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사죄' 전두환 손자…눈물 흘린 오월 가족
전우원씨, 민주묘지 참배서 "광주시민은 영웅"
옛 전남도청서 유가족 만나 큰 절 올리며 사죄
"손자가 무슨 죄…고맙다. 또 와라" 응원
헬기 사격 증거 '전일빌딩' 방문도
2023년 03월 31일(금) 22:05
전두환씨의 손자인 전우원씨가 31일 오전 광주 북구 국립5 ·18민주묘지를 찾아 김범태 5 ·18민주묘지관리소장과 추모탑으로 향하고 있다. 정성현 기자
할아버지를 대신해 광주를 찾은 고 전두환씨의 손자 전우원(27)씨가 오월 영령을 참배하고 5·18 유가족과 광주시민들에게 사죄했다. 유가족들은 ‘앞으로 자주 오라’고 화답했다.

전씨는 31일 오전 11시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오월 영령의 넋을 기렸다.

참배에 앞서 작성한 민주의 문 방명록에는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계신 모든 분들이십니다’고 적었다. 이 내용은 자신의 할머니이자 전두환씨의 아내인 이순자씨가 과거 언급한 발언을 의식해 우회적 비판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씨는 지난 2019년 한 언론매체의 인터뷰에서 “민주주의 아버지가 누구인가. 저는 우리 남편이라고 생각한다”고 발언해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헌화와 분향을 마친 전씨는 5·18 공법3단체 관계자들과 함께 80년 5월 첫 희생자인 김경철 열사와 ‘5월의 막내’ 전재수 열사·행방불명자·고 정동년 5·18기념재단 이사장 묘역을 찾았다.

김범태 5·18 민주묘지관리소장에게 열사들에 대한 설명을 듣던 전씨는 조용히 본인이 입고 있던 검은색 코트를 탈의해 이들의 묘비 곳곳을 닦았다. 숙연한 표정으로 힘껏 문지르는 모습에 일부 유가족이 “휴지가 있으니 옷깃으로 닦지 말라”고 말리기도 했으나, 그는 묵묵히 행동을 이어갔다.

전씨는 이후 ‘묘비를 닦을 때 어떤 심정이었는가’라는 취재진의 질문에 “제가 입었던 옷 따위를 사용해서 닦아드리지 않고 더 좋은 것으로 닦아드리고 싶었다”고 전했다.

참배에 함께한 전재수 열사의 형 전재룡(62)씨는 “동생에게 어릴 적 하고 싶은 일을 하게 해준다고 약속했는데, 생각지 못한 순간에 떠나보냈다. 그 이후 아버지 유품(노트)에서 사진을 찾게 되기 전까지 얼굴(영정) 조차 없었다”며 “그간 사무치게 원망했다. 그러나 오늘 이 응어리가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 같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못한 일을 이 젊은이가 해냈다. 가족으로서 광주시민으로서 정말 고맙다”고 울먹였다.

고등학생 시민군으로 항쟁에 뛰어들었다가 사망한 문재학 열사의 어머니 김길자(84) 여사는 “언제나 나는 ‘사과만 한다면 전두환을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까지 이게 실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며 “손자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사과하러 왔다. 그의 손자가 무슨 잘못인가. 우리가 감싸줘야 한다. (전씨가) 언제든 마음이 울적하고 괴로울 때 이 망월동 묘지에 와서 영령들하고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이런 행보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 이걸로 끝나면 안 된다”고 전했다.

한참을 아들의 무덤과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김 여사는 ‘작년에 떠난 우리 남편이 이 사과를 같이 들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참배를 마친 전씨는 민주의 문 앞에서 “이 자리에 있게 해 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너무 늦게 와 죄송하다”며 거듭 사죄와 감사의 말을 전했다.

이어 “이렇게 와 보니 지은 죄가 뚜렷하게 보인다. 정말 죄송한 마음뿐이다”며 “넓고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줘 감사하다. 광주시민 모두가 이 나라의 영웅이다.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앞으로도 사죄를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옆에서 전씨의 소회를 듣던 김길자 여사는 그를 두 팔 벌려 껴안았다.

전두환씨의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오후 광주 동구 옛전남도청 별관을 찾아 5·18 당시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정성현 기자
당초 5·18 민주묘지 참배가 마지막 공식 일정이었던 전씨는, 5·18단체와 함께 최후 항쟁지인 옛 전남도청과 전일빌딩을 추가로 찾았다.

이곳에서 오월 어머니들은 만난 그는 큰 절을 올리며 “앞으로 더 열심히 해서 죄를 심판받고 진심으로 사과드리겠다”고 전했다.

어머니들은 “용기 내줘 고맙다. 이 마음 잃지 말고 광주의 한을 풀 수 있는 횃불이 되어 달라”며 “언제든 와서 ‘밥 주세요’하면 밥 주겠다. 허심탄회하게 또 이야기 나누자”고 말했다. 전씨도 “광주 방문이 해가 될까 두려웠는데 이렇게 반겨줘서 감사하다.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와 이야기를 듣고 배우겠다”고 답했다.

만남을 마친 뒤, 이명자 전 오월어머니 집 관장은 전씨에게 자양강장제 음료를 전했다. 다른 어머니들은 음료를 마시는 전씨 옆에서 “힘내라! 힘!” 응원의 목소리를 보냈다.

이 전 관장은 “우리는 전두환의 ‘전’자만 들어도 사지가 떨리던 사람들인데, 손자의 진정 어린 사과를 보니 마음이 풀린다”며 “진정성을 끝까지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전씨는 인근의 전일빌딩으로 이동해 5·18 당시 남겨진 헬기 사격 흔적을 둘러보며 “너무나 당연한 (헬기 사격) 증거다. 할아버지가 발뺌을 했다”고 생각을 밝혔다. 그는 해설사의 설명을 듣는 동안 처참했던 그날의 광경에 연신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전일빌딩에서는 지난 2016년 5·18 당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탄흔 50여 개가 발견, 이듬해 국과수 감식 결과 ‘사실’로 판명됐다. 전두환씨는 생전 자신의 회고록을 펴내며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한 고 조비오 신부를 거짓말쟁이로 모는 등 계엄군의 헬기 사격을 부정·왜곡해 왔다.

모든 일정을 마친 전씨는 “돌을 던져도 할 말이 없는 사람인데 오히려 따뜻하고 너그럽게 대해줘 더 죄송하고 감사하다”며 “앞으로 살아가면서 행동으로 이 죄를 뉘우쳐 나가겠다”고 다짐을 전했다.

한편, 마약 투약 혐의로 이날 출국 금지 조처가 취해진 전씨는 주말까지 광주에 머물며 비공식 만남을 계속 이어갈 예정이다.
전두환씨의 손자 전우원씨가 31일 오후 광주 동구 옛전남도청 별관을 찾아 이명자 전 오월어머니집 관장이 건넨 자양강장제를 마시고 있다. 박소영 수습기자
정성현 기자·박소영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