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96>“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산신 연주에 푹 빠졌다”
오키나와를 읽다 ③
2023년 02월 23일(목) 17:07
나고시 숙소 호스트 가족들과
산신을 연주하며 노래를 하는 나고 시의 숙소 주인 아저씨
진짜 뱀가죽으로 만든 산신
산신 악보
나고 시 가정집 저녁 식사 초대
뭉쳐놓은 눈과 같은 것이 고래 고기이다(나고 시 가정집)
이자카야에서 가수가 산신을 연주하며 노래를 하고 있다
새해 전날 이자카야
나하 시 뒷골목 이자카야
길거리에 붙어 있는 새해 포스터
여행을 하다보면 성탄절과 새해를 타국에서 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공식적인 행사가 있는 곳에서 그 나라의 문화를 보려고 노력했다. 오키나와에서는 공식적인 카운트다운 행사 같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오키나와라서가 아니라 코로나로 모든 나라가 침묵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여전히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조촐하게 2022년 마지막 날은 나하 시에서 술 한 잔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화려하고 복잡한 것이 싫어서 뒷골목으로 빠졌던 것이 의외로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어둠 속, 불 밝힌 홍등 몇 개가 전부인 특별할 것이 없는 이자카야였지만 지나쳤던 내 발걸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산신 연주 때문이었다. 산신(三線)은 3현으로 이루어진 이자카야 전통 악기다. 중국의 전통악기인 싼시엔이 오키나와로 전해졌고 그것이 다시 일본 본토로 전해져서 샤미센이 되었다.

홍등 바로 아래에서 중년의 한 남자가 산신을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썩 능숙한 솜씨는 아니었지만 이국땅에서 “띵, 띵…” 울리는 현 소리는 내 정서를 울렸다. 이미 작은 선술집은 만석이었다. 다시 나가려는 나를 붙잡은 것도 산신 연주하는 남자였다. 자신의 자리를 야외테이블로 옮기고는 내게 바 자리를 양보했다.

그게 인연이었던가. 자정까지 그곳에 붙들려서는 오사카 위스키까지 마시고 말았다. 여행객들이 오는 곳이 아니라 동네 토박이들만 모이는 곳이라 다들 아는 사이인 듯했다. 주인장인 미짱이 유명한 산신 연주 선생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다들 그곳에 모이면 노래를 하고 연주를 했다. 산신 연주자이면서 가수라고 하는 여자는 이자카야를 한층 달구어놓고는 사라졌다. 거기서부터였다. 바에 앉았던 사람들 각자 돌아가면서 산신을 연주자하면서 노래를 이어가기 시작한 것이.

다음 날 일찍 나고 시로 떠나는 나를 위해 나하 시로 돌아오는 그 다음 주 수요일 9시 다시 그곳에서 모이기로 합의를 보고 난 뒤, 자정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자리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때 주인장인 미짱이 직접 연주하면서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약속을 했다.

산신은 뜻밖에도 나하 시에서 버스로 2시간 7분 걸리는, 나고 시 평범한 중산층 일본 가정집에서도 들을 수가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20분 동안 캐리어를 끌고 가서 당도했던 숙소는 평범한 3층집이었다. 집주인이 2층을 사용하고 손님을 위한 방은 3층에 있었다. 침대 바로 앞에 베란다가 있었는데, 그 앞 풍경이 꽤나 이국적인 풍광이었다. 유럽의 어느 건물처럼 주황색 지붕 실내수영장 뒤로 공원이 잿빛으로 드리운 1월 2일 늦은 오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와서인지 이국적인 풍경이 음산해 보이던 그날 저녁, 집주인인 노부부가 저녁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새해연휴라 나하 시에서 아쿠아리움 매장을 하는 아키코라는 딸이 와있었다. 오십인 그녀는 퍽이나 동안이었는데 터키 출신 남편은 도쿄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혼자만 왔다고 했다. 아들 둘이 있는 남동생은 오사카에서 살고 있어서 새해에는 오지 못했다. 노부부의 고향은 다케토미섬. 젊었을 때 미용실을 운영했다던 마나님은 79세. 우아한 노마나님은 음식 손맛도 좋았다. 맛뿐만 아니라 내놓은 음식 색깔 조합에 예뻐서 먹기가 송구스러울 정도였다. 주인아저씨는 부인보다 여섯 살 아래였는데, 돋보기 너머 평안한 인상이 인상적이었다.

노부인이 정성들여 준비해준 음식을 일본 사케와 마시면서 일본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가던 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산신을 연주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하 시의 이자카야에서 만난 나이 지긋한 분들은 다들 연주를 했다. 오키나와 사람이라면 연주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이미 생겨버렸던 것이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그렇다고 하더니 식사를 마치고 연주를 해주겠다고 했다. 아키코는 내게 살짝 아버지의 산신은 진짜 뱀가죽으로 만든 거라서 비싸다고, 170만 원 정도 한다고 일러주었다.

이렇게 해서 듣게 된 연주와 노래는 이자카야에서 듣던 흥겨운 노래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빗소리가 박자를 넣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 느릿한 음률은 생활 속에서 ‘노래’를 삶의 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며, ‘섬’과 ‘섬’을 잇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집단적 정체성과 공동체 의식을 이어오고 있는,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오키나와는 1879년 소위 ‘류큐처분’이라고 불리는 식민화 조치에 의해 일본 본토의 하나의 현이 되기 전까지는 류큐(琉球)라는 이름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진 독립왕국이었다. 류큐왕국은 끊임없이 지역전쟁을 일으켰던 일본 본토와는 다르게 비무장과 ‘예의를 지키는 나라, 평화를 수호하는 왕국’으로 ‘통합과 조화’를 중요시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에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협력 명령을 거부하고 조선과 명에 협조하였다고 했다. 이런 통합과 조화의 힘은 나고 시의 한 일본 가정집에서 산신 연주를 듣는 내게도 전해졌다. 비오는 음침한 밤의 기운을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펼쳐주는, 노래가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할 수 있는 힘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