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오월 광주’를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하는 이유
2023년 05월 17일(수) 18:17
5·18민주화운동 43주년이다. 전국화·세계화된 민주화운동이건만 아직까지 행방불명자들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 맺힌 유가족들은 하루빨리 행방불명된 부모와 자식의 뼈라도 찾아 어루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다. 암매장에 대한 양심선언 등이 이어져 영령들의 영혼이 국립5·18민주묘지에 묻히길 기원한다. 사진은 43년이란 세월을 대변해 주듯 광주 북구 구 망월동 묘역에 설치된 행방불명자들의 얼굴 사진 등이 담긴 안내판 유리에 비친 묘역의 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김양배 기자
그해 봄도 꽃은 피었다.
 
광주를 감싸는 무등산은 온통 녹색으로 물들었고 전남도청에도 완연한 봄 햇살이 내렸다. 광주와 전남은 독재자의 죽음 이후 맞이할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 이유 없이 끌려가지 않고, 차별당하지 않고, 세금이 제대로 쓰이며, 보다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 그리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것을 바랐다.
 
그렇게 목놓아 희망을 외쳤던 1980년 광주의 봄.
 
금남로에 사람들의 핏자국이 꽃잎처럼 뿌려졌다. 거리는 온통 녹색의 군복으로 가득했고, 그들 옆으로 많은 이들이 초점 없는 눈동자로 뒹굴었다. 군인들은 처음엔 빨갱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다음엔 폭도를 제압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나중에는 “너희들이 폭도”라고 외쳤다.
 
아니었다. 그들이 죽인 것은 아이를 만날 희망에 부풀어 있던 산모였고, 누군가의 아버지·어머니였으며, 취업을 준비하는 웃음 많은 형과 누나였고, 꿈 많은 어린 소년·소녀였다.
 
광주는 저항했다.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죽음을 무릅쓴 항쟁을 벌였다. 살아야 했고, 살려야 했다. 항쟁기간 중 닷새의 평화가 왔다. 시민들은 질서를 유지하며 먹을거리를 나눴다. 부상자 치료를 위해 피도 나눴다. 광주정신의 시작이었다. 그 현장들은 지금도 광주·전남 곳곳에 사적지로 남아있다.
 
43년이 흘렀다. 그 긴 시간 동안 광주와 전남은 여전히 아무도 답해주지 않는 질문을 외치고 있다. 왜 죽어야 했는가. 누가 총을 쏘라고 했는가. 시체는 어디로 가져갔는가. 또 한결같이 말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된다”고.
 
이것이 대한민국 헌법에 수록될 짧고도 강렬한 한 줄이다. 어떤 정치적 수사도, 의도도 없이 ‘1980년 5월 광주 시민들이 군부독재에 맞서 싸웠고 그 희생으로 지금의 민주주의가 만들어졌다’는 한 줄. 그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존재하는 이유와도 일맥상통한다.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 -헌법전문 중
노병하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