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토종씨앗은 한 알의 우주 씨앗이다”
토종을 지키는 사람들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은 생명철학, 생태철학, 농사철학, 몸철학, 삶의 실천철학이며 세계관이자 우주관이라고 말한다. 토종씨앗 지키는 일이 문화의 씨, 역사의 씨, 어쩌면 한 알의 우주 씨앗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
2023년 01월 26일(목) 16:31
“땅속 땅갱아지/ 논밭 갈아주고/ 지랭이도 흙을 일궈/ 거름기를 보태네/ 큰 논배미 김매기/ 우랭이가 해결하고/ 무당벌레 야금야금/ 해충 잡기 선수/ 앞뒷산 뻐꾸기도 장단 맞춰/ 호미자루 가볍구나” 무학(無學)의 토종씨앗 지킴이 장흥의 이영동씨가 쓴 시이다. 무학이라니 배운 게 전혀 없다는 뜻일까? 제도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뜻일 뿐, 오히려 그 누구보다 뿌리 깊은 공부가 내면에 들어있는 분이다. 지난해 봄이던가 그의 연구실 겸 자택을 들렀다. 출생에서부터 갖은 고생을 다하며 고향에 뿌리내린 까닭, 농사를 지으며 토종 씨앗을 보존하고 전파하는 데 일생을 바친 내력 등을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생애담과 씨앗운동에 대해서는 더불어 할 얘기가 많으므로, 지면을 따로 하여 소개하기로 하겠다. 지금도 그의 거실 겸 씨앗 곳간에는 각양의 씨앗자루 외 본인이 쓴 각종 싯구가 걸려있다. 씨앗자루가 토종을 지키거나 배양하는 것들이라면 그의 시(詩)는 토종의 마음을 보존하거나 배양하는 씨앗들일 것이다.



인도의 나브다냐에서 남도의 씨앗지킴이들까지



‘토종’의 범주 혹은 개념은 어디까지일까? 장흥의 이영동씨가 수집하고 보존하며 전파하고 있는 씨앗들은 모두 ‘토종’인가? 예컨대 1832년 귀츨라프가 한문 성경을 전하며 원산도 등지의 서해 섬에 함께 전파한 중국감자를 토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실물과 함께 중국어 감저(甘藷)라는 이름이 수입되어 ‘감제’라고 한 바 있다. 지금은 하지감자로 통칭한다. 우리 고향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 하고 이와 구별하기 위해 북감저(北甘藷)라 한다. 물론 200여 년이 지났으니 토종의 범주에 넣는다. 그렇다면 50여 년 전 미국에서 들여온 ‘지게감자’나 1950년대에 중국 배추를 개량한 ‘청방배추’는 토종으로 인정할까? 몇 년간 재배를 지속해야 토종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식물의 생리에 따라 최소 30년 이상 고정되어 토착화된 것’ 등의 주장이나 규정이 있다. 하지만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예컨대 민속학을 정의할 때, ‘3대에 걸쳐 변하지 않고 지속 되어 온 문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한다. 이 정의에 동의할 수 있겠나?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에서, 도깨비의 전통성과 현대적 의미를 톺아내고, 남성성을 문제 삼은 이유도 다르지 않다. 관점이 변하면 개념도 변한다. 토종이나 토속 혹은 전통에 대한 문제의식도 다르지 않다. 당대의 세계관이 합의하는 어떤 지점이나 시기,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성숙한 시선과 수준이 이 범주를 결정한다.

토종씨앗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몬산토 등의 제국주의적 횡포와 대응에 관한 것이다. 세계 각 지역에서 이에 대항하는 많은 운동이 일어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인도의 반다나 시바가 앞장서서 토종씨앗 지키기 운동을 했던 비정부기구 ‘나브다냐’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다국적 기업의 유전자 변형 생물을 막고 토종 씨앗을 보존하며, 전통적인 농업을 지키기 위해서 발족한 운동이다. 미국의 몬산토 회사가 1995년 유전자 변형콩을 상품화하면서 씨앗을 독점하려는 시도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에 저항하는 운동 또한 활성화되었다. 나브다냐 운동은 간디의 비폭력 저항 운동의 뜻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칩코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기도 하다. 칩코(Chipko)는 힌디어로 ‘껴안다’라는 뜻이다. 18세기 전설적인 운동과 1970년대의 광범위한 운동이 가지는 명암에 대해서는 따로 지면을 할애해 소개하겠다.

장흥의 이영동씨를 비롯해 남도에도 토종씨앗지킴이들이 많다. 2022년 초에 전남여성가족재단에서 출간한 여성생애사 ??토종씨앗을 지키는 전남여성들??의 주인공인 김순덕, 안희순, 변현단 등이 이른바 씨앗철학을 실천하는 장본인들이다. 이들 주변에는 예컨대 장흥의 <씨앗곳간 협동조합(준)>처럼 행동하고 실천하는 그룹들이 있다. 전국의 많은 이들이 토종씨앗을 지키고 가꾸며 보급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역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문화적으로 말하자면 순혈주의다. 전통문화라 호명하는 실체들은 사실 당대의 합의나 수요에 의해 재구성되어온 것이라 보면 된다. 토종씨앗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변현단이 토종씨앗 지킴이를 자처하면서도 순계(純系)주의를 경계한다고 말하는 이유일 것이다(변현단, ??씨앗, 깊게 심은 미래??(드루, 2022). 슬로푸드 기관에서 시행하고 있는 <맛의 방주>를 이용해 토종씨앗을 미끼 삼는 경우도 지적된다. 존중하고 격려하며 확산해가야 할 맥락이라 굳이 소소한 그늘까지 얘기할 이유는 없다. 변하지 않는 것은 지역의 풍속과 언어가 사라지듯이, 토종 씨앗도 사라진다는 사실이다. 변현단은 ??씨앗철학??(도서출판 들녘, 2020)에서 말한다.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은 생명철학, 생태철학, 농사철학, 몸철학, 삶의 실천철학이며 세계관이자 우주관이라고. 토종씨앗 지키는 일이 문화의 씨, 역사의 씨, 어쩌면 한 알의 우주 씨앗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남도인문학팁

진도의 충제(蟲祭), 절멸후유종(絶滅後遺種)에서 얻을 지혜

진도지역에서는 설날이나 대보름에 지내는 마을제사를 주로 ‘거리제’라 하고, 여름 초입에 지내는 제사를 ‘충제(蟲祭)’라 한다.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넋들을 불러모아 마을의 주신격(主神格)으로 대우하고 천하 만물과 생태공동체의 조화를 도모했던 그 마음들에 대해서는 본 지면에 여러 차례 소개했다. 세월호를 맞이했던 마음, 불의를 딛고 일어섰던 5.18의 마음, 한해륙의 한(恨)을 감싸 안았던 남도의 마음 등이 그렇다. 지난 내 칼럼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충제는 용어 그대로 하자면 ‘벌레(蟲) 제사(祭)’이다. 단순히 해충을 퇴치해달라는 제사일까? 오래전 전경수 전 진도학회 회장의 보고로 잘 알려진 진도 하사미 마을 충제의 축문이 긴요하다. 내용 중“...절멸후유종(絶滅後遺種)”이란 구절 때문이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해충을 퇴치하고 곡식 종자를 남겨달라’는 취지로 해석한다. 하지만 전경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벌레들을 없애주라(絶滅)’ 요청하면서도 ‘벌레의 종자만은 남겨달라(後遺種)’의 뜻으로 해석한다. 나는 모 학회에서 전경수의 뜻을 받아 이렇게 풀이했다. 전자는 직역(直譯)이고 후자는 의역(意譯)이다. 힘세고 권위 있는 신격이 아닌, 자손 없이 죽은 어떤 할머니 등을 주신격 삼는 마음을 주목하자. 마을 제사 이름조차 ‘거리제’라 하는 마음을 보자. 왜 이 대목을 의역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조도사람들을 포함해 서남해 어부들은 조기잡이를 하면서도 ‘만선을 바라지만 씨고기는 남겨달라’고 노래했다. 전쟁이 나서 모든 것 다 버리고 피난할 때도 씨앗자루 만큼은 복부에 차고 간다. 씨앗이 있어야 곡식이든 문화든 대를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해충 일지라도 종자만은 남겨달라는 진도사람들의 마음이다.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세대 간 계층 간 지역 간 갈등이 가장 높다고 한다. 분단된 것도 모자라 지역을 다시 나누고 성별로 나누고 세대로 나누어 갈등한다. OECD 자살률 18년째 일등을 하는 나라, 영화 ‘오징어 게임’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들이 있다. 상대편이 해충 같기에 박멸하고 싶겠지만, 그것으로 선진국 혹은 새시대를 맞이하기 어렵다. 분단의 역사가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예로부터 새집을 지어 살림을 시작하는 일을 ‘성주 올린다’고 했다. 성주의 신체(神體)가 부루단지고 토종씨앗을 담는 씨앗자루가 부루단지다. 해마다 성주그릇에 햅쌀을 담아 모신다. 토종씨앗이 신(神)이기 때문이다. 검은 토끼의 해 부루단지에는 어떤 햅쌀을 넣어야 할까. 우리 마음의 부루단지에 담을 종자(種子), 진도의 충제가 말해주는 것들을 경청한다.
편집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