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왼손
노병하 사회부장
2023년 01월 12일(목) 14:12
노병하 부장
2023년도 벌써 열흘이 훅 지났다.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은 삶의 변화가 많지 않고, 처리해야 할 일들(대략적으로 엇비슷한)이 계속 주어질 때 오는 현상이다. 익숙함이 주는 망각 같은 것이다.

그날은 그나마 여유가 있었다. 전날 화정동 아파트 붕괴 사고 1주기와 관련, 여든네번째 일주이슈를 막 마친 터였기 때문이다. 전날 전쟁통 같은 마감에 비춘다면 이날 오전은 마치 ‘모비딕’이 지나간 바다 같은 느낌이랄까.

오후 들어 한 노인이 사무실을 방문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오는 직원들에 의해 들어와서는 편집국장실 옆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무슨일인가 주변에 물어보니 “무언가를 말씀하시려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망설여졌다. 거대한 고래가 지나간 뒤의 정적을 조금 더 즐길 것인가. 저 노인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가. 망설임도 잠시, 제보의 90%는 사회부다. 나설 수 밖에.

보통 신문사 제보의 80%는 개인과 관련 된 것이다. 제보의 형태를 띠지만 자신과 대치되는 상대를 힘들게 하기 위해서거나, 법원 판결을 앞두고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서, 혹은 관공서나 누군가에게 기분이 상해 의도적으로 해를 가하고자 하는 경우들이다. 가끔씩은 정말 엉뚱하게도 ‘인류가 놀랄만한 발명을 했는데 아무도 몰라준다’며 기사를 써달라고 오는 사람도 있다.

들어보면 수첩을 연 것이 후회되는 상황들이지만 일단 이야기가 다 끝날 때까지 들어주는 것이 예의다. 어찌됐던 회사까지 찾아온 사람 아닌가.
물론 이런 류의 이야기는 그 어떤 것도 지면에 나가지 않는다. 또 사전에 공지도 해준다. 그러면 상당수는 “왜 이게 기사가 안되느냐. 당신들은 뭐하는 사람이냐”며 화를 낸다.

노인들의 경우는 치매로 인해 신문사를 찾는 경우도 있다.

‘내 물건을 누가 가져갔는데, 아무개가 의심된다’, ‘가족들이 날 굶긴다’, ‘사회복지사가 집에 올 때마다 나를 괴롭힌다’ 등이다. 이런 경우엔 다 듣고 달래서 돌려 보낸 뒤, 해당 관공서에 지원과 관심을 당부한다.

이날 회사를 방문한 노인도 최소 80세에서 90세 정도로 보였다.

한숨을 크게 들이 쉬고 앞으로 다가갔다. 노인은 앞에 다가가도 눈치를 못 챘다. 회의실로 안내하는데도 계속 쳐다 보기만 했다.

그러더니 이내 “내가 귀가 안 들려서요”라며 크게 말했다. 긴 오후가 될 것 같은 예감과 함께 그를 회의실로 안내했다.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로 아주 천천히 회의실로 따라왔다.

그는 “글로 적어주세요. 귀가 안 들립니다”라고 다시 답했다.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글을 통해 신문사를 방문한 이유를 물었다.

그는 “제가 전남일보를 보고 있는데 신문 값을 어떻게 내야 할지 몰라서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정리하자면 전남일보를 보고 있는데 신문 값을 낼 때가 됐는데 배달하는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로용지 등은 받아 봤냐고 물었더니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고 귀도 안 들려서 그동안 배달사원에게 직접 지불했다고 했다.

집이 어디냐고 필자가 묻자 광산구라고 답했다. 수첩에는 꼬불꼬불 회사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질문이 오고 가면서 점점 필자의 마음은 몽글몽글 해졌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귀도 안 들리는 노인이 광산구에서 버스를 타고 전남일보를 찾아왔다. 신문값을 내겠다고 말이다.

어쩌면, 배달사원이 방문 했을 수도 있을 터다. 혹은 전화가 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귀가 안 들리는 그이기에 놓쳤을 가능성이 높다.

기다려도 안 오니 새해 벽두 초부터 낡은 가방을 메고 오래된 수첩과 함께 필자의 회사를 방문 한 것이다. 사실 그렇게까지 책임을 가지고 임할 일은 아닐 것인데…

그러다 결정타를 맞았다. 그의 옆에 놓인 모자에 노란색으로 선명하게 ‘국가 유공자’라고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온 것이다. 갑자기 앞이 흐려졌다. 그가 전남일보 독자여서가 아니었다. 작은 책임이라도 미루지 않기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온 그 마음이 너무 귀해서였다. 나아가 그가 수십여년 전 전장에서 목숨을 건 댓가로 지금 이 자리에서 마주 보게 된 것에 대한 감사가 꾸역꾸역 밀려 올라왔다. 잠시나마 그에게 다가가는 것을 주저했던 것이 미안해졌다.

이런저런 감정들이 겹치면서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걱정하지 마시고 집에 돌아가 계세요. 어르신’이라고 글로 적으며 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아 들었을 따름이다.

이후 그의 낡은 가방을 들쳐 매고 왼손을 잡은 뒤 조심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 안될 것 같았다.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그를 부축하며 조심조심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제가 잘 못 걷습니다. 6·25 사변때 다쳐서… 사람들 괴롭히지 않게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그가 말하자 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덕분에… 덕분에 이리 잘 살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필자의 말이 그에게 들렸을지 만무하지만 그는 자꾸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손을 놓으며 “들어가세요. 바쁜 양반이”라며 다시금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그날 하루, 그 노인에 대한 복지와 지원 여부를 체크하면서 틈틈이 오른손을 쳐다 봤다. 그의 왼손을 통해 전해졌던 온기가 조금도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감사한 것만 느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