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전쟁과 고려인>우크라이나 흑토는 계절농업인 고본지의 최적지
김영술의 우크라이나 고려인 ④고본지
비옥·온화한 기후 천혜의 조건
1950~60년 고려인 대규모 정착
전쟁 격화 된 남부지역서 농사
양파, 참외, 토마토 등 주재배
불법 일꾼 고용해 불안한 생활
고려인도 임시 움막생활 많아
2023년 02월 02일(목) 11:28
예전 고려인의 고본지 현장 모습.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누구인가? 우크라이나 거주 고려인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크게 분석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 맥락 측면의 고본지 이주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맥락 측면의 무국적자이다. 소련 붕괴는 이른바 고려인 고본지 문제가 무국적자라는 존재의 배경에 처하게 만들었다. 자세히 보면 우크라이나 고려인 이주사와 삶 자체가 이주성과 난민성을 지닌 혼합 이주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고려인은 주로 고본지(계절농업)를 위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주해 와서 정착해 살아오고 있는 자들이다.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흑토와 온화한 기후라는 천혜의 영농 조건을 가지고 있다. 흑토는 석회질이 풍부한 검은색 토양으로 매우 비옥하다. 우크라이나는 전 국토의 81%가 경작 가능지역이며, 이 중 60%가 비옥한 흑토 지대이다.

우크라이나에 고려인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흐루쇼프 해빙 기간 동안 거주 이전이 허용되면서였다. 특히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고려인들이 미콜라이우, 헤르손 지역 및 크림 지역에서 참외와 양파 재배를 위해 토지를 임대하여 대규모 정착이 시작되었다. 대부분 고려인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왔다.



비탈리 김은 고려인 4세로 2020년부터 미콜라이우주 주지사를 맡고 있다.
현재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거주하는 대표적인 곳은 미콜라이우 주다. 주지사는 고려인 4세 비탈리 김이다. 고려인은 양파, 당근, 토마토 등 야채를 주로 재배한다. 미콜라이우 지역은 농업 잠재력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으며, 지리적 위치(교통, 항구, 도로)가 좋은 곳이다.

헤르손 주에도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헤르손은 우크라이나 남부에 위치하며 최대 항구 오데사와 접하고 있다. 2001년 이후로 일부 디아스포라가 영주권을 받거나 한국, 다른 국가 또는 우크라이나의 다른 지역으로 떠났다. 또한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에는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이곳 고려인들은 약 20%가 우크라이나인 및 다른 국적의 대표자들과 결혼하여 혼혈 가정을 이루고 있다. 2013년까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한인 디아스포라의 수는 급격한 증가를 겪었다. 이곳은 예전에 고본지가 많이 이루어졌던 곳이다. 도네츠크 주에는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다. 특히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 남동부에 위치한 항구 도시로 행정 구역상으로는 도네츠크 주에 속한다. 이곳은 도네츠크 주 제2의 도시로 곡물 교역의 중심지다. 1933년 새로운 철강 공장인 아조우스탈이 칼미우스 강변에 건설되었다. 마리우폴은 크림반도와 돈바스(도네츠크?루한스크) 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육로이며, 우크라이나의 흑해 연안 지역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아조프 해로 향하는 마리우폴 항구는 철강, 석탄, 곡물 등을 중동에 수출하는 주요 거점이다. 마리우폴은 우크라이나 주요 수출 항로다. 우크라이나가 전 세계 밀수출의 20%, 옥수수 16%, 보리 19%를 공급하고 있는데, 이곳은 세계 곡물 시장의 핵심 지역이다. 이밖에 자포리자 주, 오데사 주, 키이우와 키이우 주, 루간스크, 하르키우 주에도 우크라이나 고려인이 다소 거주하고 있다.

특히 고려인들은 농지가 넓고 비옥한 우크라이나 남부에서 고본지를 많이 했다. 고본지(Кобонди)는 고려인에 의해 도입된 소련 농업 특정 형태의 임대 브리가다(Бригада, 작업반) 계약이다. 고본지는 봄철에 우크라이나 남부 등에 임시 농막을 짓고 양파·참외와 계절 채소 등을 키웠다가 가을에 집으로 돌아오는 계절농업이었다.

고본지의 첫 시도는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 고려인들이 노동군에 동원되지 않기 위해 도망쳐 갈대밭에 숨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도망자들은 토지 불법 임대를 주제로 집단 농장과 비밀 협상을 시작했다. 집단농장은 노동군 동원과 전시계획 대상의 증가로 인해 극심한 노동력 부족을 겪었다. 따라서 집단농장의 경영진은 이러한 노동자 유치 방식의 불법성을 외면한 것이다. 그러나 다소 흔한 현상으로 고본지는 50년대에 나타나며 이후 고려인 비즈니스 활동의 명함이 된다.

본격적으로 고본지가 출현하게 된 요인으로는 고려인 중심이었던 집단농장의 다국적화였다. 집단 농장의 통합을 목표로 하는 농업 분야의 소련 정책이었다. 이 원칙에 따라 부유하고 번영하는 집단 농장은 덜 번영하는 집단 농장과 통합되었다. 잘 나가던 고려인의 협동농장이 지역 협동농장과 합쳐졌다. 이 통합의 결과는 고려인들 사이의 이동을 포함하여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많은 집단 농장에서 고려인은 다수에서 소수로 변했다. 자신의 민족(에스닉) 집에 대한 느낌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고려인 협동농장은 반고려인, 그리고 비고려인으로 바뀌면서 더 이상 고려인에게 소중하고 고려 사람을 지켜주는 작은 조국이 아니었다. 또한 부유한 협동농장과 빈약한 협동농장의 원칙에 따른 협동농장 통합은 고려인 협동농장들의 생활수준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 인해 일부 고려인들은 이러한 협동농장 밖에서 더 나은 수입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집단 농장의 통합은 예를 들어 축산업과 농작물 생산과 같은 다양한 업종이 혼합되어 있을 때 종종 합리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고려인들은 이러한 집단 농장을 떠나기 시작했다.

고본지는 가족 단위나 기업 규모의 작업반으로 운영됐다. 그들은 새벽부터 새벽까지 일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새로운 유형의 비즈니스를 위한 길을 열었다. 고려인들은 고본지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수익성 저하, 고본지와 다른 신규 비즈니스 창출, 힘든 육체노동 등 때문이다.

이어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고본지에 참여했던 고려인은 중앙아시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남았다. 1992년 타지키스탄 전쟁으로 인해 그곳의 고려인들이 우즈베키스탄을 거쳐 우크라이나로 이동하여 고본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소련 붕괴가 얼마 되지 않아서 국경이 심하게 통제하지 않을 때였다.

다음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우크라이나에서 고본지를 하였던 블라디미르(남, 61세)와 이루어졌던 인터뷰 내용이다. 그는 1962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주에서 출생했으며, 가족은 6남매였다. 이중 2명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1명은 모스크바, 카자흐스탄에 2명, 본인은 한국에 들어와 살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고려인 디아스포라 현주소인 셈이다.

그는 “나는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하였으며, 소련 시절 고르바초프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시작하자 우크라이나로 이동했다. 거기에서 1986-2011년까지 무려 25년간이나 고본지를 했다. 먼저 땅을 가진 기관과 임대 계약을 5-10년씩 하였으며, 토지는 550ha 정도를 임대하여 대신 석탄, 밀가루, 호밀 등으로 대가를 지불했다. 돈으로 원하는 사람은 돈으로 주었지만, 인플레이션 때문에 주로 물건으로 주었다. 농사는 양파를 가장 많이 하였고 수박, 고추, 오이 등도 하였다. 우리는 농사 일꾼으로 불법인 사람들을 주로 고용했다. 가격이 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법인 경우는 적발되면 큰 벌금을 물어야 했다. 예전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는 고본지 농사일을 해서 돈을 잘 벌기도 했다. 고본지 농업을 하기 위한 등록비용, 물 값 등이 늘어나면서 고본지에 큰 이익이 없게 되자 고려인들은 떠나게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김영술 전남대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