군가 찍은 사진 한 장이 남아 우리에게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을 앞두고도 의연한 그의 모습과 형형한 눈빛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녹두장군 전봉준이 거느린 동학농민군은 한때 승승장구했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장성 황룡 전투 등에서 전과를 올리고 전주성을 점령한다. 하지만 그해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대패한다. 무명옷에 죽창이 주무기인 농민군이 다연발총을 앞세운 일본군의 화력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 후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로 피신해 옛 부하였던 김경천의 집으로 갔으나 그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된다. 당시 전봉준을 체포한 자에게는 상금 천 냥에 소망하는 군수를 준다는 현상이 걸려 있었다. 붙잡힌 전봉준은 나주에 투옥되고 이듬해 1월 전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된다. 지금 남아 있는 그의 압송 사진은 이때 누군가가 찍은 것이다.

지난 11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었다. 행정안전부 산하 국가기록원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을 맞아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들의 '형사재판 원본(1895년)' 복원을 완료했다. 판결문은 전봉준을 "전라도 태인 산외면 동곡 거주.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 피고 전봉준. 나이 41세"라고 소개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의 형전(刑典)에, '군복을 입고 말을 타며 관문에서 변란을 일으킨 자는 때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을 베라'고 하는 형률에 비추어 처벌할 것이다. 위의 이유로 피고 전봉준을 사형에 처한다." 그는 1895년 3월 처형돼 시신은 서울 근교 야산에 버려진다. 이번 판결문에는 일본이 동학농민군 재판에 관여했다는 것도 나와 있다. 안중근 의사와 마찬가지로 녹두장군 전봉준도 시신 없이 가묘에 묻혀 있다.
박상수 주필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