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2022년 11월 17일(목) 15:49

세월이 하 수상하다. 뛰는 물가 나는 금리에 삶은 갈수록 팍팍해지고, 작금의 나라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지난 10월29일, 서울 한복판에서 자그마치 158명이 목숨을 잃었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대한민국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3.2m의 좁은 골목에, 그것도 내리막길에 수백 명의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압사'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희생자 일부는 서 있는 상태로 압박받아 숨지기도 했다. 외국인도 26명이 숨졌고, 부상자도 196명에 달했다. 전형적인 후진국형 사고였고, 미리 막을 수 있었기에 가슴 아팠다. 무엇보다 희생자 대다수가 이른바 '세월호 세대'들이어서 더 가슴 아프다.

참사 이후 하나둘 드러나는 '진실', 말문이 막힌다.

현장 총괄 책임자인 용산경찰서장은 참사 발생 50분이나 지나 현장에 도착했다. 그것도 차량 정체가 심각한 상황에서 차량 이동을 고집하다 참사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 서울경찰청장이 참사를 인지한 것은 처음 소방 신고가 접수된 지 1시간 21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경찰청장도 참사 소식을 인지하는 데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치안 책임자들의 사고 인지 시점은 윤석열 대통령보다도 늦었다. 참사 당일 오후 11시1분 국정상황실은 윤 대통령에게 사고 발생 사실을 보고했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참사를 인지한 것 역시 대통령보다 늦었다. 이상민 장관은 경찰 수뇌부보다 앞선 오후 11시21분 상황을 인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완벽한 '역순'으로 상황을 인지하는 '기현상'이 그날 벌어진 셈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의 언행도 어이없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상민 장관은 참사 직후 책임 회피성 발언을 일삼았다. "특별히 우려할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렸던 건 아니다." "통상과 달리 경찰이나 소방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상민 장관이 참사 초기 내놓았던 해명이었다. 논란이 커지자 그는 '정확한 사고 원인 나오기 전까지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 선동성 정치적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는 말로 책임을 비껴갔다.

박희영 용산구청장도 다르지 않다. "저희는 전략적인 준비를 다 해왔다. 구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은 다했다." "그냥 핼러윈 데이에 모이는 일종의 어떤 하나의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참사 발생 직후 그가 내놓았던 해괴한 변명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외신기자의 질문에 웃음과 농담으로 답했다가 분노를 샀다.

정부는 '참사'가 아닌 '사고'로, '희생자'와 '피해자'가 아닌 '사망자'와 '사상자'로 쓰라는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 정치권은 또 어떠한가. 참사 발생 수일이 지난 지금 정치권에서는 연일 책임 공방만 뜨겁다. 국민의 대표라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은 답답할 뿐이다.

암담한 것은 '10·29 참사'만이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 아세안 순방을 앞두고 대통령실이 MBC의 보도를 이유로 해당 매체 기자들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불허'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미국 순방 때 '비속어'가 들어간 사적 발언을 보도했다는 '죄'에 대한 대가였던 셈이다. '국익'이 명분이었지만, 유치하기 그지없다. 무슨 국익을 위한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처음 소식을 접했을 때 귀를 의심했을 정도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대통령 전용기를 마치 사유 재산 이용에 혜택을 주는 것처럼 인식하는 시대착오적 발상과 다름없다. 국제 언론인 단체 '국제기자연맹'이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하는 등 국제적 망신까지 당했다.

그뿐인가. 윤석열 대통령 아세안 순방에서 대통령실이 정상회담과 관련해 풀 기자단의 취재를 막고 전속 취재 방식으로 전환해 언론자유 침해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순방에 동행했던 김건희 여사의 행보를 둘러싼 논란도 유치하다. 문제의 본질보다는 '빈곤 포르노'라는 단어를 놓고 소모적인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 부인 중에 이렇게 미모가 아름다운 분이 있었나"라고 두둔하는 여당 중진의원까지 등장했다.

이쯤 되면 웃프다 못해 미래가 암담하다. 고금리니, 고물가니 안 그래도 불경기에 팍팍한 삶인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자꾸 거꾸로 흘러간다. '후진국형 참사'는 반복되고, 국민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 시스템은 총체적 부실이다. 지도자급 인사들은 면피성 발언으로 책임 회피에 급급하고, 정치권은 소모적인 정쟁만을 일삼고 있다. 국가를 대표하는 대통령마저 비속어로 세계적 망신을 사더니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막아 스스로 비호감도를 끌어올렸다.

독재자 이승만을 4·19 혁명으로 끌어내리고 5·18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6·10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고 촛불 민심으로 대통령까지 바꿨던 대한민국인데, '실질적' 민주주의의 완성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선거 때면 여전히 위력을 떨치는 지역주의, 리더십의 실종, 극심한 정쟁과 이념 갈등, 만연한 정치 불신과 정치 혐오증까지…. 거꾸러 가는 듯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선진국'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이 부끄럽다. 부끄러움은 언제까지 우리의 몫이어야 할까. 한숨이 멈추질 않는다.

홍성장 기자 seongjang.h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