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천국”… 폭염에 지하철로 피신하는 노년층
“에어컨 혼자 틀면 돈만 나가요”
지하철역·‘만남의 광장’ 등 북적
7월 65세 이상 이용객 37만여명
“노인 여가 시설 부족…확충 필요”
2023년 08월 08일(화) 17:33
8일 광주 동구 금남지하상가 만남의 광장에는 폭염을 피해 시원하게 휴식을 취하려는 어르신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양배 기자
“혼자서 에어컨 틀면 돈만 나가지. 여기가 우리한텐 천국이야.”

한낮 최고 기온이 35도를 찍은 지난 8일 오후.

광주 동구 금남지하상가 ‘만남의 광장’에는 땡볕 더위를 피하려 모여든 노년층으로 가득했다. 노인들은 저마다 흩어져 자리를 잡고 담소를 나누거나 잠시 눈을 붙이며 휴식을 취하는 모습이었다.

광장 한쪽에 설치된 대형 에어컨에선 서늘한 바람이 나오고 있었지만, 워낙 푹푹 찌는 바깥 온도 탓인지 많은 인원이 뿜어내는 열기를 식히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자리에 앉은 노인들은 부채질을 하거나, 그마저도 없으면 손이나 손수건 등을 휘휘 흔들었다.

이날 이곳에 모인 노인들만 30여명. 경로당이나 무더위 쉼터는 덥기도 하고 지역주민들이 부담스러워 좀처럼 발길이 가지 않는다는 이들은 그나마 마음 편한 ‘피서지’로 지하철 역사를 택했다.

오전 11시부터 이곳에 있었다는 정봉순(82)씨는 지하철역이 없는 북구 양산동에 살지만, 마땅히 갈 데가 없어 버스를 타고 일부러 지하철역을 찾았다고 했다.

정씨는 “양동역에서부터 지하철을 타고 목적 없이 왔다 갔다 했다. 점심시간이 돼서 여기서 내려 밥을 먹고 잠시 쉬고 있는 거다”며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경로당을 가면 화투 치는 일밖에 없다. 그냥 아무것도 신경 안 써도 되고 시원한 지하철이 그야말로 ‘천국’이다. 계속 여기서 머물다 조금 덜 더운 오후 5시께나 집에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매일 이곳에 ‘출석 체크’를 하는 노인도 있었다. 백왕교(77)씨는 “몇 년 전부터 여름이 되면 매일 점심 먹고 피서 겸 시원한 지하철역이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도서관에 간다. 도서관이 휴관하는 어제는 이곳에 100명 정도의 노인이 모였다”며 “집에서 혼자 에어컨을 틀면 전기료만 많이 나온다. 갈 곳 없는 노인들은 이곳이 최고다”고 말했다.

한 노인은 무더위 쉼터로 지정된 은행을 찾았다가 눈치가 보여 지하철로 발길을 돌렸다고 했다.

추대창(79)씨는 “몇 년 전만 해도 여름에 은행에 자주 갔다. 그곳에 가면 시원한 물이나 음료수도 주고, 편하게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유행한 뒤로 그마저도 닫혔고, 최근에 다시 열었다고 해 방문했더니 직원들이 반기지 않는 눈치더라. 그래서 오늘 처음으로 친구들이 좋다고 하는 광장으로 와봤다”며 “에어컨이 3대나 있어서 정말 좋다. 앞으로도 자주 올 생각”이라고 말했다.

8일 광주 동구 금남지하상가 만남의 광장에는 폭염을 피해 시원하게 휴식을 취하려는 어르신들로 북적이고 있다. 김양배 기자
통계적으로도 노인들의 지하철 이용은 여름에 급증하고 있다.

광주도시철도공사에 따르면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 기준, 최근 3년간 65세 이상 수송인원은 △2021년 32만5476명 △2022년 36만7371명 △2023년 37만4316명에 달했다.

여기에 지하철에 탑승해 이동하지 않고 만남의 광장 등 역사 안 시설에서 머무는 인원까지 고려하면 이보다 더 많은 노인이 지하철을 이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도시철도공사 관계자는 “인근 거주민들이 더위를 피하기 위해 이동 없이 역사에 머무는 경우도 많아 수송 인원 데이터로는 ‘쉼터’로서의 지하철 이용자를 정확히 집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최근 전기 요금 부담 가중 등으로 인해 지하철역을 복지 공간으로 이용하는 시민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노년층 여가 시설 부족’으로 보고 장기적 관점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미경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노인 여가 시설 중 대표적인 것이 경로당과 복지관인데, 광주는 노인복지관이 자치구마다 1개씩밖에 없어 턱없이 부족하고 여건도 좋지 않은 곳이 많다. 그래서 노인들이 지하철 등에 모여 낮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며 “경로당, 노인복지관 등 이용도 사회적인 비용이 들어가게 되는데, 이마저도 부담스러운 저소득 노년층의 경우 지하철역 등 공공시설에 가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어 조 교수는 “이동이 어려운 노인들을 위해 곳곳에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전용 여가·복지 시설이 확충돼야 한다”며 “앞으로 폭염 등 기후재난은 더욱 심해질 것이기에 온열질환에 노출된 노년층을 보호할 수 있는 지자체 차원의 촘촘한 복지 시스템 마련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강주비 기자 jubi.kang@jnilbo.com