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세계 문화유산이 된 화순 효산리·대신리 고인돌
유럽·인도·아시아·남미 등에 거석문화 존재||고인돌, 청동기시대 귀족 무덤이나 제단 추정 ||한반도 고인돌 4만여 기 중 절반 남도 분포||화순군 도곡면·춘양면 일대에 596기 집중||화순·고창·강화도 고인돌 세계문화유산 등재
2020년 12월 08일(화) 17:09

세계 최대 규모인 화순 춘양면 핑매바위 고인돌.

관청바위 고인돌

채석장 감태바위

한반도 고인돌 분포도

거석문화와 고인돌

거석문화(巨石文化)란 인간이 자연석 혹은 가공한 돌로 구조물을 축조하여 숭배의 대상이나 무덤으로 이용한 문화를 말한다. 고인돌로 대표되는 거석문화는 유럽과 인도, 아시아 남미 등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며, 선돌(立石), 열석(列石), 환상열석(環狀列石), 석상(石像) 등 종류도 다양하다.

선돌과 열석, 환상열석은 주로 유럽의 대서양과 지중해 연안을 따라 분포한다. 선돌은 단독으로 세워지기도 하지만, 프랑스나 영국에서는 수십 기 이상이 열을 지어 분포한다. 이러한 경우 열석이라 부르는데, 프랑스 브르타뉴 카르나크 열석이 대표적이다. 환상열석은 영국의 스톤헨지와 같이 선돌이 원형을 이루고 있는 유적으로, 특수한 의식을 행하는 장소나 천체 관측의 공간으로 추정된다.

석상은 사람의 형상을 돌에 새겨놓은 것으로 제주도의 돌하르방이나 무덤 앞에 세워진 문·무인상도 포함되며, 남태평양 이스터 섬에서 발견되는 모아이(Moai)가 가장 대표적이다.

거석문화의 대표는 전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이라는 이름은 굄돌 혹은 고임돌 '고임(支)'과 '돌(石)'에서 유래하였으며, 서양에서 부르는 돌멘은 켈트어인 '탁자(dol)'와 '돌(men)'의 합성어이다.

고인돌은 크게 덮개돌과 받침돌, 무덤방으로 이루어진다. 덮개돌은 받침돌 위에 올려진 거대한 바위로 지상에 드러나 고인돌의 외형을 결정한다. 돌을 편평하게 다듬어 사용하기도 하지만, 남부지방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해 형태와 크기가 매우 다양하다. 100톤이 넘는 거대한 바위가 덮개돌로 사용된 예도 확인된다.

고인돌은 대부분 청동기 시대 지배자인 족장이나 귀족들의 무덤으로 알려졌지만, 공동무덤을 상징하는 묘표석으로, 또는 종족이나 집단의 모임 장소나 의식을 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는 것들도 있다.

고인돌 왕국, 남도

한반도에 고인돌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4만 여기로 추정된다. 한반도에 분포하는 고인돌 4만여 기는 전 세계의 고인돌 분포 현황과 비교해보면 경이에 가깝다. 일본에 500여 기, 중국 요령성에 350여 기, 절강성에 50여 기가 분포되어 있고, 유럽 전역의 고인돌 수를 모두 합해도 수천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만여 기의 한반도 고인돌 중 절반 이상이 남도에 분포한다. 남도의 고인돌 밀집도가 어느 정도인지는 영남 4,800여 기, 강원 2,000여 기, 충청 1,000여 기, 전북 2,000여기, 북한 전체 1만여 기와 비교하면 분명해진다. 즉 전 세계 고인돌의 2/3 이상이 한반도에 집중되어 있고, 한반도 고인돌의 절반 이상이 남도에 분포하고 있다. 남도는 고인돌 왕국인 셈이다.

고인돌은 왜 한반도, 그것도 남도 지역에 집중되어 남아 있을까? 큰 바위(巨石)에 영혼에 깃들어 있다는 신앙을 주된 요인으로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고인돌을 훼손하는 일은 자신과 자손에 해(害)가 된다는 믿음이 수천 년간 원형대로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남도에 집중되어 남아 있는 이유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고인돌의 덮개돌 무게는 보통 10톤 미만이지만, 대형의 고인돌은 20~40톤에 이르며, 심지어 100톤 이상도 있다. 이러한 고인돌을 축조할 때 가장 어렵고 중요한 작업이 덮개돌의 채석과 운반이다. 덮개돌은 주변 산에 있는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 바위를 이용하고 있다. 암벽에서 덮개돌을 떼어내는 데는 바위틈이나 암석의 결을 이용하였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 어떻게 떼어내서 운반할 수 있었을까?

실험고고학에 의하면 덮개돌 1톤의 돌을 1.6킬로미터 운반하는데 16~20명이 필요하며, 32톤의 큰 돌을 둥근 통나무와 밧줄로 옮기는데는 2백 명이 필요하다는 연구가 있다. 덮개돌 (지붕돌)을 운반하는 방법은 여러 개의 둥근 통나무를 이용해 끈으로 묶어 끈다거나 지렛대를 이용하는 방법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또는 받침돌에 흙을 경사지게 돋우고,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만여 점이 넘는 남도 고인돌 중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와 춘양면 대신리 일대의 계곡에는 596기의 고인돌이 집중되어 있다. 이 고인돌은 강화도·전북 고창의 고인돌과 함께 2,00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고인돌공원 표지석

효산리·대신리 고인돌 현장을 가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화순 고인돌 현장은 두 방향에서 찾아갈 수 있다. 하나는 능주에서 춘양면 대신리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능주에서 도곡면 효산리로 가는 길이다. 어느 쪽으로 가든 입구에 고인돌 유적지 종합안내소가 있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도곡면 효산리 종합안내소에서 춘양면 대신리에 조성된 고인돌 공원까지는 4킬로미터 정도다. 이 공간 안에 596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는데, 세계 최고의 밀집도다.

효산리 종합안내소를 지나면 고인돌 선사체험장이 보이는데, 체험장을 지나야 고인돌을 볼 수 있다. 먼저 만나는 고인돌이 괴바위 고인돌군이다. 괴바위 고인돌은 괴바위 고인돌 군에 속한 47기 고인돌 중 대표 선수다.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어 가장 눈에 띈다. 화순 고인돌이 세계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고인돌마다 나름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점도 한몫했다. 농경사회에서 수확한 농산물을 쥐로부터 지키는 일은 매우 중요했다. 쥐의 적은 고양이다. 그래서 가장 큰 고인돌에 고양이 바위의 옛말인 '괴바위'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고 보니 고인돌에 정말 고양이 모습이 보인다.

조금 더 지나면 관청바위 고인돌지구다. 화순 고인돌 유적 중 190기의 고인돌이 있어, 밀집도가 가장 높고 대형 고인돌들이 가장 많다. 190기의 고인돌은 그냥 아무렇게나 있질 않았다. 가장 큰 고인돌이 가장 높은 위치의 가장자리에 놓여 있고, 나머지 고인돌은 3열이었다.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덮개돌이 가장 큰 고인돌 이름이 관청바위다. 가장 크고 넓적하기 때문에 또 전설이 생긴다. 보성 원님이 보검재 고개를 넘기 직전 이곳 큰 고인돌의 덮개돌에 앉아 민원을 해결하였다고 한다. 민원을 해결했으니 원님이 앉았던 자리가 관청인 셈이고, 그래서 관청바위라는 이름이 붙는다.

관청바위를 지나면 40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는 달바위 고인돌군이 나온다. 달바위 고인돌, 이름부터가 멋지다. 달바위 고인돌 지구는 보검재 고개를 넘기 직전에 분포하고 있어 효산리·대신리 고인돌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달바위란 이름은 고인돌의 덮개돌이 커다란 달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정말 달처럼 둥글다.

보검재 고개를 지나면 춘양면이다. 조금 내려가다 엄청난 규모의 고인돌을 만나게 되는데, 세계 최대 크기의 고인돌인 핑매바위다. 길이 7.3미터, 두께 4미터 크기의 기반식 고인돌인데, 덮게돌의 무게가 무려 200톤 이상이라고 한다. 마고 할미가 운주골에서 천불천탑을 세운다는 소문을 듣고 치마에 돌을 싸가지고 가는데, 닭이 울어 탑을 쌓는 것을 중단했다고 하자 돌을 발로 차 버렸다고 해서 핑매바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핑매바위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왼손으로 그 구멍에 돌을 던져 들어가면 아들을 낳고, 들어가지 않으면 딸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지금도 바위 위에는 사람들이 던진 돌이 수북이 쌓여있다.

핑매바위를 지나면 왼쪽 산등성이에 감태바위 채석장이 있다. 고인돌에 사용된 석재를 채석한 곳으로, 조사 결과 근처 고인돌의 축조에 사용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덮개돌을 캐내기 위해 구멍을 판 흔적도, 덮개돌을 캐내어 암벽 옆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덮개돌도 있다. 왜 이름이 감태바위일까? '감태'는 옛 조상들이 머리에 썻던 '갓'의 옛말이다. 그러고 보니 바위가 갓 모양과도 닮았다. 감태바위는 고인돌의 덮개돌을 캐냈던 채석장이었다. 화순 고인돌이 세계 문화유산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축조 과정을 알려주는 채석장의 존재다. 감태바위가 중요한 이유다.

도곡면 효산리에서 보검재를 넘어 춘양면 대신리까지의 4킬로미터 구간은 걸어서 넘어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인 고인돌을 무더기로 만날 수 있을 뿐 아니라 고인돌마다 묻어 있는 민중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