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광주 3·1운동 불 지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김범수
3·1운동 당시 서울과 광주를 잇는 견인차 역할||2·8독립선언서 지참한 정광호, 김범수 등 만나||장성서 독립선언서 인쇄, 경성 시위때 민중배포||광주서 남선의원 개원 무산자 무료 치료 등 봉사||한국전쟁때 조선노동당에 강제 징발 부상자 치료||1951년, 부상자 돌보다 국군토벌대 공격 중 사망
2021년 08월 25일(수) 16:47

대구감옥 출감 후 동지들과 달성공원에서의 찍은 기념사진(1922. 9). 왼쪽부터 김태열, 최한영, 김범수, 김기형, 최정두, 서정희, 박일구, 최병준, 김복현

광주 3·1운동에 불을 지핀 김범수 선생

924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에 소개된 남선의원 개업 기사

광주 3·1운동의 견인차가 되다

광주 3·1독립만세 시위에 붙을 지핀 인물은 광주 출신의 경성의전 학생 김범수였다. 김범수(金範洙, 1899~ 1951)는 1899년 광주광역시 광산군 서방면 신안리 335-1번지, '재매마을'에서 부친 김영관과 모친 최훈의 3남으로 태어났다. 지금 북구 신안동으로, 도로명 주소로는 북구 서암대로 93번지이다.

김범수는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에 입학한 수재였지만, 이전에 어떤 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우 언수가 광주보통학교(현 서석초등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보아 광주보통학교를 다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광주서석100년사』 졸업생 명부에 그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15세 되던 해인 1913년 화순 북면에서 '원리 박부자'로 알려진 박동표의 장녀 옥(玉)과 혼인하여 1남 4녀를 두었는데, 장인 박동표는 민족경제학자로 유명한 박현채의 큰할아버지이다.

김범수는 3·1운동 당시 서울과 광주를 잇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1919년 2월 2일, 도쿄 메이지 대학에 유학 중이던 화순 출신 정광호가 2·8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1월 말 귀국한 후, 찾아간 곳이 경성 송현동의 김범수 하숙집이었다. 정광호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김범수, 박일구, 최정두 등 전남 출신들과 만나 2·8독립선언서를 국내에 배포키로 뜻을 모은다. 이들은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박일구의 처가인 전남 장성군 북이면 백암리 김기형의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기로 결정하고, 4일 경성역을 출발하여 광주에 도착하였다. 당일 박일구는 처가가 있는 장성으로 내려가고, 광주에서 하룻밤을 묵은 김범수는 광주보통학교 교사이자 광주 청년들의 비밀단체인 신문잡지종람소의 회원이던 김태열과 만났다. 정광호와 최정두는 등사판과 인쇄용지를 가지고 장성 김기형의 집에 은밀히 숨어들었다.

이들은 김기형의 협조를 얻어 2월 5일부터 6일까지 이틀간 정광호가 가져온 등사판을 이용하여 한글로 된 독립선언서 약 600장과 일본어로 된 독립선언서 약 50장을 인쇄하였다. 인쇄된 2·8독립선언서는 정광호·김범수 등이 지니고 경성으로 잠입, 서울 3·1만세 시위 당시 민중에게 배포되었다. 그리고 김태열은 50여 장을 가지고 광주로 와 최한영의 집에 보관하였고, 3월 9일 최한영 집에서 김강에게 건네진 후 숭일학교 교사인 최병준의 손을 거쳐 다음날인 10일, 광주 3‧1독립만세 때 숭일학교 학생들에 의해 군중에게 배포되었다.

김범수가 경성에서 3·1독립운동 지휘부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2·8독립선언서를 지참한 정광호가 그를 찾아 인쇄와 시위 문제를 상의하고, 서울에서 박일구와 최정두, 광주에 내려와 신문잡지종람소 회원인 김태열까지 끌어들인 것을 보면, 그가 광주 3·1독립운동에서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이는, 3월 2일 광주를 대표해서 상경한 최흥종과 김복현(김철)이 유학생인 담양 출신 국기열의 주선으로 청량리 산기슭에서 김범수를 만나 광주 3·1만세 시위를 논의했던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그가 광주 3·1운동의 견인차였고 핵심 인물이었음은 광주지방재판소에서 받은 형량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광주 3·1운동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104명 중 김복현 등 13명과 함께 가장 높은 3년을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대구공소원에서 3년형이 확정되어 대구 감옥에 복역 중, 징역 1년 6월로 감형되어 1920년 9월 출옥하였다.

무산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다

광주의 수재로 소문난 경성의전 학생이, 광주 3·1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 투옥된 후 복학하여 의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광주의 커다란 뉴스였다. 그것도 경성이 아닌 고향 광주에서 병원을 개업했으니, 그에 대한 관심은 대단했다.

1924년 11월 17일자 「동아일보」에는 김범수의 병원 개업에 관한 기사가 '남선의원 독지(南鮮醫院篤志)'라는 제목을 달고 다음처럼 실려 있다.

"광주 시내 서성정(전 광산의원 자리)에 영업을 개시한 남선의원은 종래에 총독부 의원에 근무하던 의사 김범수 씨의 경영인 바 내외 설비와 입원실도 완비되었으므로 일반 환자에게 편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씨(김범수)는 특별히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實費) 혹은 무료진료에 응하겠다고 한다(광주)"

그의 의사 개업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는데, 특히 "무산환자를 위하여 실비 혹은 무료진료에 응하겠다"는 내용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그는 간호 조수에게 "신발에 흙이 묻어있는 환자(무산환자)에게는 치료비를 받아서는 안되고, 내쫓아서도 안된다"고 늘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실제 그는 약속한 대로 무산자 계급을 위해 약속을 실천하였다. 이는 1929년 11월 1일자 「중외일보」의 다음 기사로 확인된다.

"남선의원이라면 누구나 연상하는 바, '광주 수재'라고 평판 받는 김범수 군의 병원일 줄 안다. 군은 총독부 의전을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후에 남선의원의 외과의사로 근무한 의학적 기술보다도 기미운동의 희생에서 맛본 인간고(人間苦)로서 묻어나온 인간미 그것이 범인의 추수(追隨)못할 저력의 소유자인 만치 광주 인기의 초점이 되는 것이다"

이 기사는 "가난한 무산계급자들에게는 치료비를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잘 지켜냈음을 보여준다. 그 결과는 광주인들의 존경으로 되돌아왔다. "감히 보통 사람들이 따라올 수 없는 저력의 소유자이며, 인기있는 의사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그의 의사로서의 삶은 민족과 민중을 향한 한없는 사랑이었고,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통일 조국을 꿈꾸다

그는 광주에서 인기있는 전업 의사만은 아니었다. 당시 한국의 현실이 그가 의업에만 전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독립을 위해서는 경제적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1935년 광주물산창고회사를 세운 이유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그는 여운형이 이끈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하여 건준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맡았고, 그 후신인 인민위원회 전남지부의 학무부장을 맡아 좌·우를 초월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염원했다. 그는 좌파와 우파 일부가 힘을 합쳐 1946년 3월 결성된 민족민주주의전선(민전) 전남 지부 결성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동광신문과 인터뷰를 한 다음 기사를 보면 그가 해방 공간에서 어떤 이념을 지녔고, 실천했는지를 잘 들여다볼 수 있다.

"조선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우도, 좌도 없고 남도 북도 없다. 오직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합작할 것뿐이다. 또한 몇 개인이 합작하는 것보다 민족 전체가 협력하여 합작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광주에 있어서도 좌우 합작은 필연 가능하다고 본다."

김범수는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인민위원회, 민전 등 사회주의 성향의 단체에 참여하였지만, 이는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일념 때문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투철한 민족주의자였다.

통일 정부 수립이 좌절되고 1947년 7월 뜻을 같이했던 여운형이 암살되자, 그는 정계를 은퇴하고 다시 본업인 의사로 돌아왔다. 그러나 해방 공간의 주도권을 장악한 우파는 김범수를 민전 등에 참여한 경력을 물어 좌파로 공격하였고, 좌파 또한 자본가 그룹과 가깝다고 비난하였다.

1949년 가을, 이승만 정권은 김범수를 좌파로 분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시켰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을 구금하라'는 이승만 정부의 조치에 따라 광주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그는 처가가 있는 화순 북면 원리로 피신했지만, 백아산의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사령부에 의해 강제 징발당한다. 그가 피신했던 북면 원리와 조선노동당 전남도당사령부가 인근이었고, 의사임이 알려진 결과였다.

강제 징발되었지만, 중환자 비트에서 죽어가는 부상병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인민군 부상병도 치료가 필요한 같은 민족일 따름이었다. 그는 1951년 4월, 부상자들을 돌보다 국군토벌대의 공격 중 사망한다.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광주 3·1운동의 견인차이자 민중을 사랑했던 참의사였고, 좌·우를 넘어 통일 조국을 꿈꾸었던 민족주의자 김범수는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그리고 오늘까지, 독립운동가로 서훈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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