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목포를 울린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1912년 일본 고치현에서 탄생, 부친따라 한국행||목포여중·고 졸업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 재직||스승 권유로 공생원 근무, 설립자 윤치호와 결혼||1968년 타계전까지 평생 3500여 명 고아들 돌봐||장례식장에 시민 3만여 참석, 시민의 상 첫 수상||국경 뛰어넘는 인류애 실천, ‘작은 예수’로 칭송
2022년 10월 05일(수) 16:15

공생원 사랑의 가족 기념비

윤학자 여사

제1회 목포시민상을 수상하는 윤 여사(1965)

윤학자 탄생지비(고지현)

윤학자 여사 가족사진

목포시 최초의 시민장

1965년, 목포시는 '목포 시민의 상'을 제정하고 첫 수상자를 정하기 위해 시민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압도적 1위를 받은 분이 일본인 윤학자였다.

윤학자(尹鶴子, 1912~1968)가 얼마만큼 목포 시민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인물인지는, 그가 1968년 폐암으로 타계했을 때 목포역 광장에서 열린 그녀의 장례식장에 3만여 명의 목포 시민이 참석, 그녀의 마지막을 애도한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당시 목포의 인구가 16만 명 정도였으니, 조금 과장하면 목포 시민 모두가 운 셈이다. 그녀의 장례는 최초의 목포 시민장이었다. 그날 조선일보는 사회면 머리 기사로 "목포를 울린 장례식, 명복 빌어 첫 시민장"이라고 보도했을 정도다.

목포 시민의 애도 속에 세상을 뜬 윤학자가 어떤 분이었는지는 2019년 그의 아들이면서 공생복지재단 회장인 윤기(일본명 타우치 모토이)가 남긴 다음 회고담만으로 충분하다. "6·25전쟁 당시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죽어 간 아이를 위해 슬퍼하셨습니다. 그 아이에게 손수 소독한 옷을 입히시고는 그 곁에서 하룻밤을 주무셨어요. '세상에 태어나 부모의 사랑도 못 받아 불쌍하다'며 '하룻밤이라도 곁에 있어 주고 싶다' 하셨습니다. 아이들이 500여 명이나 되어서 그들을 일일이 다 사랑해주지 못한 것에 항상 미안해하셨습니다."

윤학자는 평생 목포에서 3,500여 명의 고아를 키워 낸 국경을 뛰어넘는 고아의 어머니였다. 그녀가 목포 시민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이유다.

타우치 치즈코에서 윤학자로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그녀의 원래 이름은 타우치 치즈코(田內 千鶴子)다. 한국인 이름 윤학자는 남편의 성에서 '윤'을, 자신의 이름에서 '학자'를 따서 조합한 이름이다.

그녀는 1912년 일본 시코쿠 고치현 고치시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7세 때인 1917년 조선총독부 목포부청 하급관리였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한국으로 이주한다. 그녀가 목포와 인연을 맺게 된 연유다.

치즈코는 야마데소학교(현 유달초등학교)와 목포고등여학교(현 목포여중·고)를 졸업한 후 정명여학교 음악교사가 된다. 그녀의 첫 직장 정명여학교는 1903년 미국 남장로교에서 설립한 광주·전남 최초의 여학교로, 처음 이름은 목포여학교였다. 치즈코가 공생원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공생원'에서 고아들을 돌보지 않겠느냐는 목포고등여학교 은사의 제안 때문이었다. 치즈코는 공생원에서 정성을 다해 고아를 돌보았고, 공생원을 만든 윤치호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이름마저 윤학자로 바꾼다. 공생원과의 인연은 치즈코가 윤학자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평생 짊어져야 할 운명이 된다.

윤학자의 남편 윤치호(尹致浩, 1909~1951)는 '더불어 사는 사회'라는 뜻의 사회복지 시설 '공생원'을 설립한 거지 대장이었다. 그는 1909년 전남 함평군 대동면 상옥리 옥동 마을에서 파평윤씨 종손으로 태어난다. 집안은 가난하여 소작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14세가 되던 1923년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하면서 소년가장이 된다.

윤치호가 어려운 환경을 떨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 기독교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한국명 마율리)의 도움이 컸다. 윤치호는 15살이던 1924년, 함평에 세워진 옥동 예배당의 선교사이던 줄리아 마틴의 조수가 되었고, 마틴의 후원으로 피어선성경학교에 입학한다. 1927년, 피어선성경학교를 졸업한 그가 정착한 곳이 목포였다. 목포에서 그는 나사렛 목공소를 차려 목공 일을 하면서 전남 최초의 교회인 양동교회에서 전도사로 활동했다.

당시 목포는 부산·인천과 더불어 3대 항구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었지만, 뒤안길에는 걸인과 고아가 넘쳐났다. 1928년, 윤치호는 냇가 다리 밑에서 추위에 떨고 있던 고아 7명을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 '공생원(共生園)의 출발이었다. 그의 나이 고작 19살이었다. 고아들이 사는 집 공생원이 들어서자 주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곳저곳을 옮겨 다닌 끝에 1932년 유달산 자락 대반동에 터를 잡게 되었고, 1932년 12월 공식 인가를 받는다.

1938년, 윤치호는 일본인 다우치 치즈코와 결혼식을 올린다. 다우치 치즈코가 한국인과 결혼하려 하자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이때 큰 힘이 된 분이 다우치 치즈코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딸에게 "결혼이란 국가끼리 하는 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하는 거다. 하늘나라에는 일본 사람도 한국 사람도 구분이 없다. 네가 사랑한다면 말리지 않겠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윤치호의 부인이 된 일본인 여인 다우치 치즈코, 그녀는 윤치호를 만나 윤학자가 되었고, 둘은 하나가 되어 공생원에서 고아를 돌보며 예수의 사랑을 실천했다.

8·15 광복은 한국인 모두의 기쁨이었지만, 윤치호·윤학자 부부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윤치호는 친일파, 윤학자는 원수 나라의 여인으로 낙인찍힌 것이다. 윤학자는 어머니와 함께 쫓기다시피 일본 고향으로 돌아갔다. 윤치호는 공생원 원생들과 목포 시민들이 나서 지켜냈고, 이에 윤학자도 다시 공생원으로 돌아온다.

1950년 터진 6·25전쟁도 그들 부부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었다. 인민군이 목포에 들이닥치자 주변 사람들이 피난을 권했지만, 두 사람은 "고아들을 두고 우리 가족만 도망칠 수 없다"며 고아들 곁을 지킨다. 인민군은 윤치호를 붙잡아 "친일파에다 미국 선교사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이승만 정권에서 목포 구장(區長)을 지낸 반동분자"라며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이때도 공생원 원생들과 목포 시민들이 "이 분을 처형하려면 우리를 먼저 죽여라"라고 버티며 구해준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고 국군이 진주하자, 이번에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지만, 역시 지역 주민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다.

시련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951년, 윤치호는 고아들의 부족한 식량을 구하기 위해 전남도청이 있던 광주로 올라갔다가 행방불명되고 만다. 전남도청 담당자를 만나 긴급구호를 요청한 뒤 여관에 묵었다가 청년들에게 끌려갔다는 목격담만 돌았다. 기독교 전도사이면서 일본인의 배우자였고, 강제로 맡은 인민위원장이라는 전력 때문에 좌우 쪽 모두에게 밉보여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커 보이지만, 정확한 사망 이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거지 대장 윤치호의 어이없는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윤치호가 행방불명 된 이후 300여 명의 공생원 식구를 돌보는 일은 고스란히 윤학자의 몫이 된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남편도 없고, 전쟁통에 혼자 살기도 어려우니 공생원을 포기하고 어머니가 홀로 사는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이들을 버려둘 수 없고, 남편도 기다려야 한다"며, 거부한다. 손수 리어커를 끌고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으며, 결혼 때 일본에서 가져온 오르간과 기모노 등을 팔아가며 공생원을 지킨다. 1968년, 56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였다.

국경을 뛰어넘는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은 감동이었다. 1963년 한국 정부는 그녀에게 문화훈장을, 1967년 일본 정부는 공공의 이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포상인 남수포장(藍綬褒章)을 수여한다.

목포에 남은 흔적

목포 공생원에는 윤학자와 윤치호를 기리는 기념물이 많다. 그중 하나가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이다. 1961년 건립되어 원아(원생)들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던 석조건물이 윤학자 탄생 100주년이던 지난 2012년 기념관으로 꾸며진다. 기념관에서는 공생원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공생원 마당에는 1949년 대반동 동민(이웃 주민)이 기증한 '공생원 20주년 기념비'가 서 있다. 한때 친일파라며 터부시하던 지역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라 더욱 멋져 보인다. 공생원 경내에는 '어머니의 탑'도 있다. 1968년 경향신문에서 윤학자를 '국민이 주는 희망의 상' 대상자로 선정했지만 시상식 직전에 타계하자, 경향신문이 1970년 공생원에 세운 현창비다.

2003년 목포 시민들이 성금을 모아 세운 '사랑의 가족 기념비'도 서 있다. 윤치호·윤학자 부부와 함께 어린이 7명의 모습을 새겼다. 7명은 윤치호가 처음 데려와 돌본 고아 숫자다.

1949년 건립된 강당도 옛 모습 그대로다. 해안가에 표류해 온 난파선에서 쓸만한 목재를 골라 사용했다고 한다. 가장 오랜 건물, 강당은 윤학자의 삶뿐만 아니라 1951년 행방불명된 윤치호도 지켜본 공생원의 산 증인이다.

그녀의 고향 고치시에도 "한국 고아의 어머니 田內千鶴子生誕之地"라 새긴 추모비가 건립된다. 일본 이름 타우치 치즈코가 태어난 땅이라는 추모비인데, 이름 앞의 '한국 고아의 어머니'는 한글로 새겨져 있다.

일본인으로 태어나 한국인 고아의 어머니가 된 윤학자, 그녀는 국경을 뛰어넘는 인류애를 실천한 이 땅을 다녀간 작은 예수였다.

최도철 기자 docheol.choi@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