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최철의 오페라 오디세이>‘옴므파탈’의 범죄, 모순된 매력으로 다가서다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또’>
과거 남성중심 지배 사회상 작품에 투영
빅토르 위고 ‘일락의 왕’ 모티브로 제작
여성의 순종 강요… 반페미니즘적 시각
사실적 묘사·강렬한 음악… 작품성 인정
2023년 02월 23일(목) 09:43
오페라 ‘리골레또’. 출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홈페이지
이탈리아 오페라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대부분 청순가련형이다.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 여주인공들은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상대방을 위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희생을 기꺼이 하면서 죽음을 향해 불나방처럼 쇄도한다. 너무나 숭고한 나머지 이러한 내용만 찾아 제작자나 작곡가가 작품을 고른 것인가 살펴보면 웬걸? 원작이 팜므파탈 여성일지라도, 극 중에서는 남성을 위해 희생하는 새로운 여성으로 탈바꿈시킨다.

‘팜므파탈(famme fatale)’의 반대어는 ‘옴므파탈(homme fatale)’이다. 사전적 의미로 옴므파탈은 ‘치명적인 남자’로, 저항할 수 없는 특별한 매력으로 상대 여성을 파멸로 이끄는 남성 캐릭터를 이야기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가끔 청순가련의 여주인공을 파멸로 이끄는 역할로 자주 등장한다. 과거 팜므파탈에 대한 사회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이러한 이유로 악녀로서 비난의 대상이었던 것과 달리 옴므파탈의 남주인공은 긍정적 시각으로 비춰졌다.

리골레또가 딸을 풀어달라며 애원하는 장면. 출처 2015 대구오페라축제
여러 여성을 섭렵하는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또’에서 진정한 빌런인 만토바 공작은 여성을 정복하는 것을 취미 삼아 즐기는 남성이지만, 당시 멋진 남성으로, 또한 수려한 아리아를 부르며 여성들을 취하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카사노바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일반 남성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러한 욕망을 대신해 극뿐만 아니라, 분위기에 맞는 배경음악과 멋진 노래로 이뤄진 오페라는 각광을 받았다.

그러면 과연 주류 오페라는 왜 이렇게 반페미니즘적으로 묘사됐을까? 오랫동안 민중들이 가장 사랑했던 오페라는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고 남성의 발아래 여성의 순종을 강요했던 것일까? 그것은 오페라를 제작하는 주체를 살펴봐야 한다. 오페라 제작에는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대부분 경제적 실권을 가진 남성들의 투자와 그들의 구미에 맞게 제작됐기에 남성 중심의 시각이 오페라에 투영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으로 보는 오페라는 반페미니즘적이며 지금까지 이러한 조류에 여성들조차 암묵적인 동의를 했다. 그러나 근래 다수 여성이 작업에 참여하며 기존의 틀에 박힌 작품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다각적인 시도를 볼 수 있다.

오페라 ‘리골레또’ 초연 포스터
오페라 리골레또는 베르디의 3대 오페라 중 하나다. 그의 작품 중 사실적인 묘사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음악으로 작품성과 인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은 수작이다. 이 오페라는 빅토르 위고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비판하며 쓴 소설 ‘일락(逸樂)의 왕’을 모티브로 제작된 오페라이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인 오스트리아의 견제로 상영의 어려움을 갖던 이 작품은 배경이 이탈리아 만토바 공국으로 바뀌어 완성됐다.

오페라 ‘리골레또’. 대구오페라하우스 제공
16세기 만토바 공국의 궁정에서 요란한 웃음소리와 함께 막이 오른다. 시작과 함께 등장한 공작은 파티에 참석한 체프라노 부인을 남편 앞에서 유혹해 반강제적으로 자신의 침대로 데려간다. 여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광대 리골레또, 그는 꼽추이지만 공작의 총애를 받고 있다. 궁정에서 그의 혀로 가신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앞의 상황을 거칠게 풍자한다. 모욕을 당한 체프라노는 리골레또를 향해 엄청난 저주를 퍼붓고 끌려 나가고, 백작의 뒷배경만 믿고 혀를 놀리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귀족들은 공작이 파티장에서 사라지자 리골레또를 심하게 비난한다. 그들은 리골레또의 딸 질다를 그의 애인으로 오해하고, 꼽추인 주제에 젊은 애인을 숨겨 놓고 있다고 조롱한다. 가신들은 질다를 납치해 궁정으로 데려와 파티를 열게 된다. 질다는 공작이 학생으로 자신을 속이고 유혹하던 여자로 이 상황을 기뻐하며 그녀를 취한다. 공작의 욕정 상대로 이용당하고 풀려난 질다, 이 모습에 분노를 느낀 리골레또는 복수하기 위해 킬러인 스파라푸칠레를 고용한다. 킬러의 동생 막달레나가 공작을 길가에서 유혹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암살하려는 현장에 리골레또와 베로나로 가기로 한 남장을 한 질다가 현장에 와있다. 그리고 질다는 공작을 사랑하게 된 킬러의 여동생 마달레나가 ‘저 청년(만토바공작)을 죽이지 말고 주점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을 죽여 리골레또에 주면 되지 않겠느냐’는 남매 사이의 대화 내용을 듣는다. 그리고 아직까지 자신을 파멸시킨 공작을 사모하는 질다는 공작을 위해 어두운 오두막에 들어가 죽임을 당하고 부대 자루에 넣어져 강에서 배를 타고 기다리는 리골레토에게 전해졌다. 리골레또는 공작이 죽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해 기뻐한다. 그런데 저 멀리서 공작의 ‘여자의 마음’이 들려오고 불길한 예감에 자루를 열어보는 리골레또 자루 안의 질다를 확인하고 오열하며,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오페라 ‘리골레또’ 안에는 그 흔한 권선징악도 없다. 수많은 빌런이 난무하고, 그들은 사회의 가장 약자인 여성을 희생시킴으로 희열을 느낀다. 프랑수아 1세를 비판하기보다는 수많은 관객은 공작을 영웅적 호색가로 극찬하기까지 한다. 이 오페라의 진정한 주인공인 바리톤 역 리골레또는 어렵고 강렬한 오페라와 중창들로 작품을 이끌어가지만, 이에 비해 공작은 가볍고 명쾌하며 아름다운 선율로 관객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과거 오페라 리골레또가 세계 극장에서 올려질 때마다, 공작 테너역에 누가 캐스팅됐는가를 주목했고, 멕시코시티의 공작역에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는 열 번 이상 아리아 ‘여자의 마음’을 앙코르 연주했다는 후문이 있다. 그만큼 빌런이지만 관객에는 멋진 남자로만 보인다.

작금의 시대, 대한민국 오페라계에는 여풍이 불며 혁신적인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회의 주류 세력이 아닌 약자들의 세상을 그린다거나, 프랑스의 팜므파탈 여주인공처럼 여성의 역할 변신이 이러한 예이다. 또한 여류 작곡가와 대본가의 약진과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제작 총괄, 작곡과 연출, 그리고 무대 등에서도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지며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보수적인 음악계의 이러한 새로운 시도와 변화는 지상 최대의 무대공연예술로 불렸던 오페라계의 침체에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융복합 예술인 오페라가 변하는 시대정신을 담는 예술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했다.

광주에서도 새로운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소극장 오페라부터 여성의 시선으로 만들어지고 기획된 작품들이 선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변화에 두려워하지 말고 새로운 시선과 사상을 탑재한 다양한 도전이 일어났으면 한다. 광주에서 시작되는 오페라의 새 바람을 기대해 본다. 최철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최철


◇추천하는 명곡: La donna e mobile(여자의 마음)/ 테너 Giuseppe Di Stefano/ Bonn Classic레이블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며 호색가의 기질을 볼 수 있는 만토바공작의 모습이 연상되는 곡이다. 잘생기고 멋진 모습 그리고 수려한 언변으로 여성들을 장악하는 그의 모습이 테너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오버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