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균의 사찰문화재 바로알기 13> 화순 운주사지(사적 제312호) ④ 범자 막새에 담긴 원나라 영향과 칠성석에 투영된 천문관념
2020년 07월 02일(목) 13:07

1. 운주사 절터와 골쩌기 원경(사진 황호균)

운주사 출토 범자 진언 막새는 티베트 후기밀교의 산물

운주사의 수수께끼는 어쩌면 석탑이나 석불에서 보다 절터에서 출토된 범자 진언 암・수막새에서 찾아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운주사에서 출토된 범자 기와는 '옴마니반메훔' 육자진언과 '옴파람' 종자진언이 표현된 암・수막새이다. '육자진언'은 관세음보살 본심미묘진언의 상징문양이 아니라 중앙에 흐리히(hrih)자가 없는 육자대명왕진언의 표현방식을 나타낸다. '종자진언'인 옴파람은 옴마니와 더불어 당시 진언공덕신앙의 한 면을 보여주는 주술어이다. 범자 암・수막새는 밀교 성격의 티베트불교에 사상적 기반을 둔 진언眞言임과 동시에 티베트 지역에서 성행한 주어呪語이다.

이러한 '범자 진언' 기와의 등장은 티베트 후기밀교後期密敎가 성행한 원나라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원의간섭기:1270년~1356년)과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범자일휘문梵字日暉文' 기와의 등장은 공민왕대(1330년~1374년)에 밀교 법회가 성행하면서 나타난 사회적인 현상과 관련이 깊고 유물 출토의 정황과도 미루어 상당한 의미를 내포한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고려에서는 불법佛法에 의하여 그 어려움을 해결하려 하였고 그러한 어려움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수행작법修行作法으로써 밀교는 인식되었다. 고려 초기부터 왕실의 독실한 귀의歸依를 받게 되었고 민중의 깊은 신앙적 의지처依支處가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에서의 밀교는 독자적인 신앙과 교단으로 발전하여 상당한 교세를 갖게 되었다.

더구나 지리적으로 가까운 보성 대원사의 '자진원오국사정조지탑慈眞圓悟國師淨照之塔'(1215~1286년)에 새겨진 또 다른 범자인 '옴아훔'과 순천 수선사(송광사) 원감충지圓鑑沖止(1226∼1293년)의 '원대 티베트문서'의 영향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13세기에 수선사修禪社(송광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원오천영圓悟天英(1215~1286년)과 원감충지圓鑑沖止(1226~1292년)의 티베트불교 성향과 시기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관련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고려 시대 절터에서는 '옴'자 가득한 수막새의 출토는 빈번하지만 '6자'가 다 쓰인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귀목문鬼目文' 기와는 고려 후기부터 유행하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범자일휘문' 기와의 편년은 14세기경으로 추정한다. '일휘문日暉文'(햇빛무늬)은 고려시대에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막새문양으로 '귀목문鬼目文'(도깨비눈무늬)이라고도 하는데 삼국시대이래 '귀면와鬼面瓦'(도깨비얼굴 기와)에서 눈만 크게 강조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범자와 함께 등장하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 시대에 성행한 밀교의 영향을 받아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상징하는 태양 무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일휘문暉文(햇빛무늬)'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고려 시대의 기와에 등장한 '일휘문' 혹은 '귀목문'의 도상적圖像的 유래는 티베트의 금고인 '강아[金鼓]'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그것은 '강아'와 일휘문의 조형적 유사성뿐만 아니라 범자 진언과 함께 하나의 세트(set)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티베트 불교(밀교)와 밀접한 연관이 느껴진다. 물론 '강아'의 도상이 '일휘문日暉文'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형상으로 등장한 유물 중에서 유사성이 가장 강하기 때문에 티베트 승려들이 항상 소지하는 '강아'에서 도상적 힌트를 얻었을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운주사 탑이 1등성 별자리처럼 배치되었다는 주장의 허구성

1999년 봄 매스컴을 통해 운주사에 대한 획기적인 주장이 발표되었다. 4월 3일에 KBS1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역사스페셜' <새롭게 밝혀지는 운주사 천불천탑의 비밀>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운주사의 석탑들이 밤하늘의 별자리를 그대로 땅에 구현해 놓은 하나의 천문도'라는 주장이 박종철씨(성암야영장 천문대)에 의해 제기되었다. TV 방송이 나간 직후 두 달 동안 매주 주말이면 2・3천 명의 탐방객들이 몰려들었을 정도로 그 반향은 매우 컸었다. 방송 내용에 고무된 수많은 탐방객은 때마침 중・고등학생들에게 부과된 '문화유적 탐방'이라는 자녀들의 수행학습 과제물도 해결할 겸 겸사겸사 운주사를 찾았다고 한다.

운주사 탑이 천문도를 모델로 배치되었다는 주장은 듣기에 따라서는 사뭇 획기적이다. 발상 자체의 신선함도 그러하거니와 관련 학계의 연구 태도에 경종을 울릴만한 일로써 침체에 빠진 운주사 연구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한때 기대해 보았다. 나아가서 칠성석은 북두칠성의 천문관측 실물데이터라는 필자의 지적과 함께 신비의 베일에 가린 운주사 석탑과 석불 조성배경의 실마리를 푸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 주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탑 위치에 대입한 별자리의 기준이 불분명하고 건립 당시의 탑 배치도에 따르지 않는 등 자못 작위적인 느낌마저 지울 길이 없었다.

박종철은 역사스페셜 프로그램에서 '운주사 탑의 별자리 배치설'을 말하면서 탑 자리에 대입하는 별을 1등성 정도의 밝은 별이라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가 제시하는 별자리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2등성 이하의 어두운 별이 6개가 포함되거나 오리온자리 베텔규스(0.2)와 백조자리 데네브(1.3) 같은 1등성 이상의 밝은 별 2개가 제외되는 등 일정한 기준이 없다. 또한 12번 18번 탑에 대응되는 별자리를 제시하지 못했고 15번 16번 17번 탑은 별자리와 방향이나 각이 크게 다르다. 더욱이 21개의 탑 가운데 6번 11번 12번의 탑은 이동되어서 원래 자리가 아닌 것을 알지도 못했고 탑 자리만 확인된 5개의 탑 가운데 '라'번 탑을 제외한 4개의 탑(가・나・다・마)도 고려하지 못했다. 이는 1991년에 발간된 '운주사종합학술조사' 보고서에 실린 도면의 탑 자리에다 별자리만을 대입하는 데 급급했지 원래 탑 위치를 복원해야 하는 필요성을 알아채지 못했기에 일어난 일이다.

또 다른 문제는 박종철이 제시한 성도는 시작점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무수히 많은 별이 그것도 일 년 365일 동안 그 위치가 변하기 때문에 천문학자들이 사용하는 현대적인 성도는 시작점을 대부분 3월 22일 춘분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박종철 씨가 제시한 성도의 시작점은 1월 19일이었다. 이는 천문학에서는 상식에 벗어난 행동이라 한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천문학에서는 동하지・춘추분점을 중요시한다. 특히 동양의 관념에서는 동지점(12월 22일)을 더 중요시하는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임의로 그 시작점이 변형된 별자리 그림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운주사 불적에 담긴 천문 관념

하지만 박종철 씨의 주장이 논거가 불충분하다고 해서 운주사에 담긴 천문관념까지 완전히 퇴색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운주사 칠성석과 산 정상의 미완성 석불(일명 외불)에 담긴 천문관념을 통해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운주사 칠성석은 간혹 원반형 칠층석탑의 옥개석으로 오해하기도 하나 원반 지름의 크기와 배치 각도가 북두칠성의 밝기와 방위각과 매우 흡사하여 고려 시대 천문관측 수준을 짐작게 하는 중요한 실물데이터로 밝혀졌다. 운주사에 조성된 칠성석은 국자 모양이 거꾸로 배열되어 있어 마치 북두칠성北斗七星이 지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이다. 사실 원반형 탑의 옥개석은 칠성석과 외형적인 모습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 지붕돌의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원반 윗면과 옆면을 빗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둥그런 선으로 설계한 점이 다르다. 운주사의 '칠성석'은 부피가 크기도 하거니와 암반에 직접 조각된 경우도 있어 '칠성바위'로도 불리운다.

우리나라에서 별의 밝기에 대해 등급으로 문헌에 남긴 최초의 자료는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영조 46년, 1770년, 홍봉한 외)의「상위고象緯考」이다. 운주사의 칠성석은 고려 후기 14세기 제작설을 평균치로 해서도 4백 년 정도 앞선 유물인 셈이다. 이는 지금까지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별 등급 데이터라고 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운주사의 칠성석은 초국보급 유물로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셈이다.

또한 예로부터 북쪽 방위를 찾는 길잡이 구실을 해 온 북극성은 북두칠성 국자 끝의 나란한 방향으로 그 간격의 다섯 배 거리에 위치한다. 운주사에는 이를 상징하려는 듯 거리는 다섯 배가 훨씬 넘지만 칠성석 국자 끝과 나란한 방향에 와불이 자리한다.

운주사의 칠성석은 운주사 천불천탑의 신비를 푸는데 중요한 자료로 새롭게 접근해야 할 우리의 '화두'인 셈이다. 더구나 다른 계절도 아닌 여름 저녁 밤하늘에 반짝이는 북두칠성을 북극성의 축으로 땅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모습으로 만든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가? 천불천탑의 대역사大役事가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진행된 사실에 대한 어떤 역설逆說인지도 모른다.

운주사 석탑과 석불의 배치형태

이처럼 운주사 탑의 배치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자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러한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운주사는 전통적인 방식과는 아주 다른 형태로 사역寺域이 구성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가람을 배치할 때는 불전 안에 불상을 모시고 그 불전 마당 앞에 1~2기의 탑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운주사는 골짜기 초입에 목조기와 건축물로 구성된 전각들이 자리하고 여기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부터 약 1㎞ 내에 100여 분의 돌부처와 30여 기의 돌탑들을 배열한 이색적인 양상을 보인다.

운주사 탑은 축선이 반듯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평지에 1열과 좌우 산 중턱에 1열씩 모두 3열을 이룬다. 20여 기에 이르는 수많은 탑은 골짜기의 평지와 산 중턱에 흥미로운 배치형태를 이루면서도 각기 다양한 조형양식을 보여준다. 옥개석의 모습이 방형(일반탑형・모전탑형・판석형)인 탑과 원형(원반형・원구형)인 탑이 층수도 2층・3층・5층・7층・9층으로 다양하게 건립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원반형과 원구형 탑, 판석형 탑은 파격적인 조형을 보여준다. 평지의 탑들은 암반을 옮겨와서 기단석으로 삼았으나 좌우 산 중턱에 세운 탑들은 자연석 암반 위에 탑을 세웠다.

21개 탑 가운데 옮겨진 탑 3개를 제외하고 탑 자리만 남은 5개의 탑을 더해 모두 23개 탑 가운데 절반 가까운 9개의 탑(8개 지역은 탑과 불상이, 1개 지역은 탑과 칠성석)은 석불군이나 칠성석과 어우러지게 배치되었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인 가람 배치인 1탑 1금당이나 쌍탑 1금당처럼 불상의 뒤나 앞에 탑을 세트(set) 개념으로 구현하려는 구체적인 조형 의도가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아울러 불상의 배치 양상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운주사 불상은 군집형태의 불상과 독립형태의 불상들로 크게 나누어진다. 군집형태의 불상들은 단애 면이 잘 발달한 암벽 벼랑을 다듬어 그 앞에 대좌를 마련하여 일렬로 배치했다. 중앙에 본존불이 자리하고 좌우에 협시불이 배치되는 기본 틀 속에서 본존불은 협시불(보살)보다 그 크기가 월등하고 대형 입상같은 예외도 일부 보이지만 좌상이 대부분이며 협시불은 소형 좌상같은 예외사례도 발견되지만 대부분 입상이다. 이러한 불상 군은 모두 6개 지역이며 이 가운데 4곳에는 그 뒷면의 암벽 정상부에 탑을 세웠다. 나머지 2곳에는 탑이 건립되지 않았는데 이는 암반이 잘 발달하지 못해서 제외된 듯하다. 독립된 형태로 자리한 불상은 모두 6개 지역이며 이 가운데 3곳에서도 주변 10m 이내에 탑이 건립되었다.

2. 운주사 절터 발굴 원경(사진 황호균)

3. 운주사지 범자문기와 출토 광경(사진 황호균)

4. 운주사지 범자문기와 출토 광경(사진 황호균)

5. '옴마니반메훔' 수막새(사진 유남해)

6. '옴파람' 암막새(사진 유남해)

7. 티베트 금고 '강아'

8. 칠층석탑과 어우러진 칠성석(사진 박하선)

8. 칠층석탑과 어우러진 칠성석(사진 박하선)

9. 칠성석(사진 박하선)

10. 운주사 칠성석 실측도('운주사종합학술조사', 전남대학교 박물관, 1991.)

11. 운주사 칠성석과 북두칠성 비교 배치도(박종철)

12. 북두칠성 개념도(인터넷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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