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흉중의 경계를 넘나드는 울림의 방식은 영원하다
왜 남도트로트인가||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새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저마다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2022년 02월 10일(목) 16:44
한국공연문화학회 정기학술대회에서 를 발표했다. 손재오 극단갯돌 예술감독이 몇 가지 질의한 게 있어 답한다. 논문 한 편당 독자가 세 명뿐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논문의 심사를 대개 세 명이 맡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심사자 아니면 아예 읽는 이가 없다는 슬픈 고백이라고나 할까. 이를 총괄하는 학술재단의 무능력을 조롱하는 시선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으되 내 전공 혹은 인접 분야들의 경우, 철 지난 강령과 이념에 사로잡혀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의 차원에서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니 어떤 족쇄들을 만들어 전통이니 문화재니 따위의 항목에 채워두고, 자연스레 일어날 창발을 막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이 어디 세 명만 읽는다는 논문의 문제뿐이며 철 지난 강령에 머물러 있는 학술단체의 일뿐이겠는가. 장차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文化創意廳)으로 바꾸고 기왕의 문화재들을 문화유산이라는 맥락으로 톺아내며 그간의 전통이니 콘텐츠니 하는 담론들을 미래지향적으로 발현시킬 필요가 여기에 있다. 적어도 전통(傳統)과 인습(因習)은 구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미스트롯에서 풍류대장, 조선판스타까지

남도트로트는 수년 전 내가 만들어 쓴 용어다. 이유가 있다. 이즈음 화두가 되었던 미스트롯이니 풍류대장이니 조선판스타니 하는 노래시합 프로그램을 보면 이 행간을 읽을 수 있다. 미스트롯의 송가인을 필두로 김태연이나 이날치밴드가 승승장구한 이유 말이다. 여기에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라는 프로그램이 또 다른 팬덤을 형성하는 중이다. 모두 국악 혹은 판소리라는 전통음악을 기반으로 하거나 적어도 매개물로 삼고 있는 현상들이다. 나는 이를 '송가인의 시김새, 남도트로트의 탄생'이라는 제목으로 본 지면에 소개한 바 있다. 송가인 신드롬의 출처를 베이비부머세대의 깨달음이라는 이름으로 분석한 바도 있다. 묻지마라 갑자생에서 오팔년 개띠, 베이비부머세대의 은퇴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사적 맥락을 송가인이라는 창을 통해 추적해본 것이다. 풍류대장에서는 판소리뿐만 아니라 민요, 정가 등 다양한 국악 장르 전공자들이 참여했다. 하지만 이것을 국악 전반의 부상이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따위의 감상으로 접근하면 본질을 놓치게 된다. 이것은 '시경'의 「풍요」로부터 계승되는 노래(詩)의 본원, 남도의 흥그레타령과 육자배기를 거쳐 국악풍 발라드 김정호와 남도트로트 송가인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읽을 수 있다. 판소리 창법을 가지고 가요계에 진출했던 이들은 한농선, 안향련 등이다. 김정호나 송가인이 가요계에서 판소리를 응용한 사례라면 판소리꾼이 가요계로 뛰어든 1세대라고나 할까. 지금의 풍류대장과 조선판스타에 선행하는 국악계 스타들이다. 하지만 거듭 상고해보면 트로트의 시조라고도 하는 '목포의 눈물'의 이난영조차 본래는 민요가수에서 출발했다는 점이 보인다. 미세한 분석을 시도해보면 훨씬 다양한 층위의 장르교섭과 창발을 읽어낼 수 있다. 내가 '민요라는 이데올로기'라고 비평한 것도, 엔카와 트로트논쟁 북한민요의 정체라는 이름으로 쓴 글도 이런 일환이다.

왜 남도트로트이고 남도발라드인가

김정호의 노래 전반이 그렇지만 예컨대 '님'이라는 곡을 들어보면 완전4도 아래로 하강해 떠는 남도선율 특유의 창법이 녹아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니 노래 자체가 사실은 육자배기 선율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 것이다. 김정호의 노래를 범박하게 평할 때 남도 삼음(三音)을 토대로 만든 노래라고들 한다. 나주시립국악단 윤종호 감독은 이것이 남도선율이 아니고 무엇이겠냐고 늘 주장한다. 나는 이 육자배기의 선율을 남도 전통의 흥그레타령으로 끌어올렸고 「향가」의 맥락으로, 다시 '시경'의 「풍요」까지 끌어올렸다. 노래의 본질이라는 뜻이다. 손재오 감독은 '남도트로트'를 계속해서 추적하고 분석하며 체계화시킬 특별한 방법론이 무엇인가를 질문했다. 내가 다 알 수도 없는 일이지만 남도라는 로컬을 주목하는 시선과 트로트 창법을 분석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언급해둘 필요가 있겠다. 보다 디테일한 방법론은 후학들이 승계해나가지 않겠는가. 기본적인 내 시각은 전통이라는 이름의 어떤 대상이 아니라, 가 행하는 예술과 연행의 틀 속에서 이전과 지금 나아가 미래를 찾는 방식이다. 판소리나 민요가 어떻게 승계되고 발화되었는지보다 예컨대 지금의 트로트나 랩 속에 전통적인 것들이 어떻게 스며들어있는지를 추적하는 셈이랄까. 주지하듯이 판소리는 동편제니 중고제니 따위의 전국적인 지평 속에서 남도의 선율 및 어법으로 정착되었다. 시대사적 수요와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나라 잃고 가족 잃고 죽을 지경에 이른 백성들의 심중을 힐링시켜준 처방전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이 계면조(界面調)라고 하는 즉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었다고 나는 읽었다. 시대는 변한다. 시대정신도 변한다.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나면 새로운 세대가 또 주인으로 등장한다. 이제 트로트나 발라드가 아니라 새로운 장르의 음악을 직조할 것이고 그 음악이 시대를 공명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저마다의 횡경막을 울리는 공명의 방식이 그것이다. 이름이 바뀌고 장르가 바뀌어도 흉중의 경계를 넘나드는 계면(界面) 울림의 방식은 영원하다. 나는 남도트로트와 남도발라드라는 이름으로 접근했지만, 미래의 팬덤은 누군가 또 다른 이름으로 작명하지 않겠는가.

남도인문학팁

로컬(Local)로의 전회(轉回)

남도트로트는 '남도'로 지칭되는 로컬 미의식을 담아낸 명칭이다. 왜 로컬인가에 대해서는 수많은 논의들이 있으니 참고 바란다. 지방, 지역, 골목 등의 공간적 범주를 넘어서는 개념이다. 문제는 지방분권의 시대, 문화분권의 시대로 호명되는 이 시대를 어떻게 정의하고 대응하느냐는 것이다. 분권자치와는 거꾸로 가는 서울 중심 정책이나 수도권 집중 현상들을 호도하기 위한 레토릭일 뿐인가? 지방이 죽어가고 마을이 없어져 간다고 징징대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온갖 기회요인이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데 말이다. 근본적인 변화는 생각의 혁신에서 온다. 내가 로컬로의 전회를 주장하는 이유다. 여기서 말하는 로컬은 중앙 혹은 수도권에 대응하거나 복속되는 개념이 아니다. 중심 심장과 변방 모세혈관이 대등하게 대칭하는 글로뮈론을 주창해왔던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낱개의 사례로 풀어 이라 명명하고 본 지면에 연재해왔다. 그 일부를 모아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를 펴냈다. 향후 남도트로트에 대해서도 갈무리작업을 할 예정이다. 오랜 세월 행간과 여백에 내뱉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이들의 푸념이 펄펄 살아 시가 되고 소설이고, 문학이 되고 철학이 되어 사람들에 의해 불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송가인과 김태연의 절절한 수리성, 남도트로트를 듣는다. 미래세대로 올 또 다른 주인공들 그리고 또 다른 장르를 상상한다. 그곳에는 변함없이 배와 가슴 사이를 교섭하며 발끝에서 두성까지 온몸을 전율시키는 공명의 방식이 있다. 인간과 자연, 정신과 물질, 인간과 비인간, 서울과 지방을 정직하게 직면하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가 필요한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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