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출생은 한 세계의 장례와 또 한 세계의 세례를 잇는 생사 교직의 우주적 사건"
안태(安胎)에 대한 묵상
아이가 자궁을 박차고 나오는 이 과정은 줄탁동시다.
양수라는 홍수를 건너온 익사로부터의 구제다.
갠지스장이나 요단강에서 행해졌던 세례의 다른 이름이다.
2022년 12월 29일(목) 14:27
안태(김영균의 탯줄코드 중에서)
나는 큰 소리로 “엄매!” 하고 소리치면서 이 세상으로 왔다. 내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만, 생전의 생모께서 늘 해주신 얘기다. 1897년생 아버지 예순여섯에 얻은 첫아들, 내 탄생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으셨을까? 마을 사람들이 이구동성,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았냐 했다. 어머니는 자그마한 땅뙈기를 받는 조건으로 품은 아들을 핏덩이로 아버지께 넘긴 씨받이셨다. 역설적으로 전통시대의 악습이 베이비부머 시대의 끝자락까지 남아있던 탓에 나는 이 세상에 올 수 있었다. 강물처럼 쏟아져 내린 양수의 세례를 받고 공기 호흡을 위한 첫울음을 우렁차게 터뜨리던 순간을 그리 말씀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자박자박 걸음걸이가 시작되던 때였을까. 생모께서 어린 나를 이끌고 집 앞 해안 자락을 짚어주셨다. 내 안태를 묻은 곳이었다. 광활한 염전과 일부 논으로 구성된 바닷가 언덕배기, 사시사철 갯바람이 소요하는 갯골의 한 기슭에 내 태는 묻혔다. 서정주는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팔 할이 바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나를 키운 구할이 갯바람’이라고 말한다. 나랑 한 번도 같이 살아본 적이 없는 생모는 수년 전 내 생월생시에 운명하셨다. 북두칠성의 문을 여시고 갯바람의 궁문을 열어 나를 이 땅에 내려놓으시던 바로 그 시각에 말이다. 내가 늘 삶과 죽음의 교직을 ‘안태’로 읽어내는 내력이다.

안태고향에서 안태모국까지

의학적으로 분만의 과정은 3기로 나뉜다. 김영균은 <탯줄코드>에서 이렇게 말한다. 분만 1기는 산모에게 규칙적인 진통이 오며 자궁의 문이 열리는 단계다. 분만 2기에 들어가면 자궁 입구가 완전히 열리고 양수가 홍수처럼 터져 나온다. 이때 어두운 자궁에서 환한 빛의 세계로 아이가 나오면 탯줄을 자른다. 아기는 첫울음을 터뜨리고 공기 호흡을 시작한다. 분만 3기에 이르면 자궁으로부터 태반이 떨어져 나오고 출산의 과정이 끝나게 된다. 의학적 설명이기에 건조하다. 그래서 김영균은 여기에 신화를 오버랩하고 세계 모든 지역에 산재한 홍수신화를 연결하여 해석한다. 성경 창세기의 궁창과 태초의 사건도 출생의 사건과 연결하여 해석한다. 탁월한 견해가 아닐 수 없다. 탯줄을 자르고 태반이 나오면 이를 매장한다. 그래서 자기가 태어난 곳을 ‘안태고향’이라 한다. 디아스포라 한인들은 한국을 ‘안태모국’이라 한다. 안태가 한국 전체를 상징하는 말로 확장된 셈이다. 안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김유신에 대한 기록이 최초라고 알려져 있다. 김유신의 태가 묻힌 곳을 고산(高山)이라 하고 태령산(胎靈山)이라 부른다. 김유신의 태(胎)를 영(靈)으로 모신 산이라는 뜻이다. 시신의 매장과 동일하게 음덕(蔭德) 풍수를 말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안태를 위한 관리를 임명하고 태장경(胎藏經)을 만들어 태실지(胎室地) 등을 운영했다. 이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것이 삼남지역에 산견되는 태실들이다. 안태를 허투루 여기지 않고 조상과 연결되는 영적 끈으로 여긴 것이다.

자궁과 거꾸로 자라는 태아(김영균의 탯줄코드 중에서)
출생이라는 사건을 보는 눈

태(胎)는 태아를 둘러싸고 있는 난막(卵膜), 태반(胎盤), 탯줄, 심지어는 태아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난막에는 동물의 알을 싸고 있는 비세포성의 피막, 알 자체에서 분비되는 제1차 난막, 난소 안에서 알을 싸고 있는 세포에서 분비되는 제2차 난막, 수란관의 벽이나 부속선에서 분비되는 제3차 난막이 있다. 우리의 고대신화 중 특히 건국신화와 관련된 대부분의 영웅들이 알에서 태어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이게 난생(卵生)신화다. 인물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하지만 신화적 수사가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난막의 난(卵)이 알을 뜻하는 말이니, 그림문자인 한자를 만들어낸 사람들이 허투루 ‘알(卵)’이라는 용어나 개념을 썼겠는가. 신화적 언술에 포섭된 이야기하기 방식을 읽는 눈이 필요하다. 태반(胎盤)은 ‘태아와 모체의 자궁을 연결하는 기관으로 태아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배설물을 내보내는 기능’을 하는 곳이다. 단순히 안태라고 할 때는 이 태반을 가리킨다. 태반의 반(盤)은 쉽게 말하면 넓고 큰 접시다. 태아를 받치고 있는 쟁반이다. 내가 여러 차례에 걸쳐 ‘씻김의례’를 불교 관련 탑의 노반(露盤)이나 제례의 ‘술 만들기’로 해석했던 사례들을 참고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태어나는 아이의 영혼도, 죽어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넋도 이 태반이라는 상징적 쟁반에 담긴다. 분만의 과정 자체가 양수막을 통과하고 자궁의 입구를 통과하며 마지막으로 질의 입구를 통과해야 한다. 아이가 자궁을 박차고 나오는 이 과정은 줄탁동시(?啄同時)다. 양수라는 홍수를 건너온 익사로부터의 구제다. 갠지스강이나 요단강에서 행해졌던 세례의 다른 이름이다. 태반을 왜 햇볕 좋고 그윽한 곳에 고이 묻었는가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역설이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탄생하기 이전의 세계를 매장하는 장례식이다. 출생은 한 세계의 장례와 또 한 세계의 세례로 이어지는 생사 교직의 우주적 사건이다. 그래서 사람의 아이들은 어머니의 자궁문을 나서며 지축이 흔들리는 울음으로 세상을 시작하는 것이리라. 한 세계를 장례 지내는 슬픔의 울음과 또 한 세계를 창조하는 환희의 울음으로.

제주도의 삼승할망(삼신할머니, 삼성혈 전시관)-김영균의 탯줄코드 중에서
남도인문학팁

탯줄 끊기, 나를 장례 지내고 나를 세례 하기

출생이라는 사건이 이와 같다. 이전 세계에 대한 장례의식과 현 세계에 대한 세례의식 말이다. 왕실에서 이어져 온 태실과 태항아리가 그러하며 나의 안태와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간 민중들의 수많은 탯자리가 또한 그러하다. 태는 과거의 것이니 조상을 잇는 새끼줄이요, 출생 이전의 나의 세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내가 한 생명으로 오기 전 세상의 근원을 알 수 없듯이, 홍수와도 같은 양수의 세례를 받고 광명한 세상으로 나온 후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다. 주목해야 할 점은 김영균이 <탯줄코드>에서 말하고 내가 또 받아서 몇 차례 소개했던 리본커팅의 의미들이다. 이전의 칼럼 중 줄자르기(2018. 10. 19일자), 리본커팅(2017. 2. 17) 등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탯줄 자르기는 이음과 끊음의 변증법 같은 것이다. 내 이전의 세계를 잘라내지 않으면 내가 어머니로부터 독립적인 개체로 바로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태를 우리말로 ‘삼’이라 한다. 생명을 주관하는 신격을 ‘삼신’이라 한다. 삼신할머니가 그것이다. 삼(모시)이나 새끼줄을 꼬아 묶는 일을 ‘삼는다’고 한다. ‘삼기다’에서 ‘생기다’라는 말이 나왔다. 삼 곧 안태는 죽음과 교직되는 삶의 다른 이름이다. 다난을 거듭했던 검은소의 해가 간다. 2023년 계묘(癸卯)년은 검은 토끼의 해다. 천간(天干) 들어 하늘의 수를 보니 검은색이요, 지지(地支) 들어 땅의 수를 들어 보니 토끼라 그렇다. 내 개인적으로는 바람 많은 바닷가 언덕에 태를 묻은 지 한갑자를 맞는 해이기에 남다르다. 월궁에 오른 항아가 두꺼비가 되었다가 토끼로 변했듯 내게 남은 일들이 있다. 두껍게 덮여 그저 괴팍해졌을 뿐인 한 갑자의 안태를 장사지내는 일 말이다. 그것이 새로운 세계를 ‘삼기는’ 일이자 이전의 세계를 승계하는 대대법(對待法)일 것이다. 한 갑자를 돌아서는 것이니 여한이 없다. 안태의 장례와 세례를 묵상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노송이 풍상에 스러지듯이, 껍질도 송피도 알맹이도 뿌리도 남김없이 그저 그윽이 남도 산하의 숲과 갱번에 스미기를 바랄 따름이다. 독자 제현의 송구영신을 빈다.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