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윤선의 남도인문학>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 누가 웅어의 고향을 찾아줄까
349.웅어를 찾아서
보리 패는 계절, 바다에 있던 웅어는 산란을 위해 민물 늪인 갈대숲으로 거슬러 오른다. 하지만 강이 막히고 갯벌이 죽고 갈대가 없어지어지면서 웅어는 산란처를 잃었고, 도깨비 이야기도 사라졌다.
2023년 06월 08일(목) 13:06
행호관어도. 겸재 정선
금강하류 웅포 원조웅어횟집의 웅어회. 이윤선 촬영
나주 정관채 쪽물명인 집에서 마련한 웅어회. 이윤선 촬영
행주나루 근처 고양시의 웅어횟집에 나온 웅어구이. 이윤선 촬영
행주나루 근처 고양시의 웅어횟집에 나온 웅어회. 이윤선 촬영
행주산성에서 바라본 행호(맞은편 빌딩숲이 마포나루). 이윤선 촬영
행주나루에 얽힌 얘기다. 옛날 어느 노스님이 강을 건너러 나룻배를 탔다. 강을 다 건넜는데 배삯이 없던 스님은 도포 주머니에서 갈댓잎을 몇 개 꺼내 주었다. 사공은 돈을 주는 것인 줄 알고 받았으나 갈댓잎이라는 사실을 알고 어이없어하며 강물에 던져 버렸다. 그랬더니 갈댓잎들이 물고기가 되어 헤엄쳐 나가는 것 아닌가. 이 물고기가 바로 웅어였다. 비싼 값의 배삯을 받아놓고도 사공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덕분에 한강에는 웅어가 갈댓잎처럼 많이 헤엄쳐 다니게 되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평소에 웅어를 즐겨 먹었다. 백제가 함락당한 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웅어를 잡아 오라 명령했다. 왕이 먹은 물고기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던 웅어가 잡히지 않았다. 연고를 알아보았다. 한강이나 금강의 웅어들이 적장의 먹거리가 될 수 없다고 의논한 후, 뱃전에 머리를 부딪쳐 모두 죽어버렸다고 했다. 옛 임금에 대한 충절을 지키기 위해 웅어가 백제지역에서 모두 달아나버렸다고도 했다. 이 때문에 의리 있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의어(義魚)라 부르게 되었다. 왕이 살던 곳을 그리워한다는 웅어의 전설도 생겨나게 되었다.



웅어를 찾아서



행주나루 설화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갈대다. 웅어는 청어목 멸치과에 속하는 물고기로 길이가 30~40센치 정도 된다. 성질이 얼마나 급한지 잡히자마자 죽어버린다. 의자왕과 관련한 의어(義魚) 전설이 그래서 생겼을까? 1469년 하연(河演)이 편찬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웅어 기록이 나온다. 김해 부남포의 어량(魚梁)에서 위어(葦魚)가 잡혔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위어(葦魚)의 위(葦)가 갈대이기 때문에 행주나루의 웅어 전설과 통한다. 웅어는 이 외에도 우여(강경), 웅에(의주), 차나리(해주), 우어(충청), 도어, 제어, 열어, 멸어, 망어 등의 다양한 이름들이 있다. 보통 우리말로는 ‘웅어’라 하고 한자로는 위어(葦魚)라고 한다. 새끼는 ‘모롱이’라고 한다. 숭어의 새끼를 ‘모갱이’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국어사전에서는 웅어의 옛말을 ‘난셰끼ᄂᆞ리’라고 한다. 한자말 웅어(熊魚)는 드렁허릿과의 민물고기를 뜻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위어(葦魚)인 웅어와 구별된다. 지금까지 영산강이나 섬진강 하구 등에서 잡히는 짱뚱어과의 ‘대갱이’를 그리 부르는 것 아닌가 싶다. 어쨌든 웅어가 위어(葦魚)라는 갈대의 이름을 달게 된 이유는 산란할 때 민물의 갈대숲으로 거슬러 올라오기 때문이다. 마치 조기가 모래개펄을 찾아 회유해 올라오는 것처럼. 연어가 산란하기 위해 강 상류의 모래등으로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겸재 정선의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에 웅어잡이 배가 그려져 있다.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세 첩 그림 중 하나다. 행호는 지금의 행주산성 부근 한강을 말한다. 행주나루에 있던 위어소(葦魚所)는 웅어를 잡는 즉시 임금님 수라상을 위해 궁으로 수송하는 국가기관이었다. 행주나루에서 동편으로 건너다보이는 곳이 마포나루이기 때문에 물때만 맞추면 수송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보리가 패는 늦봄이 웅어 제철이다. 봄철의 진미를 임금님 수라상에 올렸으니 행호와 행주나루가 웅어의 본산으로 여겨졌을까?



곰나루(熊浦), 하단포에서 영산강 늘바오 배들이까지



나는 이십몇 년 전 <목포21>이라는 신문에 ‘영산강 민중생활사’라는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다. 지금은 온라인 기록마저 없어졌기 때문에 자료를 찾을 수는 없지만, 주요 내용은 영산강의 고기잡이와 민중들의 삶에 관한 것이었다. 그중 17회째 연재물이 ‘하당이 딛고 간 중바우에서 웅어잡이를’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영산강 하구언 늘바우 돈내 선창에서 웅어잡이를 하던 김복실(당시 55세)씨를 인터뷰하였다. 1톤 반이 넘는 대성호라는 이름의 선박을 소유하고 웅어잡이를 하던 분이었다. 3월 말에서 6월 말까지이니 지금이 웅어잡이 철이다. 지금도 웅어잡이를 하는지 확인해보지는 못했다. 근자에 행주나루 부근 고양시의 웅어횟집에 들렀다. 주인 고향이 목포라 했다. 지금은 한강에서도 웅어잡이가 어렵기에 주로 목포 앞바다에서 잡은 웅어를 횟감으로 사용한다는 말을 했다. 표지판에는 남해, 해남, 목포 등지가 웅어 원산지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금강 하구의 웅포에도 웅어 횟집이 몇 곳 있다. 엊그제 일부러 원조 웅어횟집에 들렀다. 으레 그러듯이 비빔웅어회가 나왔다. 수십 년 전에는 서울에서도 웅어회를 맛보기 위해 익산 웅포로 내려왔단다. 그만큼 웅포가 웅어의 본산지라는 뜻일까? 웅포(熊浦)와 웅어가 모종의 관련이 있을 듯도 싶지만 내 공부가 덜 되어 확정하여 말하기 어렵다. 나주에도 다시와 영산포 외곽에 웅어 횟집이 몇 곳 있다. 나주 다시나 한강 하류 횟집 등으로 나가는 웅어는 대개 목포 앞바다에서 생산한 것들이다. 생각해보니 근래 몇 년 웅어를 찾아서 한강, 금강, 영산강 등을 답사하거나 음식체험을 했다. 영산강 민중생활사에서 시작한 현장조사 일환이다. 낙동강 하류 웅어는 관계 공무원을 통해 자료를 입수했다. 사하구청 경제진흥과 김지수님께 감사드린다. 코로나로 ‘하단포구 웅어축제’가 중단되어 아쉬운 점이 있지만, 내년이라도 재개하면 답사할 예정이다. 임진강 혹은 대동강 웅어도 접해보고 싶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남북교류가 활성화될 날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럴 줄 알았으면 2003년 평양과 대동강 서해갑문을 방문했을 때 웅어 얘기를 좀 물어볼 걸 그랬다. 내가 웅어를 주목한 것은 민물과 바닷물의 교섭지 곧 기수(汽水)지역에 이 물고기가 산다는 점에 착안했기 때문이다. 졸저 『한국인은 도깨비와 함께 산다』(다할미디어)에서 극구 밝혔지만 뭍과 물의 전이지대를 주목하고 그 안의 생태와 문화의 내력들을 가지런히 하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이미 관련 자료를 많이 쌓아두었기 때문에 기회만 만들어지면 단행본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물론 지금 생각하는 제목은 ‘웅어를 찾아서’이다.



남도인문학팁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갈대늪, 웅어와 도깨비가 사는 전이지대

웅어 설화가 전해지는 한강 하류에 장항습지가 있다. 2006년 4월 환경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 4대강 중 유일하게 하구가 둑으로 막혀 있지 않아 강물과 바닷물이 교류하는 기수역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 최대 버드나무 군락지이자 40여종 2만여 마리의 겨울 철새가 월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금강의 하구에 있는 옛 익산의 나루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낙동강 하구의 옛 포구들은 물론이고 안동까지 뱃길로 이어졌던 부산의 하단포도 다르지 않다. 나주 영산포와 목포의 들머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섭하며 바다의 이야기와 내륙의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다. 보리 패는 계절, 바다에 있던 웅어는 산란을 위해 민물 늪인 갈대숲으로 거슬러 오른다. 갯벌의 도깨비 이야기는 틀림없이 산란하러 올라온 웅어가 전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이 막히고 갯벌이 죽고 갈대가 없어지면서 웅어는 산란처를 잃었고, 도깨비 이야기도 사라졌다. 산란을 위해 거슬러 올라올 고향을 잃어버렸다. 내가 주목하는 지점이 여기다. 애니메이션 ‘니모를 찾아서’에서처럼 누군가 웅어의 고향을 이야기해주고 종국에는 그 고향을 찾아줘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 전국을 답사하며 이 글을 쓴다. 웅어가 사는 곳에 도깨비가 산다.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